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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평점 :
무려 서너 해 전, 구입해서 책장에 꽂혀있다가 이제서야 나의 손길을 마주한 책 되시겠다. 새 책이 누렇게 변할 때까지 책을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건 제목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와 내용이 어렵고 음울하더란 소문(?)과 리뷰를 워낙 많이 접해서였다. 근데 책을 막상 읽고 보니 주인공 '요조'와 나랑 많이 닮은 부분이 있다는 것과 어쩌면 사람들 모두가 한번씩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깊은 환멸을 느낀 적이 있을 텐데도 서로가 그걸 감추고 모른 체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걸 마침내 이 소설이 까발렸다는 느낌에 왜 진작 읽지 않았나 후회가 든다.
서로 속고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 p.26
남에게 싫은 소리 한번 못하고 일이 커지는 걸 최대한 자제하며 상대의 비위를 익살로 맞춰주는 주인공은 극단적인 A형의 소유자 내지는 전형적인 일본인의 모습이다. 그는 법이라는 도덕적 잣대를 허울 삼아 온갖 위선과 탐욕, 시기로 가득찬 인간세상을 향해 혀를 차며 마치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의 시선에서 관조하듯 담담히 써내려가고 있다. 이러한 불신의 사회에 반항하듯 그는 공산주의나 술, 담배, 창녀와 같은 비합법적인 것에 기대어 위안과 안식을 얻고 때론 자신과 동류인 존재를 필사적으로 찾기도 한다.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弔詞)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 p.92
나는 저 사람을 내 모든 속내와 치부까지 털어놓을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 사람은 나를 자신의 수많은 친구들 중 그저 한 명이라고, 혹은 나 자신을 대상화하여 우월감에 젖는 수단으로밖에 여기지 않았단 걸 알게 됐을 때 느끼게 된 좌절, 실망. 어른이 되면서 다들 암묵적으로 그렇고 그렇게 변해가는 게 인지상정인데 비해 결코 깨끗함과 순수함을 잃고 싶지 않았던 요조는 어색한 연기로나마 그들 사회에 섞여들고자 부단한 노력을 거듭해보지만 어설픈 배우로의 위장조차 녹록찮다.
그에게 이 지옥같은 인간 세상은 차라리 죽음보다 고통스럽다. 자신을 제외한 세상 모두가 비정상인건지, 집안에서부터 유난히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던 자신이 비정상인지 혼란스럽다. 자신이 소속된 이 사회가,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정상이고 그게 인간이라면 마땅히 자신은 그런 인간이 될 자격도 그럴 마음도 없는 것으로 결론짓고 스스로를 '인간 실격자'임을 인정, 자살로 생을 마무리한다. 자살이 한 때 숭고하고 책임의식있는 행동이라 여겨졌던 시절, 유독 그런 사고방식이 짙었던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자전적 소설 형식으로 기술한 이 이야기는 그런 의미에서 문인들을 비롯한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동족들에 대해 실존적 의문과 회의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은 인간 고유의 특성이다. 저도 인간이면서 뻔뻔스럽게 그런 의문을 가질 수 있냐고 너는 그렇지 않느냐고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연해진 것에 대한 태생적 질문과 의혹, 거부. 그것은 비록 '인간 실격'자로 패배한 삶을 살았지만 인간이어서 가능했던 작가 내면의 진지한 통찰이 낳은 시대의 처절한 반성일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날카로운 고발에서 비켜갈 수 없는 씁쓸한 인간의 단면을 나는 오늘 다시 또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