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시피 미시시피
톰 프랭클린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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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랜 세월 감옥형을 살다 뒤늦게 무죄로 판명돼 방면되는 사람의 기분은 과연 어떨까. 

분명 자신을 포함한 몇 명의 사람은 그 혐의없음을 알면서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거나 상황을 외면함으로써 억울한 이로 하여금 지난한 무고의 세월을 보내게 한 것은 어느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곳 미국 남부의 미시시피 주. 그 곳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들이 백인아이를 놀리고 괴롭히는, 흔히 알고 있는 내 상식을 벗어나는 거꾸로 인종차별이 대수롭잖게 행해지고 미국의 빈곤율 1위라는 불명예와 지독한 가난을 짊어진 지역이다. 두 주인공 래리와 사일러스는 어린 시절 사회와 어른들에 의해 심어진 금기를 깨고 그들만의 우정을 숲속에서 몰래 쌓지만 마음속으론 가끔 서로에게 없는 것을 부러워하고 질투한다. 둘의 관계는 래리가 사일러스에게 던진 한마디 말과 그와 데이트 후 실종된 신디 워커의 사건 이후 한없이 멀어지게 된다.



래리는 흑인들이 느끼는 분노는 백인들이 자기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당신들이 먼저 잘못했잖아' 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백인이 흑인과 친구가 되고 싶어하고 선물을 주고 심지어 거처까지 마련해준다면, 흑인들은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 p.139



실종된 신디와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다는 정황증거와, 진술이 헛점투성이란 이유로 사실상 납치, 강간, 살해용의자로 치부되어 25년간 샤봇 마을 사람들과 그 지역 카운티 전체에서 소문난 '괴물'취급을 받으며 살아온 래리. 손님하나 없는 무늬만 정비소를 운영중인 그에게 친구라곤 매일 아침 모이를 주는 닭들과 가끔씩 자신을 염탐하는 수사관 프렌치, 그리고 책장 속의수많은 책들뿐이다. 그는 어릴 때 자신의 엄마이나 로트가 그랬던 것처럼 매일 기도한다. 진정한 친구를 보내주시고 정비소에 손님이 오기를, 그리고 내일도 요양원에 있는 엄마의 정신이 맑아 있기를... 


25년이 지난 지금 그의 친구 사일러스가 경찰이 되어 돌아온 고향 샤봇에서 대지주의 딸 티나 러더포드양이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지난날 신디 워커의 실종사건이 다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면서 자연스레 의심의 눈총은 래리를 향하게 된다. 한편, 누군가에게 총상을 당해 중환자실에 있는 래리는 회복 후 즉시 경찰의 추궁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용의자 신분의 래리와 그의 친구인 순경 사일러스의 재회는 불가피하게 이루어진다.


그 과정에서 사일러스는 래리를 불편해하고 어색해하는 반면 묘한 죄책감을 느끼고 요양원에 있는 래리의 어머니에게 지극정성을 다한다. 그에게 외투를 적선하듯 던져주던 그 옛날 이나의 모습은 이제 죽음만을 기다리는 힘없는 치매환자의 모습으로 그에게 용서를 구하는 듯 하다. 그리고 경찰과의 심문 중 사일러스의 입을 통해 밝혀진 25년 전 '그 날'의 또다른 신디워커의 행적은 모두를 아연실색하게 했고 그 동안 래리를 사건의 범인으로 낙인찍었던 사회를 향한 분노와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그 책임여부는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두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과 사건묘사가 치밀하게 구성된 이 소설은 순수문학과 스릴러의 중간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범인이 누구인가를 쫓아가는 시선에만 치중하지 않고 인종차별과 가족, 십대 소년들의 우정, 지역사회의 안일함과 편견, 그리고 범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등 여러 문제를 다각도로 비판하고 분석하는 진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작가인 톰 프랭클린은 책의 말미에서 역시 정비공의 아들이었던 자신이 좋아하는 스티븐 킹 작가류의 소설과 함께 단편적인 경험과 학창시절의 기억, 에피소드등이 래리 오트라는 백인 주인공의 성격과 주변 환경에 갈수록 동일시되어갔다고 고백하고 있다.


