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신자유주의와 결탁하거나 이로 인해 의기소침해 있던 사회민주주의조차 기후정치에서 새생명을 얻고 있다. 그린뉴딜 지지자로 거듭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재생가능에너지로 전환하는과업을 노동조합이 조직된 고임금 일자리와 연결함으로써 잃어버린 노동계급 지지를 되찾으려한다.

홀로 따돌림 당하기 싫어서인지 여러 성향의 우익 포퓰리즘 역시 녹색화 하고 있다. 그들은생태 - 민족주의적 국수주의를 수용하면서, (인종화 된)‘타자"의 배척을 통해 ‘조국‘의 녹색 공간과 자연 자원을 지키자고 주장한다.

대기업과 금융의 이해관계 역시 이 판에 끼어들고 있음을 잊지 말자. 그들은 생태-상품투자호황에서 상당한 이윤을 뽑아내면서, 글로벌 기후 체제가 친기업·시장 중심 성격을 굳건히 유지하도록 하는 정치적 투자를 경제적 투자와 병행한다.

우리 시대의 생태정치는 획기적 [시대를 가르는] 위기 안에서, 이 위기의 표식이 선명히 찍힌채 펼쳐진다. 이는 물론 생태 위기이지만, 경제·사회·정치·공중보건의 위기이기도 하다. 즉, 기존 세계관과 지배 엘리트에 대한 신뢰를 뒤흔드는 전반적 위기로서 그 효과가 모든 곳으로 전이되는 위기다. 그 결과는 헤게모니의 위기이며, 공적 공간의 야만화다.

자본주의는 기후위기와 사회역사적 조종자이며, 따라서 기후위기를 중단시키기 위해 해체해야할 핵심적인 제도적 역학이다. 그러나 이렇게 정의된 자본주의는 계급 착취와 인종적-제국주의적 억압, 젠더·성적 지배에 이르는 외관상 비환경적인 사회 불의의 형태들과 깊이 중첩되기도 한다.

자본주의가 지구 온난화의 주된 사회역사적 조종자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는 어느 정도는경험적 주장이며, 인과 관계에 관한 진술이다. ‘인류세의 기후변화‘라는 통상적인 모호한 언급과 반대로, 자본주의를 지목하는 논의는 ‘인류 전체가 아니라 이윤을 좇는 기업가 계급에게책임을 묻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와 그 ‘타자‘ 사이에 수립된 관계(이것이 핵심적인 요소다)를 검토할수 있는 능력이며, 여기에는 ‘자연‘이라 알려진 핵심적 타자도 포함된다. 이 관계는 그 중심에서부터 모순적이며, 위기로 기우는 성향이 있다. 한편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의 경제는 자연에구성적으로 의존한다.

자본은 노동과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도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이 관계는 식인적이고 추출적인 관계다. 더 많은 ‘가치‘를 쌓아올리기 위해 더 많은 생물물리학적 부를 먹어 치우면서도 생태적 ‘외부성‘에 대한 책임은 부정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지구 온난화를 야기한 것은 인류 전체가 아니라 바로 이들 자본가들이며, 이는 우연이나 단순한 탐욕의 결과가 아니다. 아니, 자본가의 행동을 지배하고 이런 결과를 낳도록 만드는 역학은 자본주의 사회의 바로 그 구조 안에서 단단히 굳어진다.

자본주의 사회가 경제와 자연의 경계선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임부, ‘발전‘을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임무, 탄소 배출을 규제하거나 규제를 완화하는 임무를 맡기는 것은 국가다. 유독 폐기물을 어느 장소에 버릴지, 그 후과를 경감할지 말지, 경감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할지, 누구를 보호할지, 누가 피해를 입을지를 결정하는 것 역시 국가의 임무다.

자본주의의 생태적 모순은 이 시스템의 다른 구성적인 비합리성이나 불의와 깔끔하게 분리될수 없다. 환경만을 쟁점으로 삼는 환원론적 생태지상주의 시각으로 다른 모순들을 무시한다면, 자본주의의 독특한 제도적 구조를 놓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경제를 자연만이 아니라국가,돌봄,인종적·제국주의적 수탈과도 분리함으로써, 함께 상호작용하는 모순들의 얽힘을제도화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비판이론이 단일한 틀 안에서 동시에 추적해야 할 주제다.

일반적으로 중상주의적 자본주의는 주변부에서는 정복과 추출주의를 접합했고, 중심부에서는박탈과 근대 과학을 접합했다. 후세대의 시각에서 보면, 이 시기에 자본은 생명의 힘과 지식의 힘을 축적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 힘들은 나중에야 새로운 사회생태적 축적 체제가 도래하면서 그 생산적 잠재력이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자본주의 중심부의 화석 연료 기반 생산은 자유주의 식민주의 시기에 확장됐다. 그러나 구아노라는 잔꾀가 보여주듯이, 땅과 동물 근력에서 해방된 것 같은 외관은 허상이었다. 유럽, 북미,일본의 탈육체 에너지 산업화는 주변부에 육체 에너지에 바탕을 둔 추출주의의 감춰진 장소가 없었다면 존립할 수 없었다.

자유주의 식민주의적 자본주의의 최대 유산은 (환경주의가 아니라) 탈육체 에너지를 향한 경천동지할 치명적인 전환이었고, 이는 수억 년 동안 지구 표면 아래에 안전하게 격리돼 있던화석화된 탄소 비축분을 ‘해방시켰다. 지구 온난화를 초래한 이 유산은 그 다음의 국가-관리주의 시기에 이르러, 새로운 지구 패권국이 용의주도하게 엄청난 온실가스 배출을 추진함에따라 계승·확대됐다.

미국은 석유의 공급과 통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페르시아만과 라틴아메리카에서 숱한 쿠테타를 후원했으며, 이를 통해 석유 대기업과 과일 대기업의 이윤과 입지를 보장해 주었다.

국가-관리 자본주의가 발전하자 체제의 산업적 중핵을 공략하는 또 다른 환경주의가 알을 깨고 나왔다. 생물학자이자 환경보호론자인 레이첼 카슨의 1962년작 <침묵의 봄 SilentSpring>으로 불이 붙은 이 조류는 국가가 대기업발 공해를 줄이기 위해 해동에 나서도록 압박했다. 그 결과 환경보호국 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 EPA의 설립이었고, 이는사회적 재생산을 지원한 뉴딜 기관의 환경판이었다.

1970년에 창설된 EPA는 환경 문제를 국가 규제 대상으로 삼아 ‘외부성을 내부화함으로써‘시스템 위기를 진정시키려던, 국가-관리 체제의 마지막 주요 시도였다.

녹색자본주의는 자연 전체를 직접 상품화하지는 않더라도, 추상적인 경제화 논리에 종속시키려 한다. 이곳의 공장이 내뿜는 탄소를 다른 곳에 나무를 심음으로써 ‘상쇄할 수 있다는 생각은, 대체 가능하고 비교 가능한 단위로 구성된 자연을 전제한다. 여기에서 장소-특수성, 질적특성, 체험으로 형성된 의미 따위는 무시해도 된다.

화학적 오염 대신 지구 온난화가 핵심 쟁점으로장이 신뢰할 만한 규제 기제의 자리를 차지하게이 생태-거버넌스의 사랑받는 무대가 되었다.
부상하자, 국가 강제력 대신 탄소 배출권 시됐다. 아울러 일국적 차원 대신 국제적 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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