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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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서너 해 전, 구입해서 책장에 꽂혀있다가 이제서야 나의 손길을 마주한 책 되시겠다. 새 책이 누렇게 변할 때까지 책을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건 제목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와 내용이 어렵고 음울하더란 소문(?)과 리뷰를 워낙 많이 접해서였다. 근데 책을 막상 읽고 보니 주인공 '요조'와 나랑 많이 닮은 부분이 있다는 것과 어쩌면 사람들 모두가 한번씩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깊은 환멸을 느낀 적이 있을 텐데도 서로가 그걸 감추고 모른 체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걸 마침내 이 소설이 까발렸다는 느낌에 왜 진작 읽지 않았나 후회가 든다.


서로 속고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 p.26


남에게 싫은 소리 한번 못하고 일이 커지는 걸 최대한 자제하며 상대의 비위를 익살로 맞춰주는 주인공은 극단적인 A형의 소유자 내지는 전형적인 일본인의 모습이다. 그는 법이라는 도덕적 잣대를 허울 삼아 온갖 위선과 탐욕, 시기로 가득찬 인간세상을 향해 혀를 차며 마치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의 시선에서 관조하듯 담담히 써내려가고 있다. 이러한 불신의 사회에 반항하듯 그는 공산주의나 술, 담배, 창녀와 같은 비합법적인 것에 기대어 위안과 안식을 얻고 때론 자신과 동류인 존재를 필사적으로 찾기도 한다.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弔詞)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 p.92


나는 저 사람을 내 모든 속내와 치부까지 털어놓을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 사람은 나를 자신의 수많은 친구들 중 그저 한 명이라고, 혹은 나 자신을 대상화하여 우월감에 젖는 수단으로밖에 여기지 않았단 걸 알게 됐을 때 느끼게 된 좌절, 실망. 어른이 되면서 다들 암묵적으로 그렇고 그렇게 변해가는 게 인지상정인데 비해 결코 깨끗함과 순수함을 잃고 싶지 않았던 요조는 어색한 연기로나마 그들 사회에 섞여들고자 부단한 노력을 거듭해보지만 어설픈 배우로의 위장조차 녹록찮다.


그에게 이 지옥같은 인간 세상은 차라리 죽음보다 고통스럽다. 자신을 제외한 세상 모두가 비정상인건지, 집안에서부터 유난히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던 자신이 비정상인지 혼란스럽다. 자신이 소속된 이 사회가,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정상이고 그게 인간이라면 마땅히 자신은 그런 인간이 될 자격도 그럴 마음도 없는 것으로 결론짓고 스스로를 '인간 실격자'임을 인정, 자살로 생을 마무리한다. 자살이 한 때 숭고하고 책임의식있는 행동이라 여겨졌던 시절, 유독 그런 사고방식이 짙었던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자전적 소설 형식으로 기술한 이 이야기는 그런 의미에서 문인들을 비롯한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동족들에 대해 실존적 의문과 회의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인간 고유의 특성이다. 저도 인간이면서 뻔뻔스럽게 그런 의문을 가질 수 있냐고 너는 그렇지 않느냐고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연해진 것에 대한 태생적 질문과 의혹, 거부. 그것은 비록 '인간 실격'자로 패배한 삶을 살았지만 인간이어서 가능했던 작가 내면의 진지한 통찰이 낳은 시대의 처절한 반성일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날카로운 고발에서 비켜갈 수 없는 씁쓸한 인간의 단면을 나는 오늘 다시 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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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지음, 유주환 작곡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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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유달리 남과 자신을 비교해 뭐라도 하나 우월한 구석을 찾아내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직성이 풀리는 문화가 저변에 깔려 있는 것 같다. 좋은 대학과 기업으로의 진출이 자아실현의 방법이 아니라 때론 남에게 별것 아닌 사람으로 인식되지 않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음은 이전 포스팅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에서 충분히 언급한 바 있다. 감정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고 인간관계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담론은 아직까지 많지 않았던 점에서 이 책 <모멸감>은 제목부터 단연 내 구미를 당겼다.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는 이분법은 다양하다. 나는 선하고 너는 악하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나는 똑똑하고 너는 멍청하다. 나는 유능하고 너는 무능하다. 나는 강하고 너는 약하다. 나는 예쁘고 너는 못생겼다. 나는 깨끗하고 너는 더럽다..... 이런 구분 속에서 스스로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고 상대방의 열등감을 자아낸다. 단편적으로 사람의 격을 나누고 자의적으로 가치를 매기는 속에서 모멸감을 주고 받는다. - p.174