과연 내가 사일러스라면 뒤늦게라도 오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놨을지, 혹은 래리였다면 티나 실종사건에 대해 얼마만큼의 책임감을 느꼈을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소설의 리뷰를 쓰는 것이 익숙치 않은 나로썬 장르소설의 성격까지 띠고 있는 이 책의 이른 바 지뢰(스포)를 건드리지 않고 최대한 작품의 완성도와 깊이를 한정된 공간안에서 전달하기엔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책을 읽고자 하는 분들은 최대한 속도를 붙여 단숨에 읽어 나가면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밀려드는 여운과 마무리에 한동안 잠 못 이루게 될 것이다. 어쩌면 래리에게 깊은 감정이입이 되어 배갯잇을 흠뻑 적시게 될지도.



앤지는 식탁에 백합 꽃다발을 올려놓았고, 과일이 가득한 바구니와 계피향이 나는 초를 올려놓았다. 래리는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냉장고에 먹을 것도 가득 채워놓았다. 맥주 두캔은 치우고, 대신 말라의 핫도그를 쟁여놓았다. 래리는 아직 모르겠지만, 사일러스가 위성TV도 설치했다. 래리는 아직 모르겠지만, 사일러스는 한 팔로 트랙터 운전법을 독학한 후 신선한 풀이 가득한 풀밭으로 닭들을 데려갔고, 닭들은 스무 개가 넘는 계란을 낳아놓았다. - p. 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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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 고독한 사람들의 사회학
노명우 지음 / 사월의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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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사는 공인들이 등장하는 tv 예능 <나 혼자 산다>에서 털털해 보이던 남자연예인이 의외로 먼지 하나 없는 깔끔한 집안과 가사일에 도가 튼 생활을 지켜보면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동시에 혼자 사는 삶도 썩 나쁘지 않아 보인다. 물론 출연자 대부분의 냉장고엔 약속이나 한 듯 인스턴트 식품과 날짜 지난 음식들이 가득한게 보통이지만. 


1인 가구의 증가는 이타주의의 몰락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나 익숙해져 있던 가정중심성이 약화되는 징후에 불과하다. - p.53


1인 가구에 대한 부정적 편견과 환상이 공존하는 요즘, 예의 프로그램은 그 편견을 깨부수기도 하고 아직은 드문 싱글 라이프의, 일반화된 타자로서 모델이 되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교육 과정에서 '사회화'라고 하는 군집생활에 필요한 개념과 제도를 당연시하고 습득하게 한다. 싱글족이 반사회적인 암적존재로 여겨지는 부분엔 아마도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는 1인가구의 비율에도 불구하고 고스란히 남아있는 전통적 관습과 인식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과거 유명한 철학자들이 고독을 즐기며 단독인으로서 예술적 낭만을 고취시켰던 것과 달리 지금은 혼자서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인격결함이나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개인주의자로 치부되기 쉬운 현실이다.


왜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느냐는 질문을 받는 노처녀, 노총각들에게 혼자인 삶은 선택이 아닌 어쩌다 보니 갖추어진 삶의 방식일 뿐이다. 똑같은 예로 사별과 이혼, 별거, 가족의 불화등으로 뿔뿔히 흩어진 사람들 역시 본인이 원했다기보단 처한 현실과 상황이 이끈 삶의 형태였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족 내 관계밀도 과잉에 치인 삽사십대 중년들이 때로 자신만의 치타델레를 꿈꾸는 것은 생략된 혼자남녀들의 고충을 차마 알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젊음, 경제적 능력, 독립의지등 혼자 사는 삶의 필요충분조건은 말처럼 쉽지 않다. 자유로운 삶을 꿈꾸면서도 무거운 역할가면을 쉬이 벗어던지지 못하는 건 안정된 지금의 삶이 혼자인 삶의 불안정함보다 그나마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기쁨, 슬픔도 나눌 수 없고 역할분업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 1인 가구의 일상은 4인 식탁에 앉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보다 고독하고 청승맞은 경우가 많다. 생활비가 1/n로 드는 것도 아니고 매일 원맨쇼를 자처해야 하는 궁색하고 바쁜 하루는 정작 그 생활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부러움과 판타지의 대상으로 포장되곤 한다. 집단주의에 매몰되었던 과거에 비해 개인의 감정과 선택이 중요시되는 현 사회풍조에 맞춰 낭만적 만남에 대한 기대는 점차 커지고 연애의 빈도는 잦아지나 불확실한 남녀관계에 의해 결혼 자체는 망설이게 되고 그 결과로 미혼과 비혼이 급증하는 현상. 바로 저자가 말하는 1인 가구 젊은이들이 늘게 된 배경이다.


