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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영혼에게
시오세 마키 지음 / 그늘 / 2025년 8월
평점 :
'잘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영혼에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인 삼도천을 배경으로, 잊힌 영혼들과 그들을 인도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힐링 판타지 소설이다. 일본에서 전격소설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며, 2025년 8월 국내 정식 출간되었다.
무엇보다 표지의 그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표지 덕분인지 초반부터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는 감성으로 폭풍몰입해 읽을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여러 계약직을 전전하다 영혼을 보는 능력 덕분에 ‘사이노카와라 주식회사’에 입사한 사쿠라 이타루다. 처음에는 단순히 망자를 저승으로 안내하는 뱃사공 역할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떠나지 못한 영혼들의 마지막 인사와 미련을 들어주고 함께 정리하는 일이었다. 이타루는 선배 슈이치와 함께 매일 영혼들을 맞이하며, 그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마주한다.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도모라는 소녀다.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단순하지만 절실한 바람을 가진 그녀는 부모에게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채 짧은 생을 마쳤다. 그녀는 끝내 어머니에게 선택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슬퍼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존재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도모의 모습은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가 왜 끝까지 부모의 사랑을 갈망하는지,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간절히 ‘기억되고 싶어 하는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중심 인물은 젠지와 롄화다. 젠지는 어린 시절부터 동생과 비교당하며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자신을 포기한 채 살아가던 그는, 타국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롄화를 만나 사랑을 깨닫는다. 하지만 사회적 차별과 불안정한 신분은 두 사람의 관계를 끊임없이 위협했고, 젠지는 끝내 자신조차 사랑받지 못한 존재라 믿으며 삶을 마감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차별과 배제 속에서 ‘존재 자체가 무가치하다’는 상처를 어떻게 안고 살아야 하는지 묻는다.
마지막으로, 이타루와 사이노카와라 주식회사 동료들의 사연이 이어진다. 누구나 누군가에게는 민폐였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있지만, 동시에 다른 누군가에게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할 수 없고 대신해서도 안 된다”는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묵직하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단지 판타지적 상상력 때문이 아니다. 저자인 시오세 마키가 집필 과정에서 실제로 어머니를 떠나보냈다는 사실이 작품 속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래서인지 작별을 묘사하는 장면들은 형식적이지 않고, 마치 자신이 직접 경험한 슬픔을 한 겹 한 겹 녹여낸 듯한 깊이가 있다. “잘가”라는 인사가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를 끝까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가장 따뜻한 행위로 다가온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이타루가 영혼들의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준다는 점이다. 경청의 태도 그 자체가 바로 구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도모와 젠지의 사연은, ‘사랑받지 못했다’는 감정이 단순히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사회의 그림자와도 맞닿아 있음을 일깨운다. 부모의 무관심, 사회적 차별, 타인의 시선 속에서 소외된 이들이 결국 죽음 이후에야 주목받는 현실은 우리 사회를 그대로 반영한 이야기 같았다.
그러나 이 소설은 절망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슬픈 순간에도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너도 누군가의 삶 속에서는 충분히 소중한 존재라는 위로를 건넨다. 비록 망자들의 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는 지금 살아 있는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기억하고 지탱해야 하는지 묻는 이야기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나는 ‘잘가’라는 말이 단순한 끝맺음이 아니라 사랑과 기억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별은 끝이 아니라, 남겨진 자들의 기억 속에서 이어지는 또 다른 삶의 형태일지도 모른다.
잘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영혼에게는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삶을 향한 소설이다. 나 또한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이미 작은 위로가 되었을지 모른다는 믿음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소중한 사람이 떠나갔어도 적어도 나는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에서 위로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혹은 단 한 번이라도 내가 사라져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고 느껴본 사람이라면, 꼭 이 책을 읽고 위로를 얻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