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음식 천국이 되었다. 런던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새벽 1시에 거리에 세워진 밴에서 사 먹는 값싸면서도 훌륭한 튀르키예식 되네르 케밥döner kebap(회전 구이 케밥)에서부터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비싼 일본식 가이세키 (연회용 코스 요리)에 이르기까지 상상하는 모든 것이 다 있다. 강렬하고 대담한 한국식요리에서부터 요란하지 않지만 배 속까지 뜨끈하게 데워 주는 폴란드식까지 맛도 무궁무진하게 다양하다. 이베리아반도, 아시아, 잉카 문화를 모두 포용한 섬세하고 복잡다단한 페루식 요리에서부터 단순하면서도 풍부한 맛을 뽐내는 아르헨티나 스테이크 사이에 존재하는 갖가지 음식 중에서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 대부분의 마트와 식료품점에서는 이탈리아, 멕시코, 프랑스, 중국, 카리브해 연안국, 유대 지역, 그리스, 인도, 태국, 북아프리카, 일본, 튀르키예, 폴란드 재료를 구할 수 있고, 심지어 한국식 재료도 가끔 눈에 띈다. 특화된조미료나 재료도 잘 찾으면 손에 넣을 수 있는 확률이 높다. 1970년대 말에 교환 학생으로 옥스퍼드에 와있던 미국인 친구가 올리브유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약국뿐이었다던(궁금한 독자를 위해 부연 설명하자면약국에서는 귀지를 녹여서 제거하는 용도로 올리브유를 판다) 바로 그 나라와 지금 이 나라가 같은 나라라니 믿어지는가?

내 음식의 우주는 빛의 속도로 확장되고 있었지만 내가 속한 다른 우주인 경제학 분야는 슬프게도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경제학은 서로 다른 비전과 연구 방법을 자랑하는 다양한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이 활동하는 분야였다. 가장 굵직한 학파만 해도 고전학파classical, 마르크스주의 Maxism, 신고전학파Neoclassical, 케인스학파Keynesian, 개발주의 Developmentalism, 오스트리아학파Austrian, 슘페터학파Schumpeterian, 제도주의 Institutionalism, 행동주의 Behaviorism 등 다양했다. 이 수많은 학파의 경제학자들은 서로 공존했을 뿐 아니라 상호 교류를 하기도 했다. 어떨 때는 1920 년대와 1930년대의 오스트리아학파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 그리고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케인스학파와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이 그랬듯목숨을 걸고 서로 죽일 듯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학파 간의 상호 교류가 더 점잖게 이루어진 경우도많았다. 각 학파는 활발한 토론뿐 아니라 세계 각국 정부가 시행한 정책 실험을 통해 자신들의 논점을 갈고닦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학파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하기도 했고 (많은 경우 제대로 인정하지 않은 채, 서로 다른 이론들을 융합하는 시도가 학계 일부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1970년대까지의 경제학 분야는 서로 다른장단점을 가진 수없이 다양한 음식 문화가 공존하며 경쟁을 벌이는 요즘의 영국 음식 분야와 닮은 데가 많았다. 모두 각자의 전통에 긍지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 배우지 않을 수가 없고, 그 과정에서 의도하는 하지 않는크고 작은 융합이 많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모두는 경제학 이론이 세금, 복지 지출, 이자율(금리), 노동 시장 규제 등의 정부 정책에 영향을 주고, 이런 정책은 우리 일자리와 노동 환경, 임금, 주택 담보 대출과 학자금 대출 상환금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경제학 이론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고생산성 산업을 발전시키고 혁신을 꾀하고, 지속가능한 친환경적인 개발을 가능케 하는 정책 수립에 영향을 끼쳐 그 경제 체제의 장기적 - 집단적 발전가능성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게 다가 아니다. 경제학은 개인적이건 집단적이건 경제적 변수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 다시 말해 우리 자신에 대한 규정 자체를 변화시킨다.