언젠가부터 골드미스, 차도남이란 말이 생겨나고 혼자인 삶을 영위하는 것은 그에 걸맞은 부와 시크함을 두루 겸비한 능력자만이 누릴 수 있는 극소수의 사치가 되버렸다. 스웨덴을 비롯한 서구 여러 나라에서는 가족을 떠나 독립하는 시기가 한국보다 유난히 빠르고 1인 가구의 비율 역시 압도적으로 높은 데 반해 그에 따른 사회적 병폐인 고독사나 무연사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 걸 볼 수 있다. 이유인 즉슨, '기본소득'과 '주거공동체'라는 자립을 뒷받침하는 튼튼한 복지제도와 함께 어미새가 새끼를 둥지에서 떠밀듯이 자연스레 독립을 받아들이는 사회문화가 깃들어 있기 때문인데, 역시 멀지 않은 비슷한 구조의 사회를 앞두고 있는 한국에서 참조해야 할 장점이 아닌가 싶다.


홀로서기를 꾀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세계로부터 고립시키려는 자폐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갖고 있는 편견을 끊임없이 주입하는 과잉화된 '일반화된 타자'와 거리를 두는 능력의 획득을 의미한다. -p.190


집단 속에 오랜 세월 머물러 있던 사람이 홀로서기를 한다는 건 한국과 같은 경우 흔치 않은 모델 없이 부딪히는 맨땅에 헤딩과도 같다. 노후에 대한 불안, 건강악화, 경제적 압박은 사회가 단독인들을 바라보는 '이상한' 시선과 함께 싱글족들의 불안요소로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 혼자만의 탑에서의 즐거운 고독이 절실한 사람들은 기꺼이 모든 것들을 감수하고 집단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한다. 그것은 존재의 또 다른 형태로써 결핍이 아닌 '자기밀도'의 최대화를 꿈꾸는 단독인의 몸부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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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개정신판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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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을 알 게 된건 아주 오래 전인 듯 하다. 아마 그 땐 지금처럼 책의 내용을 깊이 공감할 수 없는 나이여서 읽어봤자 '이 사람들이 대체 무슨 말들을 하는 거야?'하고 던져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후로 20년이 흐른 지금, 이 소설의 문장 하나 하나와 에피소드,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이 벌이는 갈등은 나의 미혼여부를 떠나 다름 아닌 대한 민국의 여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개 끄덕여지는 현실이다.



우리 사회가 이혼녀를 보는 시각은 아직 부정적이다. 그리고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워킹맘의 고충 역시 세상 사람들의 이해를 받기 시작한 것 역시 최근의 일이다. 남아선호사상이 유별한 한국에서 아들을 낳기 위해 줄줄이 딸자매 끝에 아들을 둔 집안은 지금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주인공 혜완 역시 자신을 낳고 집안의 온갖 구박을 받아온 친정엄마를 보고 자란 인물이다. 보수적인 이런 가정에서 그녀가 아들인 헌이를 잃고 이혼을 하게 되면서 죄인같은 딸을 둔 엄마와 혜완은 만날 때마다 서로에게 격한 동질감과 애틋함을 느낀다. 한편, 자존심이 세고 무모한 혜완의 눈에 친구 영선은 한없이 소극적이고 착할 뿐이지만 그녀 또한 남모를 상처에 매일 눈물짓는다. 연애시절 유학을 함께 했던 남편에게 모든 걸 올인하고 유명감독으로 탄탄대로를 걷게 된 그의 뒷바라지를 하며 느끼는 왠지 모를 억울함과 공허함은 이윽고 심한 알코올중독과 우울증으로 영선을 타락의 나락으로 이끈다.



