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신술 클럽
김지윤 지음 / 오리지널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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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윤 작가의 소설 '호신술 클럽'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팍팍한 삶을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약간은 유머러스한 시선으로 포착해 낸 작품이다. 책을 읽는 내내 무거운 현실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결코 침울함에 빠지지 않게 만드는 작가 특유의 재치 있는 표현 덕분에 웃음과 감탄이 끊이지 않았다.


-남자는 만두 가게 앞에 올려놓은 찜통 같았다. 닫혀 있는데도 그 열기가 느껴지는. 이제 뚜껑만 열면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연기가 날 것만 같아 위태로워 보였다.-


특히 일상의 찰나나 막막한 상황을 비유하는 독창적인 문장들이 돋보였는데, 그중에서도 만두가게 찜통에 비유한 대목은 가슴 답답하고 숨 막히는 현실을 이보다 더 생생하고 웃프게 묘사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기억에 남는다. 이처럼 자칫 우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상황을 특유의 유머로 비틀어내는 표현력은 독자로 하여금 인물들의 고단함에 깊이 동감하면서도 마음의 짐을 한 뼘 내려놓고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선물한다.


<호신술 클럽 1기 모집>

나를 지키고 싶은 사람

더 나아가 마음까지도 지키고 싶은 사람

한 번쯤은 세상에 기합을 넣고 싶은 사람

제대로 바닥을 쳤다면 낙법 치고 다시 일어나고 싶은 사람


이야기 속에서 인물들을 끌어모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호신술 클럽의 전단지 문구 역시 매우 인상적이었다. 당장이라도 가입 신청서를 내밀고 싶을 만큼 강렬한 끌림을 주었는데, 그 문장 속에는 단순히 물리적인 공격으로부터 몸을 지키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는 것을 넘어 스스로를 지키고 삶을 대면할 용기를 주겠다는 묵직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순간을 맞이한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 바닥을 강하게 치고 다시 튀어 올라오는 낙법처럼 나 역시 다시 일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을 품게 된다. 소설 속 전단지는 바로 그런 웅크린 마음들을 정확히 건드리며, 다시 힘을 내어 시작해 보고 싶다는 동기를 부여한다.


작품의 중심을 이끄는 주인공 정도라는 인물은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매력을 가득 품고 있다. 완벽한 영웅이나 거창한 인물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묵묵히 버텨내며 고군분투하는 우리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정의로움을 가슴에 품고 있지만 타인을 향한 다정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힘겨운 현실 앞에서 휘청거리면서도 끝내 자신만의 속도로 걸어가는 모습은 깊은 감정이입을 이끌어낸다. 특히 그가 과거의 아프고 힘든 기억들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며 결국은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마음 한구석을 뭉클하게 만든다. 누구에게나 말 못 할 상처와 과거의 짐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인물의 성장은 그 자체로 내게 커다란 위로와 희망으로 다가온다.


낙법은 바닥을 치고 다시 일어나는 겁니다. 바닥을 쳤다고 그대로 누워 있으면 안 돼요.