자신도 모르게 섣불리 남을 판단하게 된 기준이 있진 않은가. 자신이 단지 연장자란 이유로,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나 학벌을 가졌다는 이유로 혹은 타고난 외모의 준수함을 무기삼아 알량한 콧대를 세운 적은 없는가.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또 잊지 못할 수모를 당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자존심이란 것이 때론 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감정의 핵이 된다는 것은 가끔 뉴스에 보도되는 자살과 살인 등의 원한범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복수나 단죄의 코드로 만들어지는 작품에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어 흥분을 느껴본 경험이 한번쯤 있을 것이다. 남자친구의 어머니가 고액의 돈봉투를 건네주며 자기 아들과 헤어짐을 강요하고 가정교육과 부모운운하며 끼얹는 물까지. 막장드라마에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매번 마주치는 건 표현의 식상함이 아니라 굴욕과 인격모독의 현주소일 것이다. 이 같은 모욕과 수치는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비하, 조롱, 무시, 경멸, 침해, 차별, 동정, 오해등이 그것으로 저자는 문학작품과 실제 있었던 에피소드를 예로 들어 이해가 쉽게 설명하고 있다.


한편 말투를 비롯해 표정, 시선, 몸짓 하나에도 오해를 일으켜 의도치 않은 모멸감을 타인으로 하여금 느끼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자신의 구체적 일화로써 또한 증명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모두 그렇겠지만 나 역시 남이 내게 하는 말과 행동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데 사소한 업무지적이나 꾸지람, 또는 칭찬과 짜증에 그 날 하루 컨디션이 좌우될 때가 많다. 특히 한국사회는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큰 반면 타인에 대한 존중과 평등의식이 부족한 이유로, 모멸은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적 악감정이 되어 버렸다.


한국전쟁이후 급변한 경제속도에 미처 발맞추지 못한 대중의식 저변에는 아직도 옛 신분제의 잔해가 남아있다. 내가 누군줄 알고, 어따 대고, XX주제에~ 등 이렇게 상대방을 깔보고 짓밟는 발언은 낡은 귀천의식에 젖은 자신이 모멸감에 찌든 삶을 살았다고 시인아닌 시인을 하는 셈이다. 가치를 나누는 기준이 돈과 지위에 국한되어 그 외에는 다 의미없는 것들로 치부되는 지금의 현실이 '억울하면 출세하라' 그릇된 사고방식을 낳은 것이다.


저자는 순간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한걸음 물러서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욱하는 성질과 자동반사적으로 나가는 행동을 자제하고 한 템포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반응을 결정하라는 것. 그러면 점차 분노와 화를 조절하는 감정의 통제능력이 생기고 비로소 자신이 감정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누가 보기에도 화를 낼 법한 상황에서 달관하거나 침묵, 유머로 받아치는 자세는 상대로 하여금 숙연함을 느끼게 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각 개인의 노력을 시작으로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의식구조 자체를 단순한 등급과 서열에 따라 자신의 행복이나 가치를 결정짓는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 상대적 가치의 재발견, 가치의 다원화가 절실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덧붙인다. 나는 오늘 하루 감정의 온전한 주인이었는지, 타인의 단점 들추기가 나의 자존감을 높이는 수단으로 이용되진 않았는지 돌아보는 반성에서, 모멸은 사라지고 품위있는 사회로 가는 그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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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소비다 - 상품 미학적 교육에 대한 비평
볼프강 울리히 지음, 김정근.조이한 옮김 / 문예출판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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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몇 해전부터 일주일에 한 두번씩 이메일로 오는 소비자실태조사 관련 설문에 참여하고 있는데 보통, 제품 브랜드에 대한 인지도나 사용경험을 묻고 광고영상을 보여준 뒤 어느 점이 좋고 어떤 점이 아쉬웠는지를 수치나 서술식으로 평가하는 항목들이 주를 이룬다. 최근 기획되는 상품들은 이렇게 기능과 목적성에만 주안점을 둔 실제가치보다 특정 기업의 이미지나 이상적 생활모습을 구현한 광고모델의 연출효과를 기대한 마케팅이 대세다.


