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가미야라면 가족이나 나 이상으로 마오리를 도와줄 수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가미야는 지금까지 마오리의 일상을 뒷받침해주었을 뿐 아니라 일상에 변화를 주기도 했다. 여름방학중에도 거의 날마다 만났다고 들었다. 마오리에게 그림을그리도록 권한 사람도 가미야였다. 마오리의 뇌에 기억이 축적되지 않아도 신체감각으로남는 게 있다. - P274

기억은 축적되지 않을 텐데도 마오리는 전보다 빨리가미야와의 관계에 익숙해져 웃음을 주고받는 것처럼 보였다.
이 두 사람은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지낼까.
가끔 살짝 부러운 생각이 드는 것은 비밀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시간과 더불어 현실이 되어갔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 뒤로도 변함없이 계속됐다.
체육대회와 학교 축제가 열려도가을이 와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해도두 사람은 계속 사귀는 사이로 남았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나는 그런 두 사람을 가까이에서바라봤다. - P278

3학년으로 올라가면 나와 마오리는 다른 반이 될 것이다. 마오리가 특별반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봄방학이 되기 전에 가미야와 함께 학생주임 선생님과상의해 마오리가 가미야와 같은 반이 될 수 있게 했다.
실제로 4월이 되자 나와 마오리는 각기 다른 교실에서학교생활을 하게 됐다. - P285

대학 입시의 승패를 결정하는 여름이 오더니 연필을 놀리는 사이에 가을이 찾아왔다. 수능을 볼 겨울이 닥쳐오고그게 끝나면 가장 중요한 2차 시험이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봄이 되어 있었다.
길고도 짧았던 고등학교 3년이 끝났다.
우리는 무사히 고등학교 졸업식을 맞이할 수 있었다.
셋이 함께. - P286

졸업식 날, 마오리는 놀라면서 "믿기지 않아"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믿기지 않아‘는 세월이 흐른 것이 아니라 그런 상태에서도 자신이 학교를 계속 다녀 졸업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었다. - P287

고등학교 2학년 4월 말부터 약 3년 동안 기억장애가 있었다.
잠을 자서 뇌가 기억을 정리하기 시작하면 그날 하루의기억이 축적되지 않은 채 지워지는 특수한 기억장애다. 나말고도 비슷한 사례가 더 있는 모양인데, 치료 방법이 없어 인간이 갖는 자연 치유력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자연 치유력은 젊을수록 효과도 좋아서 나는 약석달 전 4월에 장애를 극복했다.
전날 있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었다. - P293

기억장애를 가지고 있던 나는 정보성 기억은 축적할 수없지만 ‘절차 기억‘이라고 부르는 신체감각에 근거하는 기억은 축적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건 그림을 그리는 기술에도 해당돼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가끔 이즈미를 만나 노는 한편 하루의 태반을크로키북과 함께 보냈다고 한다.
장애에서 회복되기 전날에도 일기 등을 읽은 뒤로는 그림을 그리면서 보냈다. - P294

"엄마, 기억장애란 게 아침이 돼서도 얼마 동안은 기억이 나는 거야? 어제 일이…… 똑똑히 기억나는데."
그렇게 말하자 어머니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대답하지못했다.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부랴부랴아버지를 불렀다. 나는 혼란에 빠진채전날 있었던 일을하나하나 기억해냈다.
아버지가 오고 나서 셋이 함께 전날 있었던 일을 확인했다. 내 기억은 정상이었다. - P296

아까 읽은 것은 고등학교 때 일기인데, 이즈미가 자전거 뒤에 나를 태우고 시골길을 달리는 내용이었다. 뭐랄까, 여자들의 청춘 같다.
이즈미 덕분에 날마다 즐겁게 지냈나 보다. 이즈미는대체 사람이 얼마나 착한 걸까. 응석이나 다름없는 내 말을 매일 들어주었다.
고등학교 때 썼던 스마트폰은 망가졌다고 해서 애석하게도 당시 사진과 동영상은 확인할 수 없다. 그래도 노트북의 일기는 잘 남아 있었다. - P299

전에는 미술 학원에 다녔던 모양인데 나는 미대에 갈 실력은 없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림 그리는 게 내 기쁨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다가 가을이 깊어지기 시작한 어느 일요일 아침, 방에서 처음 보는 크로키북을 발견했다.
책꽂이 뒤에 마치 숨겨둔 것처럼 놓여 있었다. - P300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어제도 가미야는 도서관에서 마오리를 만났다. 그 뒤자전거를 타고 집에 오는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상하다고 생각해 자전거를 인도 곁에 세우고 진정하려 했는데 다리 힘이 풀렸다. 자전거 짐받이를 손으로 짚으려다 자전거와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 가미야는 병원에 있었다.
지나가다가 가미야가 쓰러지는 것을 본 사람이 구급차를 불렀다고 했다. - P303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가미야가 미소를 지었다.
시간을 확인하고는 "그만 가야겠다. 그럼 다음에 또 봐"라말하고 떠났다.
내 안에 희미한 웃음만을 남기고,
가미야 도루가 심장 돌연사로 죽은 것은 그다음 날 밤이었다. - P308

가미야는 누나에게 마오리의 기억장애에 관해 이야기했던 것이다. 가족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오리는 가미야가 마오리의 기억장애를 알고있었다는 것을 모른다.
내가 대꾸하지 못하자 누나가 말을 이었다.
"미안해.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도루는 네병을 안다는 걸 감추고 있었구나."
HONLA
"저, 전… 그 애한테 병 이야기를 안 했는데요. 그, 그런데 어떻게. - P317

나는 그저 가미야의 누나 말을 잠자코 들었다.
"살아야 하는 생을 사는 게 우리 인간의 참된 모습이라면 마오리가 괴로워하면서 사는 것도, 우리가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 사는 것도, 둘 다 올바른 모습이라고 난 믿어. 다만.……… 와타야, 도루는 선택을 너한테 맡겼어. 그러니까 네가 정하렴. 그러고 싶은지, 그러고 싶지 않은지, 그것만 기준으로 해서. 난 네 판단을 따를게. 만약 너 혼자 정할 수 없다면 날 이유로 삼아 그게 도루의 유지라면 난 이뤄주고 싶어. 그렇지만......."
가미야의 누나는 머리를 수그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 P321

마오리의 진짜 일기와 파일에 옮긴 일기를 비교하며 읽었다.
어느 일기에도, 어느 페이지에도 마오리와 가미야의 기억이 있었다.
두 사람은 즐겁게 웃고 있었다. 그 광경이 일기에서 생생하게 보이는 듯했다.
그렇게 가미야는・・・・・・ 아니, 도루는 마오리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또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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