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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스
앤 카슨 지음, 윤경희 옮김 / 봄날의책 / 2022년 8월
평점 :

묘비명이 된 서첩의 물성
─앤 카슨의 『녹스』를 읽고
여기 ‘광기’라는 이름으로 해석되는 책이 있다. 사진이나 그림을 아무렇게나 이어 붙임으로써 정형적인 기존 책들의 매끈함을 위반한 책이 있다. 온몸의 감각을 깨워 책이라는 사물의 물성을 무한히 확장시키는 이 책은 캐나다 시인 앤 카슨에 의해 처음 고안되었다. 그녀는 죽은 오빠의 역사를 수집하면서 그로부터 파생된 통찰의 기록을 이어붙였다. 그렇게 서첩의 형태로 자신만의 비망록을 완성한 뒤에는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만든 묘비명”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 아픔이 묻어있는 이 책이 ‘광기’라는 이름으로 해석되는 걸까.
앤 카슨의 『녹스』는 모든 페이지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아코디언 북이다. 종이 낱장 하나하나를 풀칠해서 손으로 직접 이어 붙였기 때문에 전체를 펼치면 병풍처럼 보인다. 책의 왼쪽 면에는 고대 로마 시인인 카툴루스의 시를 변역하는 과정이 들어있고, 오른쪽 면에는 오빠를 떠올리며 작성한 앤 카슨의 상념이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는 방식 또한 다양하다. 일반적인 독서 방식대로 양쪽 면을 동시에 읽어도 되고, 오른쪽 면을 먼저 읽고 난 뒤에 왼쪽 면을 읽어도 된다. 중요한 것은 독자들이 저마다 다른 읽기 방식을 통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책의 물성을 감각한다는 사실이다. 192쪽 밖에 안 되는 책의 두께가 벽돌만 한 것도, 제작 기간 이 자그마치 2년이라는 것도, 혹자에 의해 ‘광기’라는 이름으로 해석되는 것도 충분히 납득이 되는 이유이다.

앤 카슨은 자신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애도를 표하면서도 고유성을 확보해 주체적인 글쓰기에 몰입했다. 언뜻 보면 짧은 메모를 여러 개 나열해 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곳곳에 남겨진 하얀 여백 속에는 애도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온몸의 감각을 깨워 죽은 누군가를 마주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빛으로 가득한 책의 여백이 더없이 소중할 것이다. 이렇듯 앤 카슨의 『녹스』는 책이라는 사물의 물성을 무한히 확장시킨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따져봐야 할 지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과연 『녹스』가 이러한 형태로 세상에 나와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른 매끄러운 책들과 구별된 형식으로 독자들을 만나야만 하는 당위적인 이유가 있었을까.
책의 만듦새를 전체적으로 톺아봐야만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책을 감싸고 있는 두꺼운 하드 상자가 눈에 들어온다. 무척 견고해 보인다. 책 속에는 찢긴 채로 혹은 훼손된 채로 새겨진 그림과 사진들은 불가해한 어떤 현상처럼 자리 잡고 있다. 무엇보다 예사롭지 않은 시각적 구성 방식은 다소 거칠어 보인다. 하지만 그래서 더 새롭게 느껴진다. 분명 눈으로만 글을 따라 읽는데 촉각이 곤두선다. 온갖 것들을 비정형적으로 모아둔 책의 물성이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독서 경험을 선사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굳이) 뽑아보자면 부록을 말할 수 있겠다. 부록을 통해 책에 대한 내용 설명을 보충하려고 한 것으로 예상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특성상 여러 감각을 활용해야만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점을 좀 더 고려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추천의 글’, ‘옮긴이의 글’과 더불어 앤 카슨이 직접 수집한 사진과 그림까지 한데 모아두었다면 이 책의 장점이 더 살아났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페이지가 엉겁이 되어 하나로 이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애초에 애도는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고, 그 기록을 한데 모아 놓는 것도 사람의 손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이처럼 여러 차례 수작업을 거쳐야만 하지 않았을까. 정형적인 기존 책들의 매끈함을 위반하는 행위가 앤 카슨에게는 필연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야 비로소 “온몸을 고막으로 하여 밤(nox)의 기척에 닿자”라는 앤 카슨의 문장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