그 남자의 학비가 없으면 나는 어느덧 그 남자의 학비가 되고, 그가 배가 고프면 나는 그 남자의 밥상이 되고, 그 남자의 커피랑 재떨이가 되고, 아이들의 젖이 되고 빨래가 되고.... 그 남자가 입을 여는 동안 나는 그런 것들이 되어 있었어. - p.124  


나는 칼을 들었지. (....) 그를 알코올 중독에 우울증이 있는 미친 부인의 희생자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 죽을 사람은 나였던 거야.... p.200 - 201


남편의 외도로 인해 마른꽃처럼 시들어가지만 모른척 명랑함으로 그 고민을 가리고 있는 경혜 역시  두 친구와 다를 게 없는 여자로 그녈 보면 문득 박강성의 노래 <마른꽃>이 생각난다. 셋은 한 남자와 연애를 했던 삼각관계 시절을 회상하거나 지금의 남편들 흉을 보며 서로 공감하고 연민하며 서로를 위로하지만 때론 경멸하고 질투하기도 한다. 이렇게 세 여자들의 입을 통해 일방적으로 전해지는 남자들의 행동과 말은 얼핏 독단적인 시각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장면들은 대개 tv드라마나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로써 친숙한 것들이 많다. 일부일처제 논쟁, 성차별, 불륜, 외도, 성희롱, 결혼의 실체 등등 끊이지 않고 거론되어 왔던 화두이며 현재진행중인 민감한 주제들.



"(...) 남자는 설거지 한 번 하고 몇 년 동안 말하죠.... 난 언제나 집안일을 돕고 있다고.... 하지만 또 여자가 어느 날 동창회에 갔다가 늦으면 남자들은 이렇게 말해요. 내 아내는 매일 나가 돌아다녀...." -p. 215


매맞는 여자, 홀대받는 여자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혜완,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왔던 시간들을 결국엔 참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영선, 아무일 없다는 듯 묵묵히 살아가는 경혜. 그들 모두 우리 여성들 각각의 자화상이 아닐까. 남자들은 '니가 원한 거고 선택도 니가 한거야' 라는 이유로 변명을 하면서 사실 세상이 여자에게 희생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녀들 스스로 그것을 자처한 결과임을 고스란히 확인사살시킨다. 하지만 여자들이란 사실 남자들의 행동에 분개하면서도 한편으론 챙겨주고픈 이상한 동물이며 조그만 것에도 상처받거나 감동받는 존재임을 그들은 모른다. 이런 이유로 남녀간의 엇갈린 주장과 갈등은 세대를 초월해 세월이 흘러도 그 종지부를 찍을 길이 요원한 영원한 숙제일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남편이라는 이름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아내라는 이름의 자리, 혹은 어머니라는 이름의 자리, 며느리라는 이름의 자리, 두려웠던 것은 선우가 아니라 그렇게 여러 이름으로 점수 매겨진 그 자리들이었다. - p.281


나는 차라리 아무도 모르게 남편에게만 멸시를 받는 편을 택했던 거야. 니가 남편에게 받은 모욕을 거부하고 초라함을 택했듯이. 그래 나도 택했어. 온 세상에, 친한 친구들에게까지 초라함을 들키고 싶지 않았어. - p. 316



누구누구 엄마로 불려지는 여자들은 자신의 이름과 존재를 당당히 얻고 싶어한다. 결혼을 하고 자연스레 집안으로 숨어들게 되던 과거의 여자들은 조금씩 아니, 이제 많이 새상 밖으로 나온 듯 하지만 결혼 후 품절남, 품절녀를 마냥 축하만 해줄 수 없는 묘한 현실은, 아직도 유효한 이 소설의 이야기가 모두에게 공감을 얻고 있는 이유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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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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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든 소설을 읽을 때 장대한 서사와 긴장감 넘치는 스릴, 그리고 짜릿한 반전을 기대한다.

나 역시 이 작품을 읽을 때 그런 일말의 희망을 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소설의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는 이른 바 평범한 삶을 살다 간 대부분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예술에 속하는 대부분의 작품과 그것을 빚어내는 천재들의 인생 또한 우리가 보기에 특별하고 찬란한 그 무엇으로 여겨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데도 말이다.


스토너는 소박했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권유로 입학하게 된 미주리대학에서 한 강의를 통해 문학의 참맛을 알게 되어 귀향하기로 했던 처음의 결정을 돌려 문학도로써의 길을 걷게 된다. 그 후 발발한 전쟁에 자원입대하여 몸을 불사르는 학생과 교수들 가운데서도 홀로 학업에 매진하며 그 와중에 동료 매스터스와 아처슬론 교수의 죽음, 그리고 부모의 연이은 사망은 그를 몹시 깊은 상실감과 무력감에 빠지게 만든다. 결혼 전 아름다웠던 아내 이디스는 그레이스의 출산과 함께 더욱 히스테릭하게 변해가고 그것은 딸에 대한 집착과 통제로 이어진다. 둘은 같은 공간을 영위할 뿐 남보다도 못한 서로에게 무관심한 일상을 그저 묵묵히 살아간다.


