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
은유 지음, 이지선 북디자인 / 읻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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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어¹와 도착어² 사이에서

─은유의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를 읽고

1.

은유 작가와 일곱 명의 한국 문학 번역가들이 나눈 인터뷰집이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라는 제목으로 '읻다'에서 출간되었다. 이 제목은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시구에서 따온 것인데, "순수문학 대 참여문학이라는 낡은 이분법과 무관하다"는 점을 밝혀둔다.

2.

인터뷰에 참여한 번역가들은 '출발어와 도착어 사이에서'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의심을 펼치는 중이었다. 한국 시를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하기 위해 계속해서 작품과 작가,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내던졌다. 보다 적확한 문장을 찾기 위해 애쓰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번역'이라는 것이 어쩌면 일종의 새로운 창작 과정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들은 하나의 작품 안에 또 다른 아이덴티티를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도착어'에 다다랐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그들의 작업이 원어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함을 확장시키는 일임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언어의 경계를 허물어트리는 일이 생각보다 많은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도.

3.

지금─여기의 한국 시 번역 현장을 가장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이 책에 들어있다.

4.

시 번역은 아름다운 일이다.

5.

인도계 미국인 한국문학 번역가 '알차나'의 얘기를 듣고 난 뒤에 은유 작가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긴다.

"자기 인식은 시작이 어렵지, 일단 시작되면 파도처럼 밀려온다. 막을 수도 없고 거스를 수도 없다.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p.170)

이 문장을 읽으며 '자기 인식'의 과정이 내가 시를 읽는 마음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 편의 시를 읽기 전과 후에 나는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를까. 확실한 건 읽기 전의 나로는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¹ 번역되기 이전의 작가가 작품을 쓴 원어

² '출발어'를 다른 나라 언어로 옮긴 번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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