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밀리 랜드
사와무라 이치 지음, 최고은 옮김 / 하빌리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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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은 보기왕이 온다로 대표되는 히가자매시리즈의 작가 사와무라이치의 SF소설 패밀리 랜드로 사와무라 이치 특유의 정서가 살아있는 작품이었다.

사와무라 이치라고 하면 내게는 미쓰다 신조와 함께 일본 호러 소설계의 양대산맥으로 다가오는데 그 중에서도 사와무라 이치의 작품만의 특징이라면 호러소설 속에 갑질, 성차별, 따돌림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문제의식을 비롯해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작품 패밀리 랜드는 호러소설이 아닌 SF소설이었지만 사와무라 이치의 사회에 대한 여러 문제의식이 그대로 담겨 있었고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다루는 만큼 섬뜩한 호러 소설의 요소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작품을 사회파 호러 SF소설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SF소설집 패밀리랜드는 여섯개의 단편이 수록된 작품으로 작품의 제목에 걸맞게 발전된 과학기술로 인한 가족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첫번째 단편, 컴퓨터 시어머니는 요양원에서 원거리로 최첨단 기술을 통해 며느리를 감시하는 고부갈등을 다루는데 익숙하다면 익숙하고 올드하다면 올드할 수 있는 주제인 고부갈등을 SF적인 요소를 통해 표현한 방식이 무척 훌륭했다. 무엇보다 사와무라 이치라는 작가에게서 기대하는 섬뜩하고 소름돋는 결말이 인상깊은 작품이었다.

두번째 단편, 날개 꺾인 금붕어는 유전자 편집기술을 통해 인류가 상향 평준화 된 사회 속에서 이를 거부하고 자연스럽게 태어나는 아이들간의 갈등을 다룬다. 특히나 인상적인 작품이었는데 평범하게 태어난 아이를 어쩌다생긴아이, '어생이'라고 부르는 모습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휴거'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고 사회적 인식을 고려해 유전자편집을 위한 약을 표면적으로는 임신촉진제로 에둘러 표현하는 것도 무척 현실적인 디테일이 살아있어 인상깊었다.

세번째 단편 매리지 서바이버는 최첨단으로 발달한 AI 커플 매칭 시스템을 주제로 개인정보와 국가의 침해에 대한 사회적 문제를 던지며, 결혼에 대한 긍정적인 사회적 인식을 넘어 결혼 적령기가 지난 미혼자들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에 대해 말한다.

네번째 단편 사요나키가 날아오른 날은 인공지능에 대한 견해차이로 살인사건으로까지 번지고 만 모녀관계를 다루는데 나는 이 네번째 작품을 읽으면서야 패밀리 랜드에 수록된 작품간에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얼핏보면 인공지능과 로봇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자식에 대한 지나친 구속으로 표현되는 그릇된 모성애에 대한 메시지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다섯번째 단편 '오늘 밤 우주선이 보이는 언덕에서'는 경제적 상황에 따른 간병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간병을 위해 항문을 막고 팔다리를 자르는 기괴한 설정이 호러작가 사와무라 이치의 상징성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었다.

간병을 위한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는 이들이 결국 간병할 대상을 생명활동만 하는 고기덩어리로 만들어 연금수령용 장치로 대하는 부분이 특히 소름돋게 무서웠다. 가장 SF의 탈을 쓴 호러소설에 가까웠다.

이 작품 역시 1/4로 잘린 호박이 등장하는데, 컴퓨터 시어머니 에피소드와 대조되며 더 차가운 사회문제로 표현된다.

마지막 단편 '사랑을 말하기보다 이와 같이 집행하자'는 의외로 따뜻하게 다가온 작품이었는데 사이버로 간편화된 장례문화가 발달한 미래사회에서 정통방식의 장례를 치루는 사람을 지켜보며 진정한 장례문화가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나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축의금과 부의금의 신권과 구권이 가지는 의미도 인상깊게 다가왔다.

결국 이 작품 패밀리 랜드는 여러 SF적 설정과 장치 속에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한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을 담아 우리에게 전한다.

결국은 SF적인 요소도, 공포소설과 같은 요소도 현재의 우리 문제를 더 쉽게 되돌아보고 느끼게 해주기 위해 작동한다.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은 많이 겪어봤지만 사회파 호러 SF소설은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무척 인상깊게 다가오는 것이 '역시 사와무라 이치!'라는 감탄을 절로 하게 된다.

읽고 나면 씁쓸한 여운을 음미하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 '패밀리랜드'를 꼭 한 번 읽어보시길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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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관 초연속 살인 사건 - 마녀는 X와 죽기로 했다
미나미 아소부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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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은 미나미 아소부 작가의 일본 특수설정 미스터리 소설 '영겁관 초연속 살인 사건'으로 무려 미스터리 장르에 타임루프를 접목시킨 작품이었다.