타인의 입장에선 문학교수로서 남부럽지 않은 그의 삶을, 독자의 눈으로 보면 이처럼 지루하고 평범한 사람이 또 있을까 생각하게 되는 건 무슨 이유일까. 그는 실패한 결혼, 그리고 마치 자신의 삶을 무덤덤히 관조하듯 살아가는 방식에 곧 익숙해진다. 중요한 장례식과 파티석상에서도, 내면에서 울리는 자신의 음성과 표정을 더듬어 가듯 느끼는 무감각함과 초연함을 잃지 않는다. 이미 삶의 모든 부분에서 최대 경험치를 초월한 것처럼 어떤 상황이 닥쳐도 감정의 기복이 없는 냉혈한으로도 보인다 . 찰스 워커를 두고 벌이는 동료 로맥스와의 잦은 트러블에서 자신의 뜻과 의지를 굽히지 않는 면을 보며 자기주관을 고수하고, 또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나 사태에 대해 기꺼이 감수하는 자세는 지극히 계산적이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 시대 인간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

캐서린을 만난 건 외도이기 보다 차라리 감정의 트임이라고 해야 마땅한 듯 보였다. 그녀를 만나면서 느끼게 된 묘한 설레임과 흥분은 이전의 밋밋한 일상을 이어왔던 그에게 활력과 기대를 불어넣어 주었고 둘의 이별 후 오랜 시간이 지나고 접하게 된 그녀의 저서를 보며 묘한 향수와 그리움, 그리고 또 한번의 상실감에 젖게 된다.


소설은 스토너의 특별할 것 없는 삶을 묘사하고 기복없는 그의 감정과 상황을 설명함에 지나지 않지만 그에 반해 무척이나 아름다운 필치를 자랑한다. 또한 과연 성공의 삶의 정석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희망하는 인생의 반전이란 지극히 소수의 사람의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수동적이고 대충 살아간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지금,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건 극적인 성공을 이뤄낸 사람들에 대한 무턱댄 선망과 부러움은 나머지인 우리의 삶을 더욱 형편없고 보잘것 없는 것이 되게 한다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 단 한페이지로 요약이 가능한 스토너의 평범한 삶은 세상 모든 이들의 인생의 어디쯤 자리하고 있을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출간 후 50년이 지나고 비로소 빛을 발한 이 작품의 저력이 '스토너'라는 결코 우리와 멀리 있지 않은 친숙한 인물에 공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특별한 삶만을 조명해 온 그 동안의 소설들보다 더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이 소설을 세월이 흐르고 몇 십년뒤에 읽는다면, 혹은 지금 인생의 뒤안길에 접어든 이가 읽게 된다면 내용이 더욱 더 의미있게 다가올 듯 하다. 아직은 완전히 인생을 알지 못하는 내가 이해하기엔 소설은 너무나도 깊고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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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대 밑바닥 노동 - 야/너로 불리는 이들의 수상한 노동 세계 유스리포트 YOUTH REPORT 2
이수정 외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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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미성년자나 학생들이 알바를 한다고 하면 '용돈벌이'란 개념이 일반에게 심어져 있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청소년이 굳이 일을 왜 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미 십대노동인권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것이다. 가끔 식구들과 외식을 하러 갔다가 혹은 편의점에 물건을 사러 들렀다 알바생이 점주에게 된통 혼나는 광경을 심심찮게 보기도 한다. 반말과 욕설로 칠갑된 듣기도 민망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어른들을 보며 나는 안됐다는 생각과 함께 왠지 모를 부끄러운 수치심이 확 밀려오는 걸 느끼곤 했다.


이 책에서는 10대 노동자들의 다양한 일터에서의 삶과 고충을 인터뷰하고 그들이 노동전선에 뛰어들게 된 배경과 사회적, 법적토대의 미비함을 지적하며 그 미래의 향방을 제시하는 것으로 인식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를 만들어보고자 한다. 이미 일하는 청소년에 관한 르포나 뉴스는 다뤄질대로 다뤄졌지만 그에 관한 사회적 대안은 아직 제자리 걸음 수준이다. 

