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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지음, 유주환 작곡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우리나라는 유달리 남과 자신을 비교해 뭐라도 하나 우월한 구석을 찾아내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직성이 풀리는 문화가 저변에 깔려 있는 것 같다. 좋은 대학과 기업으로의 진출이 자아실현의 방법이 아니라 때론 남에게 별것 아닌 사람으로 인식되지 않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음은 이전 포스팅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에서 충분히 언급한 바 있다. 감정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고 인간관계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담론은 아직까지 많지 않았던 점에서 이 책 <모멸감>은 제목부터 단연 내 구미를 당겼다.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는 이분법은 다양하다. 나는 선하고 너는 악하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나는 똑똑하고 너는 멍청하다. 나는 유능하고 너는 무능하다. 나는 강하고 너는 약하다. 나는 예쁘고 너는 못생겼다. 나는 깨끗하고 너는 더럽다..... 이런 구분 속에서 스스로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고 상대방의 열등감을 자아낸다. 단편적으로 사람의 격을 나누고 자의적으로 가치를 매기는 속에서 모멸감을 주고 받는다. - p.174
자신도 모르게 섣불리 남을 판단하게 된 기준이 있진 않은가. 자신이 단지 연장자란 이유로,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나 학벌을 가졌다는 이유로 혹은 타고난 외모의 준수함을 무기삼아 알량한 콧대를 세운 적은 없는가.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또 잊지 못할 수모를 당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자존심이란 것이 때론 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감정의 핵이 된다는 것은 가끔 뉴스에 보도되는 자살과 살인 등의 원한범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복수나 단죄의 코드로 만들어지는 작품에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어 흥분을 느껴본 경험이 한번쯤 있을 것이다. 남자친구의 어머니가 고액의 돈봉투를 건네주며 자기 아들과 헤어짐을 강요하고 가정교육과 부모운운하며 끼얹는 물까지. 막장드라마에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매번 마주치는 건 표현의 식상함이 아니라 굴욕과 인격모독의 현주소일 것이다. 이 같은 모욕과 수치는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비하, 조롱, 무시, 경멸, 침해, 차별, 동정, 오해등이 그것으로 저자는 문학작품과 실제 있었던 에피소드를 예로 들어 이해가 쉽게 설명하고 있다.
한편 말투를 비롯해 표정, 시선, 몸짓 하나에도 오해를 일으켜 의도치 않은 모멸감을 타인으로 하여금 느끼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자신의 구체적 일화로써 또한 증명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모두 그렇겠지만 나 역시 남이 내게 하는 말과 행동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인데 사소한 업무지적이나 꾸지람, 또는 칭찬과 짜증에 그 날 하루 컨디션이 좌우될 때가 많다. 특히 한국사회는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큰 반면 타인에 대한 존중과 평등의식이 부족한 이유로, 모멸은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적 악감정이 되어 버렸다.
한국전쟁이후 급변한 경제속도에 미처 발맞추지 못한 대중의식 저변에는 아직도 옛 신분제의 잔해가 남아있다. 내가 누군줄 알고, 어따 대고, XX주제에~ 등 이렇게 상대방을 깔보고 짓밟는 발언은 낡은 귀천의식에 젖은 자신이 모멸감에 찌든 삶을 살았다고 시인아닌 시인을 하는 셈이다. 가치를 나누는 기준이 돈과 지위에 국한되어 그 외에는 다 의미없는 것들로 치부되는 지금의 현실이 '억울하면 출세하라' 그릇된 사고방식을 낳은 것이다.
저자는 순간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한걸음 물러서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욱하는 성질과 자동반사적으로 나가는 행동을 자제하고 한 템포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반응을 결정하라는 것. 그러면 점차 분노와 화를 조절하는 감정의 통제능력이 생기고 비로소 자신이 감정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누가 보기에도 화를 낼 법한 상황에서 달관하거나 침묵, 유머로 받아치는 자세는 상대로 하여금 숙연함을 느끼게 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각 개인의 노력을 시작으로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의식구조 자체를 단순한 등급과 서열에 따라 자신의 행복이나 가치를 결정짓는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 상대적 가치의 재발견, 가치의 다원화가 절실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덧붙인다. 나는 오늘 하루 감정의 온전한 주인이었는지, 타인의 단점 들추기가 나의 자존감을 높이는 수단으로 이용되진 않았는지 돌아보는 반성에서, 모멸은 사라지고 품위있는 사회로 가는 그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