지금까지 타임루프 추리소설을 딱 두 편 읽었는데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일곱번 죽은남자'와 시라이 도모유키의' 엘리펀트 헤드'로 두 작품 모두 굉장히 미스터리소설로서의 재미가 엄청났기 때문에 이 작품에도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이번 소설은 타임루프를 마녀의 저주라는 형태로 작품속에서 발현되는데 그 방식이 무척 재미있었다.

작품 속 마녀 릴리주디스 에어에게는 세가지 저주가 걸려있는데 첫번째가 사망과 동시에 24시간 전으로 돌아가는 '회귀'와, 사망 시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친 사람을 회귀에 포함시키는 '동반'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체의 변화를 거부하는 '불로불사'까지 이 세가지 저주는 단순한 특수설정을 위한 장치로 작용하지 않고 작품 전반에 걸쳐 깊이있게 사용된다.

소설은 영겁관의 현 당주 샬럿 브래드버리가 병으로 사망하며 유언장의 공개와 장례식을 위해 관련된 사람들이 영겁관으로 모이며 시작된다.

소설은 본격적인 살인사건이 시작되기 전부터 궁금증을 자아내는 포인트들을 여럿 가지고 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년 전 죽은 브래드버리의 전 당주이자 히스클리프의 아버지인 시어도어 브래드버리의 기묘한 죽음은 정말 자살인가.

이번에 병으로 사망한 샬럿 브래드버리의 죽음은 진실인가. 왜 가족들은 그녀의 시신을 보지 못했는가.

히스클리프 브래드버리의 과거는 무엇일까

와 같은 큼직큼직한 의문부터 시작해 셀 수 없이 많은 소소한 떡밥들까지 어느 하나 작품속에서 유기되지 않고 완벽하게 회수해내는 작가의 필력이 놀랍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구성에 있는데 추리소설의 팬이라면 본격적으로 가장 높은 관심을 두고 몰입할 명탐정과 마녀가 각 각 따로 존재하고 심지어 주인공이자 1인칭 시점의 화자가 히스클리프 브래드버리라는 점이었다.

소설의 극 초반부의 미세한 단서들이 후반부에서 회수되는 작품의 짜임새의 완성도도 매우 훌륭하지만 타임루프물의 재미에도 굉장히 충실하다.

웹소설만 보아도 단순 개연성 없이 회귀를 통해 자극만을 추구하는 작품들이 매우 많은데 논리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한 추리소설답게 영겁관 초연속 살인사건은 타임루프를 매우 매력적으로 사용한다.

회귀를 하며 조금씩 상황을 다르게 만들어 그에 따라 실시간으로 달라지는 결과를 관측하는 회귀물만이 줄 수 있는 재미도 충실하다.

그리고 이야기가 후반부로 들어서며 타임루프로 인해 서사가 매우 복잡해지는데 이 부분에서 슈뢰딩거의 야옹이가 생각나며, 두번 세번 곱씹으면서 읽는 재미까지 있었다.

마녀와 저주라는 매력적인 소재와 완성도 있는 이야기의 짜임새에 책장을 덮은 뒤에도 생각나는 여운 가득한 결말까지, 호불호 없이 모두를 만족시킬 특수설정미스터리소설로 '영겁관 초연속 살인 사건'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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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살귀 - 끝나지 않은 이야기
쌈무이 지음 / 책과삶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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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이라는 길고 긴 시간 동안 밤을 지켜온 '공포라디오0.4MHz 쌈무이'가 책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반가움과 기대감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평소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습관처럼 틀어놓던 방송이었기에, 쌈무이 특유의 목소리로 즐기던 시청각의 공포가 온전히 글자로만 옮겨졌을 때 과연 그 서늘한 긴장감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지 살짝 걱정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소리라는 직관적인 자극이 사라진 자리를 텍스트가 채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은 채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는 첫 장을 넘기자마자 기분 좋게 엇나갔다. 텍스트는 시청각 매체와는 또 다른 독보적인 맛을 지니고 있었다. 소리가 즉각적인 소름을 유발한다면, 문자는 독자의 상상력을 천천히 죄어오는 은근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단어를 하나씩 읽어 내려갈 때마다 머릿속에서 구체적인 장면이 그려졌고, 여백에서 느껴지는 정적은 오히려 공포의 깊이를 더해주었다. 특히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여타 가상의 공포소설들과 달리 실화 사연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온다. 깔끔하게 사건이 해결되거나 악귀가 퇴치되는 인공적인 서사와 달리, 실화 괴담 특유의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불쾌함과 찝찝한 끝맛이 마지막 한 줄 까지 깊은 여운을 남겼다.