호텔, 택배 상하차, 배달대행, 편의점, 사무보조, 콜센터, 음식점, 카페, 병원등 청소년들이 진출해 있는 노동형태는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당연한 임금협상의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엄격한 갑과 을의 종속관계에 매여 약자로써 처우개선이나 언감생심 연장수당같은 건 꿈은 꾸지도 못하는 것은 일반인에 비해 압도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는 현실이다. 최근 음식점들이 직원을 따로 고용하지 않고 배달대행서비스를 이용하게 되면서 더 먼거리를 더 빠르게 밟아야 하는 위험은 고스란히 음식점과 대행업체의 수익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이 같은 간접고용의 형태가 늘어나면서 업무 중 다치거나 임금체불등 불리한 상황이 닥쳤을 때 책임을 물을 대상이 묘연해진 것등은 사회경험이 없고 노동관련법을 잘 모르는 어린 청소년들의 위치를 이용해 더욱 불안한 고용의 현실로 치닫게 만들고 있다. 한편 노동자를 구제해야 할 근로감독관은 업주들과 한 통속이 되어 받아야 할 임금을 포기하게 되거나 그냥 적당히 넘어가는 타협으로 끝내는 일이 다반사라고 한다.



점심밥을 꾸역꾸역 먹으며 고객에게 응답을 하고, 알아서 요령껏 쉬는 것이 몸 안 망가는 비결(?)이라는 이상한 노동환경들 속에 한 달이면 제 풀에 나가떨어지거나(중간에 그만두면 임금을 안주지만 감수한단다.) 그만두고 또 다른 직업을 전전하는 일이 반복되는 바깥생활. 그들이 일을 하게 된 계기 중엔 그저 '노는 애'라서 혹은 '유흥비'나 사치가 목적이 아니라 가족과의 불화로 인한 독립이나 여의치 못한 형편에 '모두벌이'에 합세하게 된, 엄연한 '생활비 마련'의 의미가 짙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아예 부려먹을 요량으로 청소년을 쓴다는 업주는 사사건건 불리함을 따지는 알바생에게 "너라면 그런 법 다 지키고 애들을 쓰겠냐?"란 말로 당당히 자신의 부당성을 인정(?)한다. 이런 청소년들이 함께 일하는 곳엔 연대가 될 만한 노조도 단결고리도 부족해 노동인권에 대한 법을 잘 알고 있는 아이들이 있어도 그 목소리를 내기가 여의치 않다. 그저 서로 눈치만 보며 무언의 감시와 통제로 하루를 보낸다는 안타까운 이들을 보며 화가 나고 분통이 터졌다.



요즘 애들은 참을성도 없고 책임감이 부족해서 자주 일을 그만 둔다고 탓하기 전에 그 일자리는 머무를 만한 곳인지를 먼저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  XX이는 노동이 숭고하다는 이상을 강변할 게 아니라, 현실의 노동은 왜 숭고하지 못한지, 노동이 숭고해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 p.112



너무 힘든 나머지, '알바를 하려고 사는 건지 살려고 알바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푸념을 늘어놓던 한 인터뷰대상 학생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교육과정에서 순종하고 예의있고 어른에게 말대답하지 않고 자기 의견을 주장하거나 나서는 것을, 나대는 것으로 나쁘다고 배웠다. 또한 과거 학창시절 두발과 복장, 외모를 규제당한데 이어, 직장에선 개성을 무시한 깔맞춘 유니폼과 지나친 단정함을 요구당하는 것으로 통제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것이다. '말 잘듣는' 직원을 교육하는 교육현장과 본질적인 노동인권문제의 핵심을 보지 못하는 정부, 청소년노동을 안좋게 보는 사회적 편견들 때문에 진정 일이 필요한 그들은 오늘도 오해와 하대속에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가정에서 부모에게 상처받고 학교에서 내쳐진 아이들이 이렇게 얼룩진 사회초년경험의 기억을 안고 다시 고립되어 의지할 곳도 없게 되면서 그들이 기댈 곳이라곤 뜻을 같이 하는 친구 몇 뿐이게 되었다. 그들은 힘겨운 일에 치이면서도 보통의 십대들과 같은 미래를 꿈꾼다. 그 꿈 중 하나가 당사자인 그들의 목소리가 담긴 청소년노동정책의 변화라는데 언제 그 요원한 길이 열리게 될지 나 또한 무척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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