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교가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서 순종하면 살 수 있었던, 대미 편향 외교를 지향하는 시대는 끝나간다고 봐야 한다. 갑자기 미국과의 관계를 약화시키면서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쪽으로 가자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미국과 떨어지려고 해도 떨어질 수 없다. 하지만 국제질서의 격변기를 앞둔 이 시점에 중국 중심의 아시아 국제질서가 무너지던 19세기 말 조선과 일본이 어떠했는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결국 이런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지정학적으로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지 북한과의 관계를 평화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따르면 미국과 한목소리만 내서는 남북 간의 평화적관계를 만들 수 없다. 때로는 미국과 불편해지더라도 일단 남북관계부터 안정적으로 정착시키려는 노력을 해야한다.

미국은 지소미아를 통해 한국과 일본을 군사정보를 공유하는 한 그룹으로 묶어놓고 미국의 필요에 따라때로는 일본을 쓰고 때로는 한국을 쓰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박근혜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까지 미국이 지시하는 대로 따랐다. 당시 미국은 행패를 부린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한국을 완전히 마음대로 좌지우지했다.

미국이 사드 배치를 요구했더라도 탐지 거리 2천 킬로미터짜리 엑스밴드 레이더를 가진 사드 포대가 대북용이라는 핑계는 웬만한 국민들은 안 믿는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면서 어떻게 해보라고 해야지 이런 억지로어떻게 국민을 설득하나. 그런 식으로는 설명 못 한다‘ 하고 버텼으면 미국도 밀어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광해군은 후금, 명나라 모두와 외교관계를 맺으려 했고, 임금이 되어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런 점에서 광해군은 동아시아 세력 판도의 변화를 감지하면서 국제정세를 널리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국가지도자였다. 광해군의 광자를 빛 광이 아니라 넓을 광‘으로 고치면 더 어울릴 만큼말이다. 그러자 명나라 지상주의자들이 그를 몰아냈다. 재조지은을 잊고, 명나라를 섬겨야 하는 조선의 도리를어기고, 명나라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야만의 후금과 관계를 맺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이 광해군을 폐위시킨가장 큰 이유였다. 임금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로 나가니까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권력을 뺏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 뒤를 이은 인조의 조선은 정묘호란(1627)을 겪고는 명나라와 거리를 두었고, 병자호란을 당해서는 ‘삼전도의 굴욕적 항복‘을 한 후 후금에서 국호를 바꾼 청나라의 군신관계로 통교했다.

광해군 때 친명 입장이었던 신하들이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 반정을 일으킨 것도 국내 정치 때문에국제정치가 수단으로 이용된 경우다. 사드 배치는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려는 계산에서 시작된 것이고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을 감소시킨다는 말은 핑계였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그 말에 속아서, 사드 배치가 애국인 줄 알고 받아들였던 거다.

보수주의자들은 북한이 핵무기를 만든 게 무조건 진보 정권 탓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지금까지 핵실험을 여섯 번 했는데, 그중 네 번을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 동안에 벌였다. 그때 남북 대화가 일체없었다. 판문점에서 잠깐 만나기는 했지만 아주 짧아서 후속 회담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한편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 중에 8년은 오바마 정부 집권 시기였다.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은 ‘전략적 인내‘였다. 인내심도 전략이라고 하는 말은 처음 들어봤는데, 이 말의 뜻은 북한이 핵을 포기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전략을쓰겠다.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겠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물실호기勿失好機라고 여겼는지 그 기간 동안핵실험을 네 번이나 했다.

오바마 정권이 출범한 직후인 2009년 2월 13일에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아시아소사이어티 초청 연설에서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북한의 비핵화와 북미 수교, 그리고 경제협력 이 셋을 하나로 묶어서 일괄타결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로 오바마 정부도 초기에는 북미관계 개선과 경제 지원 그리고 비핵화를
‘하나로 묶는다는 ‘9.19 공동성명‘의 프레임 안에서 북한 문제를 풀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재확인한 거다. 부시정부 때 체결된 공동성명이지만 합리적이고 유일한 해결 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비핵개방3000‘을 내세우자 미국의 구상은 메아리 없는 광야의 나팔이 돼버렸다.

정리하자면 BDA 사건이 2006년 10월 9일 1차 북핵실험을 만든바, 그건 미국 때문이다. 2009년 5월 25일 2차 북핵실험은 부시 정부 때 만들어진 ‘2.13 합의‘를 이행하지 않은 한국의 이명박 정부와 미국의 오바마정부 때문이다. 이후 북한은 2013년 2월 12일에 3차 핵실험, 2016년 1월 6일에 4차 핵실험, 2016년 9월 9일에 5차 핵실험을 했다. 우리 쪽에서는 오바마 정부가 민주당 정권이기 때문에 좀 기대를 걸었는데 오히려 ‘전략적 인내‘라는 말도 안 되는 전략을 내세우면서 북한의 핵 개발을 방관했다.