수많은 사연 중에서도 단 22편만을 엄선해 엮어낸 만큼, 수록된 이야기 하나하나의 완성도가 상당했다. 오랜 세월 쌓아온 라디오 방송의 수만 가지 제보 중에서도 정수만을 뽑아냈다는 점이 단박에 느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었던 에피소드는 단연 '후쿠오카 호텔에서'였다. 한국에서 가장 가까워 나도 자주 찾게 되는 익숙한 여행지 후쿠오카의 어두운 화장실 안쪽에 웅크리고 있던 젖은 여자의 비현실적인 기척은, 글귀를 읽는 내내 마치 내가 그 공간에 홀로 남겨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오싹함을 선사했다. 평범한 일상의 공간이 순식간에 가장 위험한 장소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책은 공포라는 감정에만 머무르지 않고 에필로그를 통해 각 사연자들의 후일담까지 차분하게 담아낸다. 기이한 일을 겪고 난 뒤에도 여전히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흔적을 바라보며, 어떤 사건은 문장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의 시간 속에서 계속 이어진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소리로 들을 때와는 또 다른 깊이로 감각을 자극하는 이 실화 괴담집은, 불을 끄고 자려고 누운 침대 위에서 문득 닫힌 문 너머의 어둠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묘한 끌림을 지니고 있다. 책장을 덮은 후에도 손끝에 남은 서늘한 감각은 당분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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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당의 살인
김영민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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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은 김영민 작가님의 해신당의 살인으로 표제작인 해신당의 살인을 비롯해 총 세편의 작품이 수록된 소설집이다.

김영민작가님의 작품은 앤솔러지에 수록된 단편으로만 접해오다 작년 수상탑의 살인으로 장편작품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그 감동이 기억난다. 한국에서도 이런 본격적이고 대담한 트릭이 나오다니 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공개된 세편의 작춤에서는 '수상탑의 살인'에서 잊지 못할 티키타카를 보여줬던 입자물리학 교수 더 다크매터 '김서연'과 그의 대학원생이자 노예인 한규현이 다시 등장해 반가움을 더한다.

세 편의 작품은 모두 재미있었으나 역시 가장 인상깊게 읽은 작품은 표제작인 '해신당의 살인'이었다. 굉장히 특이하게 다가온 작품인데 초중반까지는 추리소설이 아니라 호러, 오컬트 소설을 읽고 있는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까지 들게 된다.

멀리 떨어진 섬의 폐쇄적인 작은 마을과 외딴 섬에 덩그러니 위치한 해신당이라는 설정부터가 매력적이지만 더 인상깊게 다가오는 것은 이 섬이 밀실이 되는 이유였다.

무려 용왕신의 분노로 인해 나가는 배마다 저주로 격파되어 물리적인 고립이 벌어지게 되는 것!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이 작품속에 두명, 그리고 물리학을 전공한 채 소설을 읽고 있는 나까지, 과연 용왕신의 분노라는 믿기 힘든 상황을 어떻게 물리학적으로 설명할지 호기심을 갖고 읽어나가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한규현처럼 벌어진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이린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추리의 논리가 착착 쌓여가며 '해신당의 살인'은 추리소설로 퍼즐을 맞추는 재미를 선보인다.

해신당의 살인이 알리바이에 집중했던 작품이라면 두번째 작품인 '회색 장막 속의 용의'는 언뜻 살인 동기에 포커스를 맞춘 듯 하다 충격적인 반전의 한방이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감히 표현하자면 계란 밑을 깨서 세우는 정도의, 발상의 전환만으로 이렇게 간단하게 이 범죄가 완성된다고?! 하며 놀라게 되는 재미가 있었다.

천식환자들이 가득한 저택이 공장 사고로 인한 유독가스 때문에 밀실이 되는 설정 역시 용왕의 분노만큼은 아니더라도 인상깊게 다가왔다.

그리고 역시나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웃음포인트도 여전하다. 특히나 나와 개그코드가 잘 맞았던 장면은 미세먼지가 심하니 너도 곧 천식에 걸릴 거라며 천식한약 구입을 권하는 장면!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나던 장면이었다.

마지막 작품 '불온한 손'까지 이번 김영민 작가님의 소설집은 알리바이와 다잉메세지 그리고 범행동기와 같은 가장 추리소설에서 중요한 근본과도 같은 요소들을 잘 활용한 것 같아 아무 부담없이 미스터리 장르의 팬들에게 일독을 추천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속이 뻥 하고 뚫리는 장면으로 서평을 마친다.

"내 고산 스님한테 다 들었다. 니 여기 뒤지러 왔제? 애미가 니 버릴라꼬 이 섬에......"

