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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평점 :
몇 년 전에 글로벌 IT사에서는, 그동안
쌓아놓고 있는 데이터에 실시간으로 모이는 데이터를 합쳐서(소위 빅데이터) 분석을 하게 되면, 기존의 가설(또는
전제)-검증과 같은 두세 단계의 분석 방법론은 필요없다고 말했다. 엄청난
속도와 용량의 분석 툴이 있으면, 힘들여서 전제나 가설 따위를 만드는데 시간을 들일 필요없이 분석-결과 도출-예측으로 재빠르고도 정확하게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철학이 과거처럼 메타학문으로서 학문 전체를 끌어안고 고민하고, 메타
차원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고, 학문 분과의 하나로 전락했다는 말이 나온지 꽤 오래다. 더욱이 (꽤 오래전부터 들리는) 인문학의
위기의 한가운데 철학이 놓여있다. 현실과 동떨어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현학스러운 말만 늘어놓지 않냐는 비난이 무성하다. 그러다보니, 철학을 공부하려는 똑똑한 학생을 한국에서 찾기 힘들다는 말이 나온지 오래다.
앨런 소칼이라는 과학자가 ‘지적 사기’라는 책을 통해서 유럽 철학의 추상성, 근거없음에 대한 강한 비판이
나온게 지난 2000년이다.
몇 개의 단편을 꺼낸 건, 자본주의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는지, 반성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으로서 철학을 생각할 때 그에 대한 반박
논리 또는 사례를 늘어놓아 본 것이다. 사실 철학이라는 학문이 메타 학문으로 자리잡고, 여러 학문 분야에서 쌓여온 다양한 연구 결과 그리고 우리의 삶이 쌓아온 지층들에 대해 분석하고, 그 뜻이 무엇인지 찾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에 대한 길잡이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폭주하는 기관차가 되어 버린 지금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포함해서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병철씨의 에로스의 종말은, 철학이라는
방법론을 에로스라는 소재로 풀어나간다.
자본주의 하 성과지상주의, 계량화,
부단히 동일화되어 가는 흐름 속에서 타자를 향한 에로스는 점점 흐릿해져만 가고 있다. 모든
것을 프로젝트화하여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고(타자의 침식 과정), 그
결과를 자신의 성과로 만드는 현대 사회에서 타자라는 외재성, 아토포스는 설 땅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자아의 나르시시스트화로 명확한 자신의 경계를 짓지 못하여 타자와 경계마저 흐릿한, 그래서 우울증으로 빠져버린 현대는 그야말로 사랑의 위기다.
‘할 수 있을 수 없음’이라는
조동사에 의해 ‘넌 해야 한다’는 규율사회보다 더 강제당하고, 유일한 미덕인 소비가 더욱 강해지는 헤테로피아화되어 가는 현재는, 자본주의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신자본주의 속에서 그 강제구조는 교묘히 숨겨지고 개인이 누리는 가상의 자유가, 진정한
자유로 포장되어 나타난다. 그 안에서 사회 생활을, 스스로가
기획하는 프로젝트로 이해하고 좌절과 실패 그리고 그로 인한 채무까지 개인이 스스로의 책임으로 떠안는 사회가 바로 현재다. 이로 인해 그동안 있었던 타자와의 성공스러운 관계는 실패한다. 심지어
사랑마저 성애(섹슈얼리티)로 변질, 타자를 성적 대상으로 한정시켜 그간의 근원거리가 사라지고, 이질성이
사라져버린 타자를 그저 소비할 뿐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오늘날 사랑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토포스에 기반한 타자와 관계맺기가 매우 중요하다.
좋은 삶을 목표로 하는 이념을 떨쳐내고 더욱 노골적이고 파렴치해진 자본주의하에서 대중은 노예이자 주인이 되어버린, 주인과 노예가 최초로 통일을 이룬 역사 단계를 살고 있다. 이처럼
삶의 모든 역동성을 앗아간 생존사회에서 그 뿌리가 행복을 추구하는 사랑(에로스)은 우리가 강력히 추구해야 할 바이다. 에로스는 정치 저항의 에너지원이자, Anti-포르노그래피로서 습관화/동일화되어 버린 자본주의 질서에
균열을 내고 구멍을 뚫는다. 다시 말해 에로스는 언어와 현실의 시적 혁명을 위한 매체 역할을 할 것이다.
에로스의 힘을 동반하지 못한 로고스는 무력하고, 에로스는 사유를 이끌고
유학하여 전인미답의 지대를, 아토포스의 타자를 거쳐가게 한다. 그리고
철학은 에로스를 로고스로 번역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 기존의 자본주의 체제를 흔들고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토양을 마련할 수 있고,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사유의 공허함을 밝혀낼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계를 완전히 다르게, 완전히 다른 빛 속에서 드러나게
하는 근본의 결단을 하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