상품을 소비한다는 것은 이제 단순히 기존의 것이 낡아져서 새것으로 대체한다는 의미를 넘어 때로는 자신의 품격을 높이거나 과거의 추억에 젖고 지루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는 등 다채로운 성격을 띠게 되었다. 가령, 가방은 물건을 넣고 휴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품이지만 유명 모델이 선전한 멋진 디자인에다 값비싼 가격이 매겨져 백화점 매장에 전시되면 그땐 이미 가방의 실용성은 배제되고 소유가 목적이 되는 소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책 <모든 것은 소비다>에서는 이러한 제품의 브랜드화가 사치품에서부터 시작해 각종 스포츠, 오피스, 주방 용품, 심지어 초콜릿이나 생수 같은 일상에 필요한 식료품들에까지 스며들어 결국엔 어떤 제품을 선택하느냐의 따라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게 되는 소비의 계층화를 진단하고 나선다.


타인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자기 만족의 행위로써 물건을 고를 때에 적당히 이름난 제품, 그러나 자신에 대한 무시나 경멸이 쏠리지 않을만한 친환경적 제품 구매를 위해 지금의 소비자들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물건 구입에 할애한다. 선물 하나를 하려 해도 가격이 너무 싸서 혹은 비싸서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진 않을까 전전긍긍해 한다. 이 때 일반 상식 수준을 벗어난 선물을 한 당사자는 돌연 교양없고 개념없는 인간이 되기도 한다. 더 이상 편리하고 쓸모 있는 창조적 제품을 만들 수 없을 때, 소비 자본주의가 꾀하게 되는 돌파구는 '상황의 파시즘'이다.


아무리 안 팔리는 제품들도 장마를 만나 불티나게 팔리는 우산과 같이 '제 때'를 만나면 수요는 늘게 마련이다. 실례로 사계절을 겨냥한 각종 시즌 제품들이 그것인데, 저자는 이런 시즌의 의미를 좀 더 세분화하여 일상에 접목시킨 상황에 중점을 둔 기업 마케팅을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첫날밤을 맞이하는 신혼 부부에게 어울리는 와인, 잠 들기 전 샤워시 긴장을 풀어주는 샤워젤, 중요한 시험시 손목에 걸어야 하는 장신구. 이렇게 맞춤 제품이 아니면 결과물이 형편없을 것 같다는 일종의 세뇌를 받은 소비자는 그것이 분명 긍적적 결과를 가져다 줄거라는 '플라세보효과'와 같은 심리적 압박에 미신처럼 그 제품을 구입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모두가 광고 속 오븐과 크림과 바지를 가졌다고 해서 좋은 맛의 빵과 탄력있는 몸매와 간지나는 핏을 보장할 수는 없다.


최근엔 제품이 지니는 도덕적 이미지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판매자와 소비자가 생겨났다. 제품이 어디에서 생산되고 어떤 공정을 거쳤으며 내용물의 친환경성은 물론 작업환경의 합리성까지, 구매자가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을 참관하고 감시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게다가 수익금액의 일부가 좋은 데 쓰여진다고 하면 양심적으로 괜한 뿌듯함까지 얻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교양있는 소비조차도 더 많은 가격을 지불할 능력이 있는 중산층의 권리로 한정지어지는 시스템으로 '양심적 소비'라는 행위 자체도 어려운 서민들에겐 언감생심의 일이 되어버렸다.


오늘날 소비문화를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것은 그 사람의 성별이나 나이, 재산규모와 같은 좁은 틀에서 정치적 성향, 윤리관등 통상적 사고방식 전부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매개고리로서 적잖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저자가 예술형식과 소비문화를 비교해 설명한 것처럼, 상품이 한 폭의 그림이나 흐르는 음악과 같이 인간의 내면을 치유하고 상상력을 자극하거나 좀 더 기품있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제품 그 이상의 가치를 구현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과장으로 범벅이 된 상품광고에 부정적 시선이 팽배했지만 이제는 내용물보다 상품포장에 관심을 더 기울이고 음식의 화룡점정이 되는 데코레이션처럼 제품의 외양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선택기준이 되었다. 오히려 그 허구적 가치를 더 신봉하는 매니아층의 소비자가 많아진 요즘엔 이것도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여지는 추세다. 하루에도 인터넷 여기저기서 각종 상품의 넘쳐나는 리뷰들과 특정제품을 사용하는 동호회가 그걸 말해준다. 쓰레기 만두, 멜라민파동으로 한창 들끓었던 소비자들은 이제 모 회사의 갑질채용에 탈퇴시위를 벌이고 혹은 도덕성 자질논란이 도마위에 오른 기업에 대해 하나 둘 등을 돌리고 있다.


이로써 제품을 사용함으로써 누리게 되는 모든 효과는 물질적 차원에서 한층 더 높은 이미지를 소비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내가 쓰고 있는 제품이 나를 말해 주는 시대. 제품 선택에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이유다.