"그 말대로 전 여기 뒤지러 왔습니다. 근데 보니까 할아버지도 뒤질 날이 얼마 안 남은 거 같은데 제가 어떻게 해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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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호시스 슬라우 하우스
믹 헤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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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미드가 없나 두리번 거리다 어느 유튜버의 인생작이란 소개로 접하게 된 영드 '슬로 호시스'를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과장을 조금만 보태면 '브레이킹 배드'를 안본 눈을 부러워하던 내 눈이 만족할만한 두번째 드라마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멋스러운 정장에 최첨단 장비들로 무장한 007에서 볼 법한 스파이 대신 구멍 난 양말을 신고 담배 연기와 방귀 냄새를 풍기며 임산부처럼 배가 뽈록하게 튀어나온 잭슨 램의 등장부터가 기존 스파이물의 공식을 산산조각 냈기 때문이다. 찌질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카리스마 넘치는 분위기에 푹 빠져 시즌을 정주행했던 기억과 함께, 드디어 한국에 정식 출간된 믹 헤런의 원작 소설 '슬로 호시스'를 오늘 펼쳐 들었다. 이미 드라마로 내용을 모두 알고 있는 입장에서 과연 원작 소설이 주는 재미가 남아 있을지 조금은 걱정되었지만 책장을 넘기자마자 그것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소설은 드라마가 가진 긴장감과 블랙유머를 한층 더 밀도 높은 문장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드라마 속 잭슨 램은 굉장히 멋진 편이었다는 사실도 추가로 알게 되었다!


이 소설에 빠져들게 만드는 첫번째 요소는 극 초반부에 배치된 '슬라우하우스'에 대한 치밀하고 현실감 넘치는 묘사다. 공문서나 명함, 전화번호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공과금 고지서조차 제대로 찾아오지 않는 '수렁의 집'. 슬라우 하우스 시리즈의 작가 믹 헤런은 이 오래되고 낡은 건물의 오래된 계단과 먼지 쌓인 서류 더미, 그리고 희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유의 탁한 공기를 시각을 넘어 청각과 후각까지 느껴지게 만든다. 본부인 리젠트파크에서 쫓겨나 무의미한 서류 분류 작업에 갇힌 요원들 느린 말들 슬로우 호시스의 절망감과 좌절이 이 슬라우하우스라는 공간을 통해 완벽하게 표현된다.


무엇보다 흑과 백으로 대비되는 엘리트 첩보 세계에서 벗어나 이제 이도 저도 아닌 쓸모 없어져버린 낙오자들의 세계를 누렇게 물든 노란색과 빛 바랜 회색으로 표현하는데 이 시각적인 표현이 무척 효과적이며 생생하다. 이미 드라마 속 슬라우하우스에 익숙한 내게도 또다른 느낌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드라마에서는 스쳐지나갔던 공간의 눅눅함과 성공가도에서 탈락한 자들의 무기력한 분위기가 글을 통해 전해지며 책을 읽는 나로 하여금 순식간에 이 한심하면서 웃픈 유배지의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든다. 그리고 이 우울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잭슨 램과 리버 카트라이트의 티키타카는 소설을 읽는 내내 절로 실소를 터뜨리게 만드는 최고의 재미 요소로 작용한다.


훈련소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슬라우하우스로 굴러떨어져 어떻게든 다시 올라가고 싶어 안달이 난 리버와, 그런 리버의 열등감과 조급함을 정확히 파악하고 사사건건 신랄한 독설을 퍼붓는 램의 대화는 그야말로 명불허전이다. 드라마에서 게리 올드만과 잭 로던이 보여준 모든 것들이 바로 원작의 힘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램이 툭툭 던지는 무례한 말과 그 속에 숨겨진 노련한 직관, 그리고 이에 매번 억울해하면서도 리젠트파크에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리버와의 대화는 자칫 무겁기만 할 수 있는 스파이물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환기한다. 원작소설로 만나는 램의 독설은 드라마보다 더 날카롭고 묵직하게 다가온다.


이야기가 진행되어 극우 단체에 의해 무슬림 청년 납치 사건이 터지고 느린 말들이 본의 아니게 권력 다툼에 휩쓸릴 때 원작소설의 재미가 빛을 발한다. 현대 정보국의 관료주의와 정치적 계산, 예산 다툼을 향한 믹 헤런의 냉소적인 풍자는 신랄한 독설 사이에 더욱 선명하게 녹아 있다.


드라마를 이미 본 사람들에게 원작소설 '슬로 호시스'는 단순한 줄거리의 재확인이 아니다. 각 인물들의 내면 깊숙이 숨겨진 열등감과 생존과 성공에 대한 욕구, 그리고 겉으로는 마구 대하는 듯하지만 은근한 책임감으로 판을 흔드는 램의 진짜 실력을 훨씬 더 세밀하고 깊이 있게 즐길 수 있다. 미워할 수 없는 낙오자들의 반격을 담은 원작소설을 만난 것은 드라마를 재미있게 본 팬으로서 감사한 선물처럼 느껴진다.

드라마를 보았든, 보지 않았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첩보소설 슬로호시스를 읽어보시길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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