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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글쓰기의 발견 - 헤밍웨이, 글쓰기의 '고통과 기쁨'을 고백하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래리 W. 필립스 엮음, 박정례 옮김 / 스마트비즈니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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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써 내려간 그의 편지를 보며 우리는 그가 얼마나 끊임없이 글쓰기에 대한 고찰을 이어나갔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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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글쓰기의 발견 - 헤밍웨이, 글쓰기의 '고통과 기쁨'을 고백하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래리 W. 필립스 엮음, 박정례 옮김 / 스마트비즈니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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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하여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헤밍웨이, 글쓰기의 발견』을 읽고

여러 사람들은 글쓰기에 대해,

야곱이 밤중에 천사와 씨름하는 것,

즉 상처를 입고 이름을 확인받고 축복받는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마거릿 애트우드, 『글쓰기에 대하여』

1.

헤밍웨이에게 '글쓰기'란 무엇이었을까. 글쓰기는 '발명'보다 '발견'에 가까운 것이라고. 우리는 어둠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섬광을 발견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라고. 이성복 시인이 말했던가. 내게 글쓰기는 삶과 사람 사이에서 하는 끝나지 않는 줄다리기 같은 것인데. 그럼 다시, 그래서 헤밍웨이에게 '글쓰기'란 무엇이었을까.

2.

한 시간 가까이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헤밍웨이의 『헤밍웨이, 글쓰기의 발견』을 읽었다. 글쓰기에 대한 헤밍웨이의 생각을 한데 모아놓은 책이었다. 헤밍웨이는 책뿐만 아니라 여러 작가나 편집자, 비평가들에게 편지를 보내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혀왔다고 한다. 거침없이 써 내려간 그의 편지를 보면서 그가 끊임없이 글쓰기에 대한 고찰을 이어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두 사람을 위해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네.

자신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완벽한 글.

그게 아니면 멋진 글을 쓰려고 노력하지.

그다음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글을 쓰네.

그녀가 글을 읽거나 쓸 줄 아는지,

또는 생존 인물인지 고인인지 상관하지 않고 말일세."

어니스트 헤밍웨이, 『헤밍웨이, 글쓰기의 발견』 中

3.

글쓰기가 가지고 있는 고통과 기쁨에 대해 고백하는 헤밍웨이. 삶의 지리멸렬함을 이겨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헤밍웨이. 단 하나의 '섬광'같은 문장을 만나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었던 헤밍웨이. 보이는 대로, 아는 대로 쓰지 않고 무엇에 관해 쓸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지 계속해서 고민했던 헤밍웨이. 그 모든 헤밍웨이가 이 책에 들어있다.


+

책 속에는 특히 스콧 피츠제럴드(『위대한 개츠비』를 쓴 바로 그 작가)에게 보낸 편지글이 많이 실려 있는데, 생각보다 두 사람의 관계가 더 각별했던 것 같아 괜히 질투가 나기도 하므로 주의 바람.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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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은유 지음, 이지선 북디자인 / 읻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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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어¹와 도착어² 사이에서

─은유의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를 읽고

1.

은유 작가와 일곱 명의 한국 문학 번역가들이 나눈 인터뷰집이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라는 제목으로 '읻다'에서 출간되었다. 이 제목은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시구에서 따온 것인데, "순수문학 대 참여문학이라는 낡은 이분법과 무관하다"는 점을 밝혀둔다.

2.

인터뷰에 참여한 번역가들은 '출발어와 도착어 사이에서'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의심을 펼치는 중이었다. 한국 시를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하기 위해 계속해서 작품과 작가,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내던졌다. 보다 적확한 문장을 찾기 위해 애쓰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번역'이라는 것이 어쩌면 일종의 새로운 창작 과정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들은 하나의 작품 안에 또 다른 아이덴티티를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도착어'에 다다랐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그들의 작업이 원어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함을 확장시키는 일임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언어의 경계를 허물어트리는 일이 생각보다 많은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도.

3.

지금─여기의 한국 시 번역 현장을 가장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이 책에 들어있다.

4.

시 번역은 아름다운 일이다.

5.

인도계 미국인 한국문학 번역가 '알차나'의 얘기를 듣고 난 뒤에 은유 작가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긴다.

"자기 인식은 시작이 어렵지, 일단 시작되면 파도처럼 밀려온다. 막을 수도 없고 거스를 수도 없다.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p.170)

이 문장을 읽으며 '자기 인식'의 과정이 내가 시를 읽는 마음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 편의 시를 읽기 전과 후에 나는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를까. 확실한 건 읽기 전의 나로는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¹ 번역되기 이전의 작가가 작품을 쓴 원어

² '출발어'를 다른 나라 언어로 옮긴 번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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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니오스의 바위
아민 말루프 지음, 이원희 옮김 / 교양인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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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전설이 뒤섞인 문학

─아민 말루프의 『타니오스의 바위』를 읽고

1.