자식들은 꼭 그렇다. 내가 괜찮아졌으면 엄마도 당연히 괜찮아졌을 거라고 생각하는거 -중략- 그럼 엄마는 어쩔 수 없이 혼자 마음 삭이며 내 새끼도 힘들었겠지 하며 괜찮은 척하고 있다는 거.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힘은 수많은 공감의 순간들을 자아낸다는 점에 있다. 주인공과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 그들이 직면하는 일상의 문제들, 그리고 문득 떠올리는 내면의 고백들은 마치 나의 이야기이거나 내 이웃의 이야기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누구나 한 번쯤 느껴보았을 외로움과 불안,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소설 곳곳에 촘촘히 박혀 있어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스스로의 삶을 돌보고 지켜낸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타인과 연대하며 얻는 온기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되새기게 만드는 여러 장면들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결국 '호신술 클럽'은 단순히 물리적인 호신술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라, 거친 세상 속에서 자신의 마음과 일상을 지켜내는 ‘삶의 호신술’에 관한 이야기다. 유머러스한 문장 속에 숨겨진 따뜻한 시선과, 힘든 현실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을 향한 애정 어린 응원이 작품 전체를 따스하게 감싸고 있다. 바닥을 치고 다시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나를 지킬 작은 용기가 필요할 때 언제든 다시 펼쳐보고 싶은 책이다. 팍팍한 삶에 지쳐 있는 이들에게, 그리고 자신의 삶을 다정하게 끌어안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언제든지 전화하라는 정도처럼 유쾌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든든한 일상의 방패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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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의 후더닛
아사네 주지 지음, 김은모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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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은 아사네 주지 작가의 일본 SF 미스터리소설 천년의 후더닛으로 내친구의 서재 출판사의 사전 서평단에 선정되어 출간 전에 남들보다 빨리 읽어볼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제목만큼이나 내용도 굉장히 파격적인데, 행성간 이동을 목적으로 SF소설에서 주로 사용되는 냉동수면을 소재로 한 SF미스터리소설인 것!
그것도 무려 천년을 타임슬립해 진행되는 일본 미스터리 소설 역사상 가장 거대한 스케일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단기간 냉동수면 실험이 성공하고 인류는 최초로 천년이라는 긴 시간을 목표로 콜드슬립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이에 거금을 내고 추첨을 통해 선정된 일곱명이 쉘터 안에서 잠들게 된다. 그리고 깨어난 사람은 칼에 찔려 사망한 한 명을 제외한 여섯.
콜드슬립의 안정성을 위해 외부에서 여는 것이 불가능하게 설계된 쉘터의 특징 때문에 무려 천년이라는 시간을 넘어선 밀실이 완성되고 이 소설은 후더닛, 살아남은 여섯명의 사람 중 누가 범인인지를 묻는다.

사실 추리소설의 요소에는 후더닛 뿐만이 아니라 와이더닛, 하우더닛 등 다양한 요소가 존재하겠지만 나처럼 소년탐정 김전일로 미스터리 장르에 빠진 세대라면 추리소설의 근본 중의 근본은 바로 '누가 범인인가', 바로 후더닛이 아닐까 싶다.
소년탐정 김전일을 보다보면 각 챕터마다 등장인물을 분할컷에 넣어 소개하는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한 명씩 사망할 때 마다 흑백으로 처리되며 결국은 등장인물 중에 범인이 밝혀지며 에피소드는 마무리 된다. 대여점을 통해 읽다보면 종종 누군가가 범인의 얼굴에 표시를 해두는 악질적인 장난을 경험하게 되기도 한다.
결국은 내게 추리소설의 근본은 범인 찾기, 바로 후더닛이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추리소설이기 이전에 SF소설로서의 재미 또한 놓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특별한 설정의 재미를 잘 살려 몰입을 돕는다. 추리소설에서 추리를 빼고 작품을 논할 순 없겠지만 천년이 지났다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특수설정 덕분에 이 소설은 단 한구간도 지루한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품의 근본이 되는 질문인 범인은 누구인가 외에도 세계관과 설정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연구소는 천년이 지나도 계속 존재하는가.
밖의 인류는 어떻게 발전했을까.
콜드슬립이 상용화되어 이 들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이들이 냉동 수면에 들어간지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은 건 아닐까. 등등.

