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면서 같은 학교 여자애를 좋아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시스터 콤플렉스라, 어머니처럼 따르던 누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아버지와 둘이 살아갈 줄 알았다. 그게 내 인생이라고 믿었다. 가정 사정으로 대학에는 가지 않고 취직하기로 결정했다. 지금 반에 배정된 것도 이런 진로 희망과 관계가 있을것이다. 걸어갈 인생이 다르다는 이유에서는 아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온 뒤로도 같은 학년 여자애를 의식해본 적이 없다. 그건 히노 마오리라는 아까 그 여자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 P16
시모카와는 약간 비만이라 놀림을 당하기도 하지만 심성이 착하다. 하지만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시모카와는 사려분별이 없는 인간들에게 이따금 업신여김을 당하고 스트레스를 푸는 도구로 이용됐다. 괴롭힘을 당했던 것 역시마찬가지다. 괴롭히던 녀석들에게 항의한 뒤 내가 대신 표적이 됐다. 주위 인간들은 내게 말을 걸지 않게 됐지만 시모카와는걱정이 됐는지 종종 말을 붙였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없어지는 것도, 유치한 괴롭힘을 당하는 것도 아무렇지 않았다. - P27
"그렇구나. 고마워. 또 가미야 너한테 도움을 받았네. 아, 그렇지만...…." 시모카와는 말을 멈추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아니, 저.....… 걔들이 그런다고 포기할 녀석들인가 싶어서. 내가 전학 가고 없으면 널 또 괴롭히지 않을까." 괴롭힘이 원인이 아니면 좋겠는데, 시모카와는 부모님의 사정으로 갑자기 중국에 가게 됐다. - P28
결심이 선 나는 어제 고백에 관해 이야기했다. 기분이상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히노는 딱히 놀라지도 않고마지막에 가서는 즐겁게 웃고 있었다. "저런, 그런 거였구나. 벌칙 게임이나 뭐 그런 거겠지 생각은 했지만, 반에서 괴롭힘당하는 애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단 말이지. 멋있네." "아니,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고, 그저 나 같은 인간하고도 친구 해주는 좋은 녀석이거든. 불쾌한 일을 당해서고개를 푹 숙이지 않았으면 했어. 좀 있으면 전학 갈 거고말이지." - P34
"이상한 게 아니지. 너한테 여자친구가 생긴 건 너희 어머니한테 보고해야 할 좋은 소식이잖냐. 게다가 사나에가 있었으면 분명히 ・・・・・・ 어, 음." 자기가 누나 말을 꺼내놓고 자기가 주춤했다. 켕기는 데가 있어서 그럴 것이다. 말은 하지 않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능력이 없어서 딸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부분이 있었다. - P41
"배짱도 행동력도 없는 시모카와가 일러바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지. 진짜 웃기는 일이지. 학생 지도 녀석이 이제 와서 이야기한 이유를 물었더니 시모카와가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냐? 자기는 상관없지만 자기가 가고 나서 만에 하나라도 우리가 너나 다른 녀석한테 돈을 뜯지나않을까 걱정돼서 용기 내 이야기했다더라." - P48
"뭐?" 와타야의 얼굴에 놀란 빛이 번졌다. "니시카와 게이코? 웬 마니악? 그리고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그 잡지, <문예계>지? 가미야, 문학소년이니?" 그러고는 내가 펴놓고 있던 잡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문예계>는 일본을 대표하는 순수문학 잡지 중 하나인데, 여기에 실린 신인 작가의 작품은 유명한 아쿠타가와상의 심사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내가 좋아한다고 한 니시카와 게이코의 작품도 이 잡지실리곤 하는데, 설마 니시카와 게이코나 이 잡지를 아는 동급생이 있을 줄은 몰랐다. - P53
사람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들여다볼 수도 없다. 히노는 티 없이, 즐겁게 웃고 있었다. - P69
나는 단순히 히노의 외모에 끌리는 걸까. 지금까지 여자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냥 착각하는 걸까.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히노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늘 웃는 얼굴을 보이는히노가 그 뒤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 P70
시모카와 이야기는 이미 히노에게 한 적 있었다. 원래는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는데 시모카와가사양했다. 이유를 묻자 소중한 사람이 늘면 작별이 더 힘들게 느껴질 것 같아서라고 했다. "지금은 히노랑 보내는 시간을 우선해줘 난 이미 충분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온화하게 미소 짓던 그는 내게 몇 안 되는 소중한 친구 중 하나다 - P74
스스로가 꼭 이야기 속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았다. 기묘한 인연으로 옆에 있는 애와 이어졌다. 우리는 결코 서로좋아하는 사이가 아닌데, 그래도 휴일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고마웠다. 기뻤다. - P83
"나 말이지...……." 또 바람이 불었다. 히노의 긴 머리를 바람이 채가려 했다. "병이 있어.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란 건데. 밤에 자고 나면 잊어버리거든. 그날 있었던 일을 전부." 바람에 뒤섞여서 그런지 그 애의 목소리가 내게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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