[해당 서평은 반디펜벗 6월의 테마서평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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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EBS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제작팀 지음 / 해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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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나오지 않은 내가 가장 두려웠던 건 내 또래의 친구들이 대학생활과 동아리등의 이야기로 대화의 꽃을 피우던 20대초반의 사회초년시절이었는데 역시 같은 직장인 동료 사이에서도 대졸과 초대졸, 고졸에 따라 존재한 연봉와 직급차이 앞에서 학력, 학벌에 따른 현실적 차별에 뼈아픈 좌절을 느꼈던 나날의 연속으로 기억된다. 많이 바뀌었다지만 요즘도 갖가지 스펙과 수상, 봉사활동등의 이력이 한 사람의 가치판단 기준이 되곤 한다.


지금처럼 취업난국이 극심하진 않았던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학은 놀러 가는 곳, 미팅하고 술마시며 희희낙낙하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대중매체의 영향도 한몫 했지만 일단 대학은 들어가고 보자, 졸업장만 따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이 이제 막 입시지옥을 벗어난 캠퍼스의 젊은이들을 나태하게 만든 원인이라면 원인이었다. 세상은 변했다. 학벌과 높은 스펙 또한 중요하지만 창의력과 개성, 리더십을 강조하는 새시대 모든 기업들에게 대학 졸업장은 진부한 이력서들 속 한 칸을 채우는 발자취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이 책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에 등장하는 인재 프로젝트의 참여자들은 남부러울 것 없는 명문대에 갖가지 스펙이 화려한 반면,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잘하는지에 대한 내면 성찰이 부족하고 구체적인 목표, 자신감, 실패에 대한 두려움까지도 의외로 보통 사람들 못지 않게 가지고 있었다. 학창시절 한가닥 했다는 우등생까지도 취업시 면접이나 자기 의견을 피력해야 하는 자리에 서게 되면 움츠러드는 현상, 이것은 수치심과 두려움에 뿌리를 둔 동양인 고유의 특성이자 우리의 잘못된 교육 시스템 때문이다.


우리의 초. 중. 고등학교 12년 동안 정답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교과서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각자의 경험이나 주관에 따라 다양하게 답할 수 있는 문제도 우리 교육에서는 그 답을 열어놓기보다는 한 가지로 정해두고 정답은 하나라고 가르친다. - p.217 


이렇게 정답프레임에 갇힌 교육시스템은 자유로운 생각을 펼치고 생각을 끄집어내야 하는 탐구나 실험, 논의 상황에선 제 소리를 내기 어려운 천편일률적 인력만을 생산할 뿐이다. 인터넷에서 '세계 100위 대학'이란 이름으로 나열된 순위에서 상위권을 다수 점거한 대학들이 미국소재의 학교인데, 이 책에서는 세인트 존스와 예시바대학이 좋은 예로 등장한다. 일반적인 대학의 커리큘럼을 따르지 않고 전 학년 동안 필독서 목록을 주고 그에 대해 학생들끼리 토의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거나, 침묵하는 공부를 떠나 파트너와 쉴새 없이 지식을 주고 받으며 질문과 답을 거듭 짜내는 두 대학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제일 놀라웠던 건 10가지 과목이 넘는 교과과정에 그것도 아주 빠른 진도를 아이들은 군말없이 따라가는 듯 보였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교사의 일방적 주입식 수업에 50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수동적으로 끌려가고 있는 풍경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런 질문도 토론도 없는 지루한 수업방식이, 안 그래도 내게 취약했던 수학과 같은 과목은 아예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만들어 버린 시스템이었던 것 같다. 거기다 "떠들지 마!", "조용히 해", " 자습해~" 같은 선생님의 꾸짖는 소리 내지는 방관적인 교육방법은 우등생도 아닌 내가 감히 질문이나 할 용기조차 주지 않았다.


현재 대학생이거나 졸업을 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부모님, 교사, 친지, 지인등 타인의 시선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혹은 장래에 필요할 것 같으니까 등으로 진정한 배움의 욕구나 학구열로 불타올라 진학한 케이스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학은 젊음과 패기로 가득해야 할 지식의 성소인데 언젠가부터 이 곳은 취업의 수단이 되어버렸고, 고3수험생들에겐 인생의 종착지마냥 명문대의 허울을 그저 쫓고 있는 현실이 안쓰럽기만 하다.