그리고 이런 SF적인 설정들이 반전과 범인찾기라는 추리소설의 재미 요소들과 조화를 이루며 SF 특수설정 미스터리 소설이라는 어디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맛의 걸작으로 완성된다.
정말 일본 추리소설을 그간 꽤 읽어왔다고 자부하지만 이런 종류의 작품은 처음 경험해본다. 정말이지 소설 '천년의 후더닛'은 SF소설이면서 미스터리소설로 완벽한 재미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띠지에 [스포일러 절대금지]라는 문구가 유독 눈에 띈다. 추리소설 덕후라면 저 문구가 얼마나 가슴을 두근두근하게 만드는 지 잘 알 것이다. 이 작품은 얼마나 대단한 반전을 가지고 있길래, 내 뒤통수를 얼마나 쎄게 때려주려고 저렇게 기대를 하게 만드나 싶어 지니까. 그리고 저 문구 덕분에 이 소설의 엄청난 재미에 대해 30%도 언급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미스터리소설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호불호 없이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을 작품 '천년의 후더닛'을 꼭 읽어보시길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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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 회한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민경욱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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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은 반전의 제왕 나카야마 시치리 작가의 히포크라테스 시리즈의 국내 최신작 히포크라테스 회한으로 다섯편의 단편을 담은 연작 단편집이다.


늘상 나카야마 시치리 작가의 책을 읽고 후기를 남길 때면 작가에 대한 소개를 빼놓을 수 없는데 그만큼 많은 작품을 출간하고 있고 그 작품 수 만큼이나 다양한 시리즈를 구성하며 각 시리즈가 교차하며 '시치리 월드'를 만들어나가기 때문이다.


나 역시 시치리 월드에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시리즈'로 입문해 비웃는 숙녀 시리즈와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그리고 이누카이 하야토와 펴정없는 검사 시리즈까지 거쳐 이번에는 히포크라테스 시리즈까지 손과 눈이 닿게 되었다.


굉장한 다작가 답게 반전의 제왕이란 별명 외에도 사회파의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별명도 꽤 유명하다고 하는데 히포크라테스 시리즈야 말로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유족의 목소리보다 죽은 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놔둬도 알아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우리가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한마디도 하지 못합니다."


오늘 읽은 히포크라테스 회한은 히포크라테스 시리즈 6종 중 4번째 출간 작품으로 국내에는 선서와 우울의 뒤를 이어 세번째로 출간된 작품이기도 하다.

노인의 목소리, 이방인의 목소리, 아들의 목소리 등 이 작품에 수록된 다섯편의 단편은 죽은자의 목소리를 법의학으로 읽어내는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히포크라테스 회한을 읽고 있으면 정말 이 작가의 사전조사와 지식이 대단하다고 새삼스레 감탄하게 되는데 법의학에 대한 전문성과 사회파 미스터리에 걸맞는 깊은 주제의식을 모두 꼼꼼하게 챙기면서도 우리가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이유인 반전까지 놓치지 않는 작가의 필력에 놀라게 된다.

이전 몇몇 작품에서 일본의 소년법과 심신미약 상태의 범죄를 깊게 다뤘다면 이번 작품은 일본의 법의학이 처한 현실과 법의학 선진국에 비해 부족한 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시작된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를 방송에서 필터링 없이 언급한 법의학계의 권위자 미쓰자키를 의식해 익명의 누군가가 방송 게시판에 글을 올리며 일본 법의학계는 말 그대로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친애하는 미쓰자키 교수. 인터뷰에서는 아주 대단하게 말하던데 시신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당신의 귀를 시험해 보지. 앞으로 나는 사람을 딱 하나 죽일 거야. 반드시 자연사로 보이게 말이야. 그러나 시신은 살해당했다고 주장하겠지.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들어봐.


범인의 살인예고 덕분에 이제 일본의 경찰은 자연스럽게 죽은 것 처럼 보이는 시신들마저도 모조리 의심하고 사법해부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쓰가노 마코토와 고테가와 가즈야가 이런 상황에서 듣게 되는 다섯가지 시신의 목소리가 연작 단편의 내용을 이룬다.


-관할서 과장을 협박하다니, 아직 백년은 일러.

백 년이 지나면 협박해도 되나.


-이래 봬도 악동 시절에는 나나한을 몰고 다녔어.

이래 봬도 라니, 지금도 악동으로만 보이는데.


