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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니오스의 바위
아민 말루프 지음, 이원희 옮김 / 교양인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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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전설이 뒤섞인 문학

─아민 말루프의 『타니오스의 바위』를 읽고

1.

아민 말루프의 『타니오스의 바위』를 읽었다. 읽고 난 뒤에 알았지만 세계 3대 문학상(노벨문학상, 부커상, 공쿠르상) 중 하나인 공쿠르상을 수상한 작품이었고,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어느 정도 담겨 있는 이야기였다. 소설 바깥의 정보를 읽고 난 뒤에 알게 되는 것과 읽기 전에 미리 알게 되는 것에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는데 대개의 경우 나는 전자를 선호한다. 작품의 여운이 더 오랫동안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남는 게 있다는 뜻이다.

2.

내게는 오래전부터 붙들고 있는 질문들이 있다. 가령 이런 것들.

1. 문학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2. 문학이 가닿을 수 있는 곳은 얼마나 깊고, 또 좁을까?

3. 문학은 세상은 구원할 수 있을까?

4. 문학의 본질적인 탐구 영역은 언어일까? 인간일까?

5. 문학은 학문일까? 예술일까? (내게는 이 둘이 너무 다른데)

오래전부터 붙들고 있는 질문들의 목록.

무엇보다 이 책을 읽고 좋았던 점은 내 안의 오랫동안 머물러있던 질문들을 다시금 꺼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

또 좋았던 점.

"역사와 문학은 아주 오래된 공범"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점.

역사와 전설이 신화적인 상상력과 만났을 때 문학의 효용성이 배가된다는 점.

3.

레바논의 산악 지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은 소년 '타니오스'의 성장담을 그리고 있다. 여러 비극적인 서사와 환상적인 사건들을 조합해 산악 마을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일들을 그려낸다. (이 소설의 내러티브를 이렇게만 정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레바논에서 태어나 프랑스 작가로 살아가면서, 아랍인의 정체성으로 서구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경계를 허물어트리기 위한 글쓰기를 계속 이어오던 아민 말루프는 이 소설을 통해 레바논의 역사를 문학과 접목시킨다. 그는 "문학이 역사 속에서 일어난 폭력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의 글쓰기는 문학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내진 못했지만, 문학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걸 해냈다.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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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는 당근을 먹지 않는다 - 우리가 동물에 대해 알아야 할 진실
위고 클레망 지음, 박찬규 옮김 / 구름서재(다빈치기프트)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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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인식이 불러온 결과

─위고 클레망의 『토끼는 당근을 먹지 않는다』를 읽고

"인간만이 생각하는 동물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동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유일한 존재다."

─ 파스칼 피크

"오로지 인간만을 위해 만들어진

세상에서 인간이 설 자리는 없다."

─ 로맹 가리

언젠가 읽은 칼럼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한 적이 있다.

"편견이란 우리 몸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어둠 속에서만 살아가기 때문에 스스로 밝힌 소박한 내면의 촛불로는 결코 찾아낼 수 없다. 외부의 무엇과 부딪쳐 깨어질 때 비로소 번뜩이며 제 모습을 드러낸다."

성현아 문학평론가




이 문장을 읽고 나는 잠시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 보았다. 적어도 한 번쯤은 내 안의 깊이 뿌리내린 편견을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동안 '이해한다'거나 '공감한다'는 쉬운 말로 겉으로는 가식적인 내면을 드러내면서 내 안의 편견은 정작 살펴보지 못했음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다. 위고 클레망의 『토끼는 당근을 먹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문득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그래서,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여전히 나는 나를 모르고, 편견의 뿌리는 그대로 박혀 있는 것 같다.

위고 클레망의 『토끼는 당근을 먹지 않는다』에서도 잘못된 인간의 편견과 왜곡된 인식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이 책에서는 그 초점이 동물들에게 향해 있다. 시대적인 맥락과 역사적 팩트를 근거로 그동안의 인간이 동물에게 해한 것들을 상세하게 나열하고 있는 이 책은 '글로벌 동물 착취 시스템'과 '무자비한 인간의 자연 파괴'에 대해 말한다.


책에서도 말하고 있듯 어쩌면 "생물 다양성 붕괴와 기후 위기 앞에서 동물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행위의 심각성을 깨닫는 것은 윤리의 문제이자 우리 모두의 생존 문제"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칠레나 멕시코 같은 나라에서는 아보카도 하나를 얻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동물들의 터전을 망가트리면서 심지어는 서로에게 총을 겨누기까지 한다. 생명과 자연에게 몹쓸 짓을 하면서 동시에 서로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곳의 사람들이 괜히 아보카도를 '블러드 아보카도'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지구를 가장 망가트리고 있는 동물이 다름 아닌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내 안의 편견조차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나 또한 하나의 인간이라는 사실도 다시 한번 자각했다. 이제는 '생명'이라는 단어에 깃든 무해함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 말은 곧 그릇된 편견과 왜곡된 인식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다짐을 여기 남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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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103 소설Y
유이제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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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을 지나 희망으로