아민 말루프의 『타니오스의 바위』를 읽었다. 읽고 난 뒤에 알았지만 세계 3대 문학상(노벨문학상, 부커상, 공쿠르상) 중 하나인 공쿠르상을 수상한 작품이었고,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어느 정도 담겨 있는 이야기였다. 소설 바깥의 정보를 읽고 난 뒤에 알게 되는 것과 읽기 전에 미리 알게 되는 것에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는데 대개의 경우 나는 전자를 선호한다. 작품의 여운이 더 오랫동안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남는 게 있다는 뜻이다.

2.

내게는 오래전부터 붙들고 있는 질문들이 있다. 가령 이런 것들.

1. 문학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2. 문학이 가닿을 수 있는 곳은 얼마나 깊고, 또 좁을까?

3. 문학은 세상은 구원할 수 있을까?

4. 문학의 본질적인 탐구 영역은 언어일까? 인간일까?

5. 문학은 학문일까? 예술일까? (내게는 이 둘이 너무 다른데)

오래전부터 붙들고 있는 질문들의 목록.

무엇보다 이 책을 읽고 좋았던 점은 내 안의 오랫동안 머물러있던 질문들을 다시금 꺼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

또 좋았던 점.

"역사와 문학은 아주 오래된 공범"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점.

역사와 전설이 신화적인 상상력과 만났을 때 문학의 효용성이 배가된다는 점.

3.

레바논의 산악 지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은 소년 '타니오스'의 성장담을 그리고 있다. 여러 비극적인 서사와 환상적인 사건들을 조합해 산악 마을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일들을 그려낸다. (이 소설의 내러티브를 이렇게만 정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레바논에서 태어나 프랑스 작가로 살아가면서, 아랍인의 정체성으로 서구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경계를 허물어트리기 위한 글쓰기를 계속 이어오던 아민 말루프는 이 소설을 통해 레바논의 역사를 문학과 접목시킨다. 그는 "문학이 역사 속에서 일어난 폭력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의 글쓰기는 문학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내진 못했지만, 문학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걸 해냈다.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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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는 당근을 먹지 않는다 - 우리가 동물에 대해 알아야 할 진실
위고 클레망 지음, 박찬규 옮김 / 구름서재(다빈치기프트)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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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인식이 불러온 결과

─위고 클레망의 『토끼는 당근을 먹지 않는다』를 읽고

"인간만이 생각하는 동물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동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유일한 존재다."

─ 파스칼 피크

"오로지 인간만을 위해 만들어진

세상에서 인간이 설 자리는 없다."

─ 로맹 가리

언젠가 읽은 칼럼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한 적이 있다.

"편견이란 우리 몸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어둠 속에서만 살아가기 때문에 스스로 밝힌 소박한 내면의 촛불로는 결코 찾아낼 수 없다. 외부의 무엇과 부딪쳐 깨어질 때 비로소 번뜩이며 제 모습을 드러낸다."

성현아 문학평론가




이 문장을 읽고 나는 잠시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 보았다. 적어도 한 번쯤은 내 안의 깊이 뿌리내린 편견을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동안 '이해한다'거나 '공감한다'는 쉬운 말로 겉으로는 가식적인 내면을 드러내면서 내 안의 편견은 정작 살펴보지 못했음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다. 위고 클레망의 『토끼는 당근을 먹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문득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그래서,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여전히 나는 나를 모르고, 편견의 뿌리는 그대로 박혀 있는 것 같다.

위고 클레망의 『토끼는 당근을 먹지 않는다』에서도 잘못된 인간의 편견과 왜곡된 인식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이 책에서는 그 초점이 동물들에게 향해 있다. 시대적인 맥락과 역사적 팩트를 근거로 그동안의 인간이 동물에게 해한 것들을 상세하게 나열하고 있는 이 책은 '글로벌 동물 착취 시스템'과 '무자비한 인간의 자연 파괴'에 대해 말한다.


책에서도 말하고 있듯 어쩌면 "생물 다양성 붕괴와 기후 위기 앞에서 동물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행위의 심각성을 깨닫는 것은 윤리의 문제이자 우리 모두의 생존 문제"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칠레나 멕시코 같은 나라에서는 아보카도 하나를 얻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동물들의 터전을 망가트리면서 심지어는 서로에게 총을 겨누기까지 한다. 생명과 자연에게 몹쓸 짓을 하면서 동시에 서로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곳의 사람들이 괜히 아보카도를 '블러드 아보카도'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지구를 가장 망가트리고 있는 동물이 다름 아닌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내 안의 편견조차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나 또한 하나의 인간이라는 사실도 다시 한번 자각했다. 이제는 '생명'이라는 단어에 깃든 무해함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 말은 곧 그릇된 편견과 왜곡된 인식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다짐을 여기 남겨놓는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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