북한이 미사일과 핵능력을 지속적으로 고도화하면 결국 언젠가는 미국이 다급해져 협상을 시작할 때가 올테고, 그때 북한의 몸값은 크게 올라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많은 걸 받아낼 수 있다고믿을 거다. 오히려 북한은 미국의 압박을 역이용하려고 한다. 지금은 핵 개발이 미국 압박에 대응하는 자위 수단을 키우는 차원이지만 나중에 협상력을 키우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미국이 그런 계산을 못 하고 북한에제재 압박만 계속하면서 핵을 포기하기를 기다린다면, 언젠가는 북한도 미국과의 협상은 포기하고 핵무기와 미사일을 미국과 사이가 나쁜 나라들에게 팔려고 할 거다. 그러면 본격적인 핵 확산이 시작되는 셈이고, 핵 비확산의 책임을 지고 있다는 미국 입장에서는 완전히 따귀 맞는 거다. 미국의 실리뿐 아니라 명예도 실추되기 십상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핵 확산을 막겠다며 동분서주해야 할 거다. 미국이 계속 게으름을 부린다면 아마 ‘호미로 막을 일을 이제 가래로도 막을 수 없게 됐구나 한탄할 때가 오지 않을까 싶다.

외교와 국제 협상의 기본은 상호주의다. 일방적 약속은 패전국이나 한다. 북한은 패전국이 아니다. 북미관계도 일방적일 수 없다. 그러므로 ‘비핵화, 핵실험과 ICM 발사 않기‘를 지키게 하려면 미국의 상응 조치가 있어야 한다. 북한은 미국에 절대 숙이고 들어가지 않을 거다. 약자이기 때문이다. 약자니까 숙이고 들어가면 짓밝힌다는 피해의식이 있다. 그래서 매번 동시 행동, 일대일 상호주의를 요구한다.

미국은 1993년 3월 북핵 문제 발생 이후 일관되게 북한의 비핵화가 먼저라고 주장해 왔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나서 ‘한반도의 비핵화‘ 라는 표현을 쓴 걸 보고서는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미국 실무자들은 겁이 났을 거다. 실무자들 입장에서 볼 때는 종전선언까지 약속하는 트럼프 대통령한테 이 문제를 맡겨뒀다가는 미국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가 다 무너져 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무너지더라도서서히 무너져야 준비라도 하는데 갑자기 무너지게 생긴 거다. 미국 경제는 무기 수출로 유지된다. 군산복합체에 생산품과 양을 배분하는 것이 미국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결국 2018년 11월 20일 ‘한미워킹그룹‘을 만든 이후 남북 합의사항은 하나도 이행하지 못했다. 미국은 심지어 합의 사항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남북 간 의약품 수송도 막았다. 2019년 1월 북한에 독감이 유행하자 우리 정부는 독감 약 타미플루를 보내려고 했는데 미국이 약을 싣고 가는 트럭을 문제 삼았다. 약만 주고 돌아오는데도 수입 금지 품목인 트럭이 북한에 들어가면 안 된다며 막았다. 결국 독감 약을 북한에 보내지 못했다. 미국이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것이다. 협상 용어로 ‘원칙의 굴레‘를 쓰면 이렇게 되는데, 문재인 정부의 한미관계당국자들이 그걸 몰랐다.

‘한미공조‘라는 원칙의 굴레로 고통스러운 경험을 해본 사람은 그때로부터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2018년 어간에 우리 외교부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정년퇴직이다 이직이다 해서 후배들에게 경험을 전해줄 수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미국 국무부가 북핵 문제를 빨리 잘 풀어나가기 위해서 한미의 실무자급 ‘한미워킹그룹‘을 만들자고 했을 때 의심하기보다는 좋은 뜻으로 받아들였을 거다. 나중에 역사가들이 정리한 기록은 어딘가에 남겠지만 현장의 관리들은 매일 소화해야 하는 일정에 바빠 역사적 사실들을 살펴볼 겨를이 없다. 미국은이런 과거의 경험들을 싱크탱크를 통해 계속 축적하고 활용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역할을 하는 조직이 없다.

미국한테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한미동맹을 강화한다고 하면 미국은 틀림없이 한일관계부터 복원하라고할 거다. 미국이 우리에게 삼각동맹을 들이미는 논리는 이렇다. ‘미국 중심 질서가 중국 중심 질서보다 낫지 않나,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중국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이때 한국이 일본과 싸우면 되나. 과거사 문제는 일단해결됐다고 치고 한미일 삼각동맹으로 중국을 압박하자.‘ 그런데 미국의 본심은 중국을 압박해야 하는데 힘이예전 같지 않아 부족하니 일본의 힘을 빌려야겠고, 필요하다면 만만치 않게 힘이 커진 한국도 끌어들이겠다는거다. 그러니 우리는 일본 밑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미동맹을 강화하든지 외교를 하든지 하라는 거다. 지금 미국에게 한국은 일본 밑이다. 한미동맹은 절대로 미일동맹 위로 못 올라간다. 미일동맹이 훨씬 더 긴밀한 관계이기 때문에 한일 간의 문제에서 미국은 무조건 일본을 챙기게 돼 있다. 그렇기에 일본은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에서 우리의 요구를 무력화하는 데 미국의 힘을 빌려 쓰고 있다.

북한은 우리 한국이 뭘 해주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겠다는 게 아니다. 미국이 수교를 약속하고 군사적으로 치지 않겠다는 평화협정을 체결해 주는 한편 미국의 영토에 북한의 대사관을, 북한의 영토에 미국의 대사관을 설립해야 핵과 미사일을 내려놓겠다는 거다. 우리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미국만 믿고 있을수도 없다. 미국과 북한의 협상이 지지부진한 채 시간이 흘러 북한이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돼버린 상황에도 대응할 전략이 있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