늘상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유머러스하고 유쾌한 두 주인공 고테가와 형사와 마코토 조교의 티키타카도 작품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추리소설이라면 거의 대부분 벌어지는 범인과 탐정의 두뇌싸움이 아닌 법의학자와 시신이 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사건을 풀어간다는 점도 새로웠다.


무엇보다도 사회파 미스터리의 대가답게 이번 작품에도 다양한 일본의 사회적 이슈들이 녹아 있었는데 블랙기업과 외노자를 대상으로한 임금차별문제를 비롯해 우익과 외국인차별 그리고 더 나아가 인종차별까지 추리소설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나는 사회파 미스터리보다는 본격 미스터리를, 그 중에서도 특수설정 미스터리를 좋아해왔다. 깊은 주제 의식보다는 단순한 도파민을 쫓아 페이지를 넘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나 믿고 보는 작가인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은 달랐다. 강력한 한방의 반전보다는 은은하게 남는 여운이 인상적인 작품으로 다가왔다.


사회파의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명성에 걸맞게 일본의 사회문제를 담은 주제의식을 제대로 보여주면서도 반전이 주는 재미까지, 두마리 토끼를 모두 훌륭하게 잡아낸 나카야마 시치리의 신작 미스터리 소설 히포크라테스 회한을 꼭 읽어보시길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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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벳 퍼즐러즈
오야마 세이이치로 지음, 김은모 옮김 / 톰캣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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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은 내가 좋아하는 오야마 세이이치로 작가의 작품, 알파벳퍼즐러즈.

P, F, C, Y의 이니셜을 딴 네편의 단편이 커다란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나가는 연작단편집의 형태를 하고 있다.


사실 나는 이전까지는 적당한 분량의 깊이감이 있는 장편 추리소설을 좋아했는데 오야마 세이이치로 작가의 단편을 접한 후에 취향이 변했다.

장편이 하나의 사건을 두고 깊이감있는 내용으로 승부를 보는 전장이라면 단편은 그야말로 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승부하는 일기토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

그리고 그런 수많은 일본 추리소설의 단편들 중에서도 가장 내 취향에 맞았던 작품들을 꼽으라고 하면 역시 오야마 세이이치로 작가의 작품들이었다.

붉은 박물관 시리즈부터 밀실수집가까지 하나같이 내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드려팬 걸작이었지만 오늘 읽은 알파벳퍼즐러즈는 그런 작품과도 결이 다르게 다가왔다.

단편소설집이면서 하나의 작품으로 완결성을 가지는 연작단편집으로 장편의 재미까지 고스란히 잡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오야마 세이이치로의 최고점에 가깝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엇다.


수록된 네편의 단편들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를 해보자면.

피독망상에 걸린 사람이 독에 의해 사망한다는 아이디어를 멋지게 풀어나간, 그야 말로 단편은 아이디어의 번뜩임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P의 망상.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더 뒤통수가 얼얼하게 다가왔던 F의 고발.

사건의 진상이 주는 놀라움과 그 이후에 찾아오는 정교한 범인을 추려나가는 방식에 한번 더 놀라게 되는 C의 유언.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하나의 단편만으로도 이 소설을 읽은 시간을 값지게 만들어준, 연작단편집의 대미를 장식하는 중편소설 Y의 유괴까지.

중편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유괴사건 현장의 생생함을 그대로 담은 묘사 덕분에 장편소설 이상의 여운을 남기며 와이더닛의 정수를 담아낸다.


