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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개정신판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제목을 알 게 된건 아주 오래 전인 듯 하다. 아마 그 땐 지금처럼 책의 내용을 깊이 공감할 수 없는 나이여서 읽어봤자 '이 사람들이 대체 무슨 말들을 하는 거야?'하고 던져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후로 20년이 흐른 지금, 이 소설의 문장 하나 하나와 에피소드,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이 벌이는 갈등은 나의 미혼여부를 떠나 다름 아닌 대한 민국의 여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개 끄덕여지는 현실이다.
우리 사회가 이혼녀를 보는 시각은 아직 부정적이다. 그리고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워킹맘의 고충 역시 세상 사람들의 이해를 받기 시작한 것 역시 최근의 일이다. 남아선호사상이 유별한 한국에서 아들을 낳기 위해 줄줄이 딸자매 끝에 아들을 둔 집안은 지금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주인공 혜완 역시 자신을 낳고 집안의 온갖 구박을 받아온 친정엄마를 보고 자란 인물이다. 보수적인 이런 가정에서 그녀가 아들인 헌이를 잃고 이혼을 하게 되면서 죄인같은 딸을 둔 엄마와 혜완은 만날 때마다 서로에게 격한 동질감과 애틋함을 느낀다. 한편, 자존심이 세고 무모한 혜완의 눈에 친구 영선은 한없이 소극적이고 착할 뿐이지만 그녀 또한 남모를 상처에 매일 눈물짓는다. 연애시절 유학을 함께 했던 남편에게 모든 걸 올인하고 유명감독으로 탄탄대로를 걷게 된 그의 뒷바라지를 하며 느끼는 왠지 모를 억울함과 공허함은 이윽고 심한 알코올중독과 우울증으로 영선을 타락의 나락으로 이끈다.
그 남자의 학비가 없으면 나는 어느덧 그 남자의 학비가 되고, 그가 배가 고프면 나는 그 남자의 밥상이 되고, 그 남자의 커피랑 재떨이가 되고, 아이들의 젖이 되고 빨래가 되고.... 그 남자가 입을 여는 동안 나는 그런 것들이 되어 있었어. - p.124
나는 칼을 들었지. (....) 그를 알코올 중독에 우울증이 있는 미친 부인의 희생자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 죽을 사람은 나였던 거야.... p.200 - 201
남편의 외도로 인해 마른꽃처럼 시들어가지만 모른척 명랑함으로 그 고민을 가리고 있는 경혜 역시 두 친구와 다를 게 없는 여자로 그녈 보면 문득 박강성의 노래 <마른꽃>이 생각난다. 셋은 한 남자와 연애를 했던 삼각관계 시절을 회상하거나 지금의 남편들 흉을 보며 서로 공감하고 연민하며 서로를 위로하지만 때론 경멸하고 질투하기도 한다. 이렇게 세 여자들의 입을 통해 일방적으로 전해지는 남자들의 행동과 말은 얼핏 독단적인 시각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장면들은 대개 tv드라마나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로써 친숙한 것들이 많다. 일부일처제 논쟁, 성차별, 불륜, 외도, 성희롱, 결혼의 실체 등등 끊이지 않고 거론되어 왔던 화두이며 현재진행중인 민감한 주제들.
"(...) 남자는 설거지 한 번 하고 몇 년 동안 말하죠.... 난 언제나 집안일을 돕고 있다고.... 하지만 또 여자가 어느 날 동창회에 갔다가 늦으면 남자들은 이렇게 말해요. 내 아내는 매일 나가 돌아다녀...." -p. 215
매맞는 여자, 홀대받는 여자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혜완,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왔던 시간들을 결국엔 참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영선, 아무일 없다는 듯 묵묵히 살아가는 경혜. 그들 모두 우리 여성들 각각의 자화상이 아닐까. 남자들은 '니가 원한 거고 선택도 니가 한거야' 라는 이유로 변명을 하면서 사실 세상이 여자에게 희생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그녀들 스스로 그것을 자처한 결과임을 고스란히 확인사살시킨다. 하지만 여자들이란 사실 남자들의 행동에 분개하면서도 한편으론 챙겨주고픈 이상한 동물이며 조그만 것에도 상처받거나 감동받는 존재임을 그들은 모른다. 이런 이유로 남녀간의 엇갈린 주장과 갈등은 세대를 초월해 세월이 흘러도 그 종지부를 찍을 길이 요원한 영원한 숙제일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남편이라는 이름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아내라는 이름의 자리, 혹은 어머니라는 이름의 자리, 며느리라는 이름의 자리, 두려웠던 것은 선우가 아니라 그렇게 여러 이름으로 점수 매겨진 그 자리들이었다. - p.281
나는 차라리 아무도 모르게 남편에게만 멸시를 받는 편을 택했던 거야. 니가 남편에게 받은 모욕을 거부하고 초라함을 택했듯이. 그래 나도 택했어. 온 세상에, 친한 친구들에게까지 초라함을 들키고 싶지 않았어. - p. 316
누구누구 엄마로 불려지는 여자들은 자신의 이름과 존재를 당당히 얻고 싶어한다. 결혼을 하고 자연스레 집안으로 숨어들게 되던 과거의 여자들은 조금씩 아니, 이제 많이 새상 밖으로 나온 듯 하지만 결혼 후 품절남, 품절녀를 마냥 축하만 해줄 수 없는 묘한 현실은, 아직도 유효한 이 소설의 이야기가 모두에게 공감을 얻고 있는 이유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