공부하기에도 벅찬 시간에 책 한권 읽을 짬이 있냐고, 시험 예상 문제나 콕 콕 찝어달라던 친구들이 기억난다. 너는 왜 대학 안 가냐고 묻던 아이들도. 대학을 안 가는 이유는, 마치 결혼을 왜 안하냐는 질문과 비슷한 것 같다. 왜 결혼을 하냐고 묻는 이들은 거의 없으니까. 그러나 이제 이 질문을 해야 할 때가 왔다.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우리나라가 서구대학의 선진교육문화와 어깨를 나란히 할 날이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그땐 꼭 대학에 가서 내가 배우고 싶은 분야의 공부를 맘껏 해보고 싶다. 나는 다만 아직까지 대학의 필요성을 굳이 못 느끼고 있는 1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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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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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많이 접하면서 다른 분들의 서평을 수십 수백 편 읽다 보면 어쩔 땐 너무나도 익숙한 표지에 마치 내가 그 책을 읽은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신경숙 작가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가 말하자면 그런 류의 작품인데, 열흘 전 쯤 밤새 후딱 읽어놓고 리뷰를 쓰려 온갖 궁리를 했는데 잘되지 않아 지금에야 쓴다. 첫 문장을 뭘로 시작해야 할지도 몰라 며칠을 앓았던 책. 미디어효과를 톡톡히 본 베스트셀러이기도 하고 여태껏 표지를 보고 모든 책의 내용을 가늠해 온 나에겐 무난한 표지 속에 감춰진 충격적이고도 비극적인 스토리가 짠한 아픔으로 다가왔던 책이다.


장르소설도 아닌 순수문학에서 이처럼 많은 이들의 죽음을 연달아 목도하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죽음은 폭력과 억눌림에 마지막까지 순응하지 않겠다는 메시지 혹은 결의로도 보인다.

엄마의 죽음으로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가려는 정윤, 연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시대의 잘못됨에 분신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윤미래, 그런 언니의 죽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플레어 치마와 화상자국으로 자신의 상처를 매번 확인하다 결국 세상을 등지는 미루, 어릴 적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거미를 극복했으나 그 몇 갑절 공포로 자신을 덮치던 무언의 억압 앞에 죽음으로써 무릎 꿇고 만 단이. 청각장애 고양이 에밀리까지도 결핍의 대상이긴 매한가지다.


왜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기쁨이지만은 않을까. 왜 슬픔이고 절망이기도 할까. - p.157


오늘을 잊지 말자, 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울적해져 있었다. 상실될 걸 알고 있는 이의 고독이 묻어 있었다. - p.158


하루 아침에 누군가가 죽거나 소식이 끊겨도 아무렇지 않은 세상. 매순간 좌절과 상실의 불안 속에 놓인 고통의 존재로써 사랑따윈 사치였을까. 그들은 한가지 감정으로 뭐라 설명되어질 수 없는 복잡미묘한 관계와 연민으로 서로를 보듬은 채 기대어 살아간다. 그들 모두를 하나로 묶어준 기둥이었던 윤교수가 남긴 '강을 건너는 크리스토프'의 일화처럼. 부조리한 사회에 굴복하거나 슬퍼하지 말며 맞서 투쟁하라는 그의 이야기는 힘있는 위로로 때로는 멀고도 험난한 여정을 의미하는 것 같다.


누군가 약속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의미없는 일은 없다고 말이야. 믿을 만한 약속된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쫓기고 고독하고 불안하고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보내고 나면 다른 것들이 온다고 말이야. 이러느니 차라리 인생의 끝에 청춘이 시작된다면 꿈에 충실할 수 있지 않을까? - p.107


오늘날 남녀간의 만남 속에서 사랑의 감정만을 상상하는 (나를 포함한)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작가가 전달하려는 모든 것을 이해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살아남은 자의 기록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때도 지금도 이유는 다르지만 부조리에 희생당하는 자들이 있고 그것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투사가 되길 자처하는 살아남은 자들의 목소리가 있다는 것.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 p.291


철저히 외양만을 중점으로 마케팅되어진 이 소설을 가벼이 집어든 건 내 실수였을까. 아니면 매번 끌리듯이 치열한 청춘의 삶을 그린 작품을 꿰뚫어 보는 내 직관때문이었을까. 하루키 문학과도 비슷한 맥을 같이 하는 이 깊은 울림이 있는 이야기가, 일본소설이 주름잡는 최근 국내문학 시장의 안타까움을 바탕으로 쓰여졌다는 작가의 말처럼 우리만의 특색있는 청춘소설로 대표되어 더 많은 이들에게 읽혀지고 기꺼이 아파하는 소설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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