어느 순간부터 추리소설은 더 강한 자극과 더 놀라운 반전을 위해 새로운 방식을 찾아나서며 고도파민 시대를 열어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도 추리소설을 읽으며 더 이상 추리를 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어린 시절 소년 탐정 김전일을 읽으며 범인을 맞추기 위해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던 나는 사라지고 그저 작가의 글을 따라 읽으며 어떤 자극적인 결말이 기다릴지만 기대하는 수동적인 독자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오야마 세이이치로 작가의 작품은 다르다. 여전히 사건의 진상에 대해 감도 잡지 못하고 결말에 감탄하는 것은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의 단편소설들은 너무나도 공정하게 느껴져서 나도 다시 한번 추리에 도전해봐야지 하는 도전 욕구를 불러 일으킨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호불호없이 즐길 수 있는,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 반전의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않는 추리소설 본연의 재미를 잘 살린 작품 알파벳퍼즐러즈를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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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를 먹다가 죽었는데, 저승에서 썸남을 만났다
커스티 그린우드 지음, 허선영 옮김 / 향기책방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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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은 제목부터 단숨에 눈길을 사로 잡는 로맨틱코미디 소설로 '햄버거를 먹다가 죽었는데, 저승에서 썸남을 만났다'라는 제목의 소설이다. 원제인 'The Love of My Afterlife'와 비교해 보면 한국어 제목이 백만배는 더 매력적이고 트렌디하게 느껴진다. 원제는 평범한 로맨스 소설 같은 느낌을 주지만, 한국어 제목은 책장을 펼치기도 전에 도대체 무슨 황당하고 도파민 팡팡 터지는 이야기가 펼쳐질지 참을 수 없는 호기심과 읽고 싶어지는 욕구를 자극한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이 독특한 제목이 품고 있던 유쾌하고 따뜻한 온기가 온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기분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매력적이다. 마치 잘 짜인 웰메이드 로맨틱 코미디 영화 속 인물들이 스크린을 뚫고 나와 살아 숨 쉬는 것 같다. 냉소적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주인공 델피부터, 까칠하면서도 비밀스러운 아픔을 간직한 아랫집 남자 쿠퍼, 그리고 사후 세계의 친근한 매니저 메릿에 이르기까지 누구 하나 미운 캐릭터가 없다. 그들의 티키타카와 묘한 케미를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이들을 응원하게 된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의 수위와 분위기의 절묘한 조화다. 분명 책을 읽고 있으면 꽤 발칙하고 섹시하며 핫한 ‘19금’ 감성이 툭툭 묻어나는데도, 신기하게 전체적인 작품의 공기는 한없이 몽글몽글하고 따뜻하다.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이토록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책을 읽는 내내 오래전 보았던 린제이 로한 주연의 '퀸카로 살아남는 법' 같은 2000년대 초반 하이틴 로맨틱 코미디 영화 특유의 빈티지한 감성이 물씬 풍겨와 마음이 내내 간질거렸다.


사후 세계에 대한 설정 역시 이 소설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 포인트다. 보통 죽음이나 저승이라고 하면 어둡고 무겁거나 두려운 이미지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사후 세계를 너무나 따뜻하고 재미있으며 유쾌한 공간으로 그려냈다. 정말로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면 딱 이 소설 속 공간 같았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바람까지 품게 만들 정도다. 당장 햄버거를 시켜야겠다는 엉뚱한 생각마저 든다.


글로 쓰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동안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모든 이미지가 머릿속에 컬러풀하고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이야기 극 초반부에 등장하는 사후 세계 대기실의 풍경이다. 포근한 라벤더 향이 가득하고 나도 즐겨듣던 명곡인 ‘돈 워리 비 해피’ 노래가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빨래방으로 위장된 저승의 이미지는 강렬한 시각적, 청각적 자극을 남긴다. 이 사랑스럽고 기묘한 빨래방의 정경은 작품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머릿속에 깊이 남아 지워지지 않는 따뜻한 이정표 역할을 해준다.


결국 이 소설은 갑작스럽고 엉뚱한 죽음을 통해 진짜 삶의 의미와 사랑을 찾아가는 한 내향적인 여자의 따뜻한 성장이야기다. 가볍고 유쾌하게 훌훌 읽히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과 매일 마주하는 사소한 일상들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오랜만에 아무런 생각 없이 흠뻑 몰입해 웃고 설렐 수 있었던, 선물 같은 독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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