─유이제의 『터널 103』을 읽고

어둡고 캄캄한 터널을 지나 기어이 희망으로 나아가는 이야기가 있다. 피부가 없는 괴물과, 그런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인간을 적나라하게 전시함으로써 기어코 희망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어떤 상징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유이제의 소설 『터널 103』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소설 속 배경이 되는 '검은과부거미섬'의 사람들은 피부가 없는 괴물 '무푸귀'를 피해 해저 터널 안으로 몸을 숨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터널 안에 바닷물이 차오르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패닉 상태에 빠진다. 밖으로 탈출해 보려 노력하지만 한쪽은 차폐문으로 막혀있고 다른 한쪽은 괴물들이 득실거려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된다. 그런데 그때, 한 소녀가 자진해서 터널 밖으로 나가기로 결심한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어둡고 캄캄한 세상 속에서도 희망의 끊을 놓지 않고 함께 살길을 도모하려고. 소녀는 안과 밖의 경계가 삶과 죽음의 경계이기도 한 디스토피아 세계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특수한 상황에서 펼쳐지는 보편적인 이야기는 대개 사람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유이제의 『터널 103』이 그러하다.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사건 앞에서 인간의 마음은 과연 한결같을 수 있을까. 견고해 보이기만 하던 터널도 언젠가는 무너진다. 유이제는 『터널 103』을 통해 시시각각 변모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주며 괴물이 있는 바깥 세계와 괴물은 없지만 누가 괴물이고 누가 괴물이 아닌지 알 수 없는 안쪽 세계의 경계를 허물어트린다. 희망을 놓는다는 것은 삶을 포기한다는 선언과도 같다. 그러니 한 번쯤은 '터널을 지나 희망으로' 나아가는 소녀의 여정을 따라가보자. 볕들 날 없는 세상일지라도 어디선가 윤슬 한 조각이 반짝이고 있을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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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기완을 만났다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조해진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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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언어로 기억되는 이야기

-조해진의 『로기완을 만났다』를 읽고

1.

소설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책 뒤편에 실려있는 '작가의 말'을 살펴보는 것이다. 소설을 쓸 때에 작가의 마음과 쓰고 난 이후에 작가의 마음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혹은 어떻게 유지되어 왔는지 가늠해 보는 일이 내게는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만나기 전에 몸과 마음을 예열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조해진의 『로기완을 만났다』는 넷플릭스 영화 개봉에 맞춰 새로 개정되어 나온 리마스터판이었기에 두 개의 '작가의 말'이 수록되어 있었다. 2011년 4월에 작성된 '작가의 말'과 2024년 초입에 작성된 '새로 쓴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나는 어떤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 사이에 위로와 공감, 연대를 향한 작가의 고민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작가는 '새로 쓴 작가의 말'에서 "『로기완을 만났다』를 쓰면서 공감을 믿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이상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몸이 서서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이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예열 단계에서 이미 사랑에 빠져버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2.

작가인 '나'의 시점에서 탈북인 로기완의 삶을 추적해가는 이 소설은 삶의 이유를 찾기 위한 인물들의 여정을 담고 있다. 연민에서 시작된, 선의의 마음으로 행했던 일이 타인을 곤경에 빠트리게 되자 '나'는 극심한 죄책감에 빠진다. 그러다 우연히 어느 한 잡지에서 탈북자 로기완의 이야기를 접하고, 얼마 뒤에 그의 일기를 손에 넣게 된다. 어머니의 시신을 팔아 번 돈으로 벨기에로 향한 '로기완'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나'는 외면해왔던 내면의 죄책감과 다시 마주하며 근본적인 삶의 이유를 되짚어본다.

소설 속 '나'가 비관적인 전망으로 온통 둘러싸여 있는 '로기완'의 시간을 되짚어가는 동안 현실의 내가 발견한 것은 치유의 가능성과 증여되는 연대의 가치, 공감으로 이어지는 위로의 언어였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무엇보다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해가는 '나(이니셜 K)'와 '로기완(이니셜 L)'의 삶이 실패를 감내하면서까지 독자에게 증여될 순간을 끝끝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그게 참 좋았다.

3.

소설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오늘 나는 그에게, 이니셜 K에 대해 해줄 이야기가 아주 많다."

4.

조해진을 읽을 때마다 나는 여러 번 마음이 무너지곤 하는데, 『로기완을 만났다』에서는 아래 문장들이 그러했다.


"타인을 관조하는 차원에서 아파하는 차원으로, 아파하는 차원에서 공감하는 차원으로 넘어갈 때 연민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자신의 감정이나 신념 혹은 인생 자체를 부정하는 고통을 겪기도 한다."

