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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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의 거품을 타파한 <오베라는 남자>의 프레드릭 배크만 작가의 두 번째 힐랑소설이다.

전작이 괴팍한 어르신과 이웃 간 유쾌한 우정을 다루었다면 이번 작품은 일 곱살 엘사의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고집이 돋보였다.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엘사의 보물찾기를 따라가면 평범한 이웃의 평범한 이야기가 언제보다 특별하게 가슴을 울렸다.


엘사는 문 앞에 서서 숨을 참는다.

그러다 할머니가 "아직은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지! 모든 일곱 살짜리에겐 슈퍼히어로가 있어야 하니까!"라고 했을 때 눈물로 축축해진 그린핀도르 목도리를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44쪽)


엘사에게는 할머니가 한 분 계셨다. 조금 있으면 일흔여덟이신 할머니의 재치넘치는 입담과 허를 찌르는 성격은 초반부터 정이 들게 했다. 내게도 할머니가 계시지만 두 분 다 첫 번째 할머니가 아니시라 어느 때보다 엘사의 할머니가 각별했다. 엘사를 위해서라면 무모한 일도 서슴지 않는 할머니의 존재감이 인상적인 만큼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엘사는 결코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베라는 남자>에서도 느꼈지만 새삼 작가님의 독특하고 개성넘치는 캐릭터 창조력이 대단하다싶었다. 그 인물의 직접적인 대사와 행동이 없더라도 마지막까지 마음 속에 유효하니깐말이다.


"또 만나자, 미아마스의 자랑스러운 기사야."

할머니가 엘사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할머니는 절대 "안녕"이라고 하지 않고 항상 "또 만나자"라고 한다. (41쪽)


​한편 엘사와 할머니가 상상으로 지은 깰락말락나라의 여섯 개 왕국의 이야기는 거의 매편마다 등장하는데 엘사의 진지한 말투로 듣다보면 처음에는 유치해도 시간이 갈수록 실존하지만 갈 수 없는 세계처럼 그리웠다. 나도 잠이 깰락말락하면 떠날지 모를 끝이 없는 세계, 지켜야 할게 있는 세계는 엘사를 사랑하는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 상상의 성이었다. 그 성은 할머니가 엘사에게 남긴 의문스러운 편지의 출발점이자 혼자 남은 엘사를 지켜줄 기사들을 찾는 열쇠이기도 했다.


할머니가 엘사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게 되더라도 할머니를 미워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리고 성을 지키겠다고. 친구들도 지키고." (71쪽)


할머니와 엘사네가 사는 4층짜리 아파트에는 아홉 가구와 다임초콜릿을 좋아하는 개가 살고 있었다. 1층부터 4층까지 평범하지만, 그래서 그보다 인상적일 수 없는 이웃들이 거주했다. 누구보다 별다를게 없는 하루를 보내고 누구나처럼 나눌 수 없는 아픔을 이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프레드릭 배크만 작가는 그들에게 공감과 배려에 탁월한 온화한 캐릭터가 아닌 정말 아이다운 엘사를 보내주었다. 아이라서 가능한 예측불허의 상상과 행동, 대사는 이웃들의 철통같은 방어막을 허물고 엘사홀릭에 빠지게 만들었다.


"다들 나더러 지금은 할머니가 보고 싶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해요,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요."

여자는 공감하는 눈빛으로 다시 엘사를 올려다본다.

"왜?"

"아줌마는 괜찮아지지 않았잖아요."

여자는 눈을 반쯤 감는다. (321쪽)


<오베라는 남자>가 그간 소극적이고 온화한 모습으로만 그려진 노인의 이미지를 뒤집는 전개가 돋보였다면, 이번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는 어린아이의 거침없고 재기발랄한 입담이 가슴을 시원하게 뻥 뚤어주었다. 체면은 버려두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을 속시원하게 하고 상대방을 직시하는 엘사의 천진난만한 마음이 부럽고 사랑스러웠다. 십 대, 이십 대도 아닌 일곱 살 엘사라서 가능한 일 같다. 불운한 상황을 맞닦뜨려도 해피앤드일거라는 확신은 표지를 보자마자 들었지만, 오히려 그 덕에 안도하며 읽을 수 있었다. 매몰찬 말이지만, 세상에 결코 완벽한 조건과 완벽한 행복 따위는 없다. 그나마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할 몫이 행복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계기가 되는 듯싶다. 엘사의 행복도, 나의 행복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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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6-03-26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 디자인 참 맘에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