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사회주의자나 노동조합 운동가, 그 밖의 노동 투쟁 지지자들에게 친숙한 두 번째 시각은자본주의의 요체를 좀 더 심층에 있는, 상품 생산에서 벌어지는 임금노동 ‘착취‘에서 찾는다.
그리고 제국주의 비판을 통해 발전한 세 번째 시각은 피지배 민족에 대한 자본의 ‘수탈‘을 부각시킨다.

마르크스가 자본의 임금노동 착취 과정에만 너무 집중했기에 착취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또다른 근본적인 과정을 체계적으로 숙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증명되기만 한다면 인종적억압과 뿌리 깊이 연결돼 있음이 드러날 수 있는 이러한 과정으로 두 가지가 떠오른다.

첫 번째는 자유롭지 못하고 종속적인 비임금 노동이 자본 축적에서 맡는 결정적인 역할인데이러한 노동은 착취와는 대척점에 있는 수탈의 대상이 되며 임금 계약을 통해 매개되지 않지배 아래에 놓인다.

두 번째는 자유로운 개인과 시민에게는 ‘노동자‘ 지위를 부여하면서 다른 이들은 그보다 취한 존재로 구성하는 정치 질서의 역할과 관련된다. 예를 들어 동산 노예, 연기 계약을 맺하인, 식민지 예속민, ‘국내 종속국‘의 원주민, 부채 노예, 불법 체류자와 중죄인 등의 존재들 수 있다.

내 주장은 수탈이 자본주의 사회에 실로 필수 불가결하며, 따라서 자본주의와 인종주의의힘에도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간단히 말해 자본의 수탈 대상이 되이들의 예속은 착취 대상이 되는 이들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감춰진 조건이다. 그러므로자에 대한 설명이 없다면 후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자본이 인종화된 수탈에 계속 의존하는 데는 구조적 이유가 있다. 무한한 확장과 잉여가치의사적 전유에 골몰하는 본성을 가진 자본주의 시스템은, 자본 소유주가 종속적 인구집단으로부터 노동과 생산수단을 징발할 뿌리 깊은 이해관계를 갖도록 만든다.

나의 명제는 자본주의의 인종화 역학이 착취 대상인 자유로운 주체들과 수탈 대상인 종속적주체들을 구별하는 구조적 토대를 갖춘 표식에 응축돼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전개하려면이제 초점을 ‘경제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옮겨야 한다. 오직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질서를 주제로 삼을 경우에만 이 구별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인종‘의 짜임새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장인, 소농,소작농은 계급 타협의 역사적 과정을통해 피착취 시면-노동자가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해방 투쟁은 국민국가의 자유주의적인 법률적 틀 안에서 자본의 이해와 수렴하도록 유도됐다.

착취는 유럽 중심부에 집중되어(백인 남성)‘노동 귀족‘몫으로 점지된 반면에, 수탈은 주로주변부에 자리를 잡고 유색인에게 강요되었다. 그러나 또 어떤 국면에서는 이 분리가 모호해졌다. 이러한 변천에 따라 주기적으로 자본주의 사회 내의 인종적 억압 역학이 형태를 바꾸었다.

유럽 국가들이 해외 식민 지배를 강화하는 동안에 미합중국은 국내에서 선주민의 자산을 박탈하고 ‘국내 식민지‘를 영구화했다. 처음에는 인종화된 노예제를 확대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노예제 폐지 이후에는 물납 소작제를 통해 해방 노예를 부채 노예로 전락시키는 방식으로 말이다.

새로운 요소는 대규모 공장에 바탕을 둔 제조업의 등장이었다. 이는 마르크스가 머릿속에 그린 프롤레타리아트를 단련시켜 전통적 생활 형태를 전복하고 광범위한 계급 갈등에 불을 댕겼다. 결국 식민 본국의 민주화 투쟁을 통해 피착취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순응하는 형태의 시민권을 획득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반식민 투쟁에 대한 잔혹한 억압을 통해 주변부의 굴종이 확히 지속되었다.

자본주의 중심부에 새로 수립된 복지국가는 시민-노동자 지위에 상징적·물질적 가치를 덧붙여주었으며, 이에 따라 보호와 이익을 요구할 능력이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확장해주었다. 복지국가는 노동권, 코퍼러티즘적 협상[노사정 협상], 사회보험을 제도화함으로써 축적을 안정시켜자본에게 이익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착취만 받는 노동자를 정치적으로 흡수했다.

‘금융화된 자본주의‘라 부르는 이 국면은 새롭고 독특한 수탈/착취 결합체에 토대를 두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수탈과 착취의 지리학과 인구학에도 극적인 변동이 있었다. 이제 대규모산업 착취의 다수는 역사적 중심부 바깥, 한때 반주변부를 이루었던 이른바 브릭스BRICS 국가들에서 발생한다.

현 체제는 거의 모든 무자산 상태의 성인을 임금노동에 징용하면서도, 압도적 다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재생산 비용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다. 공적 지원을 해체해 ‘사회임금‘을 줄이는바람에 막대한 수의 무자산 대중이 부채의 마수에 얽혀 든다. 금융화된 자본주의는 이 불안정성을 보편화함으로써 거의 모든 이들을 착취하면서 동시에 수탈한다.

객관적으로 보면, 금융화된 자본주의는 과거 인종주의를 뒷받침했던 수탈/착취의 상호 분리를완화시켰다. 하지만 주체의 측면에서 보면, 실제로는 새로운 형세배열이 인종적 적대를 악화시킬 수도 있다.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말이다. 수백 년간 이어진 인종화된 낙인과 폭력이 착취와 수탈의 대상을 찾는 자본의 걸신들린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한, 불안정과 광기는 강화되고, 안전을 확보하려는 쟁탈전은 더욱 치열해지며, 인종주의는 더 악화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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