(•••)

"내가 믿어왔던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순간, 나 역시 불우한 땅을 딛고 있는 가엾은 존재가 되는 거라고 나는 생각하게 됐다." (p.64)

"감정적 차원의 진실이란 한순간에 급조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추억을 헌납하며 조금씩 만들어가는 공유된 약속일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이 있어야 하고, 그 시간이 조심스럽게 준비해 놓은 구체적인 사건들도 있어야 한다. 사랑이란 언어가 그 모든 것을 보듬어준다고는 믿지도 않았고, 이제부터 연인이 되자는 식은 선언은 유치하게 느껴졌다. 오랜 시간을 관통한 후에 손안에 들어온 서로에 대한 신뢰감, 이 사람이라는 안도감, 시시콜콜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공유되는 일과 일상, 그런 것들만이라도 나는 충분했다." (p.72~73)

"가장 아픈 진실은 그 모든 것이 다만 우리의 선택이었다는 것, 그것이다." (p.74)

"희망은 하나여서 절박했고 절망은 그 후를 약속해주지 않아서 두려웠다." (p.108)

"어떤 사람에겐 위로도 뜻대로 해줄 수 없다. 그 위로의 순간에 묵묵히 소비되는 자신의 값싼 동정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무엇으로도 치환되지 못한 감정은 이렇게 때때로 단 한번도 조우한 적 없는 타인의 삶에서 재현되기도 한다." (p.112)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죽은 자들의 이름만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환멸과 눈물도 희생자의 수치, 그 체온 없는 수치로 수렴되어 추모의 비문(碑文)도 없이 매장되었던 것이다." (p.122)

"나의 한계에 대해서 적어도 나만은 침묵할 자격이 있다는 믿음은 그러나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p.138)

"그러나 내가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타인의 고통이란 실체를 모르기에 짐작만 할 수 있는, 늘 결핍된 대상이다." (p.151)

"우리가 사랑의 고백에 인색했던 것은 더없는 행복, 완벽한 충만, 한순간의 천국 대신 다만 끊임없이 우리 사이의 불충분과 관계의 결여를 원해서였던 것뿐이라는, 그리고 바로 그것이 우리 사랑의 정체성이라는 그런 말을 간절하게 듣고 싶다." (p.205)

"타인과의 만남이 의미가 있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삶 속으로 개입되는 순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 (p.209)

"때로는 미안한 마음만으로도 한 생애는 잘 마무리됩니다." (p.222)

"소설은 독자에게 닿기 전에 작가를 꿈꾸게 하고 살게 합니다" (새로 쓴 작가의 말中)

"믿고 싶다. 결국엔 위로의 언어로 기억되기 위해 쓰여지는 이야기도 있다는 것을." (작가의 말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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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다른 열두 세계 포션 6
이산화 지음 / 읻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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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다른 세계들의 변형과 확장

─이산화의 『전혀 다른 열두 세계』를 읽고

팬데믹을 지나 콘텐츠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세계관'이라는 말이 새롭게 부상했다. 이제는 신선하고 매력적인 세계관 하나가 여러 갈래로 뻗어 다양한 형태로 대중들과 접촉하는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출판 시장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장르적인 특색이 강한 SF/판타지 소설 분야에 있어서 '세계관'은 작품의 뼈대가 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므로 이산화의 『전혀 다른 열두 세계』를 논하는 데에도 빼놓을 수 없을 듯하다.

요즘에는 '세계관'이라는 말이 대개 작품을 이루는 시공간적 배경을 뜻하는 용어로 쓰이는데, '세계관'에서 '관'이 볼 관(觀) 자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나는 그 말을 '작품 속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니까 작가에 의해 창조된 작품 속 세계가 있으면 그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 혹은 독자의 시선이 곧 '세계관'이라는 말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하나의 세계관에서 보다 다양한 해석이 파생될 수 있기에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으며 지금도 작가들이 만들어낸 작품 속 세계를 나만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려 한다.




이산화의 초단편소설집 『전혀 다른 열두 세계』에서는 작가의 세계'관'(觀)이 고스란히 엿보인다. '전혀 다른 열두 세계'를 그리고 있는 열두 편의 짧은 이야기는 저마다 고유한 (시공간적 배경으로서의)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일까. 작품을 따라 읽다 보면 문득 '또 어떤 다른 세계가 가능할까?'라는 궁금증이 생겨난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즈음 나는 ('작가의 말'이라는 탈을 쓰고) 각각의 작품을 해설하고 있는 「열세 번째」를 읽고 있었는데, 얼마 못 가서 교묘하게 설치해둔 작가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름 아닌 마지막 이야기에서 다음 세계를 상상하는 일이 나의(독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었으니까.




이제는 이 책을 통해 작품을 바라보는 다채로운 세계'관'(觀)이 전혀 다른 세계들의 변형과 확장으로 이어질 차례이다. 이산화가 그려낸 '전혀 다른 열두 세계'의 이야기가 그랬던 것처럼.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이야기가 소설 속 세계에서만큼은 무한히 펼쳐지듯이, 우리의 시선 또한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가기를. 그리하여 또 다른 세계의 문을 마주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열어젖힐 수 있는 용기가 지금─여기에, 내게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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