경제학은 또 경제가 발달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며, 그에 따라 우리가 생활하고 일하는 방식에 영향을주고, 그 결과 우리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개발도상국이 공공정책 개입을 통해 산업화를 촉진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아닌지에 대해 경제학 이론마다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한 나라의산업화 정도는 다른 유형의 개인을 만들어 낸다. 가령 더 산업화된 나라 사람들은 농업 사회 사람들에 비해시간을 더 잘 지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하는 일이-그리고 거기에 따라 나머지 일상도-시계에 따라 조직되기 때문이다. 산업화가 진행되면 노조 운동도 촉진되는데 공장 에서는 다수의 노동자가 한데 모여 일을하고, 농장 같은 환경보다 다른 사람과의 협조가 훨씬 더 잘 이루어져야 작업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노조 운동은 결과적으로 평등주의적 정책을 추진하는 중도좌파 정당을 낳는데, 이런 정치 세력은 공장이사라져도 약화는 될지언정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지난 몇십 년 사이 부자 나라들에서 목격된 현상이었다.

햄은 스페인 문화의 심장이다. 스페인 말고 어느 나라에서 〈햄 햄>(하비에르 바르뎀도 출연했지만 페넬로페크루스의 데뷔 영화로 더 인상 깊은 <하몽 하몽 Jamón Jamon)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나오겠는가?(햄을 뜻하는 스페인어Jamón을 한국에서는 보통 ‘하몽‘이라 하지만 ‘하몬‘이 맞는 발음이다-옮긴이) 기독교가 이베리아반도 대부분을 다스리던 이슬람 세력과 전쟁을 벌여 기독교도의 스페인을 세우는 과정에서 햄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돼지고기를 먹는지 안 먹는지는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를 구분하는 중요한 차이였고, 돼지고기는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상징하게 되었다.

스페인에 살면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유대인도 기독교가 다시 세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큰 고통을겪었다. 1391년 성난 폭도로 변한 기독교인의 위협에서 목숨을 건지기 위해 많은 수의 유대교인이 기독교로 강제 개종했다. 교회는 이들이 진심으로 개종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돼지고기를 강제로 먹도록 했다. 콘베르소converso라고 부르는 이 유대교인 출신 개종자 중 일부는 비밀리에 유대 교리를 계속 따르면서, 돼지고기와 조개류를 조리하지 않고 유제품과 고기를 섞지 않는 등 유대교의 의식과 명절에서 핵심적인 요소들을 지켜 나갔다.

오스만제국에서는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유대교인도 세금만 더 내면종교의 자유를 누렸고, 원하는 방식으로 공동체를 운영할 수 있는 자율권이 주어졌다. 유대교인은 제국의 거의 모든 직종에 종사했다. 궁정 고문, 외교관, 상인, 제조업자, 짐꾼, 석공 등 종교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은없었다.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종교적 편협성은 이슬람교의 본질과 전혀 관련이 없다.

이슬람 문화에 관한 다른 부정적인 고정 관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 수있다. 많은 사람이 이슬람교를 군국주의적 종교라 생각하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도 그런 견해를 부추겨 왔다. 지하드jihad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가 널리 퍼진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이교도와 벌이는 전쟁이란 의미로 알려진 지하드는 원래 가치 있는 목표를 위해 지난한 노력을 한다는 뜻이다. 이슬람 교리 중에는군국주의적인 해석을 가능케 하는 부분도 있고,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리도 있다. 후자는 "순교자의피보다 학자의 먹물이 더 숭고하다"라고 강조한 선지자 마호메트(무함마드)의 말에 그대로 담겨 있다. 사실이슬람 학자들이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고전을 아랍어로 번역해서 보존하지 않았으면 후에 이를 유럽어로 번역하면서 일어난 르네상스 운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이전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쓰인 문헌을 이교도적이라 선언하고 방치하거나 심지어 적극적으로 파괴해 버렸다.

동아시아의 ‘경제 기적‘이 근면, 절약, 교육을 강조한다고 알려진 유교 문화 덕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어느 문화에서 이런 덕목을 강조하지 않는가? 예를 들어 1960년대 초 비슷한 경제 개발단계에 있던 한국과 가나(사실 당시 한국이 가나보다 훨씬 더 가난했다. 1961년 한국의 1인당 평균 소득은 93달러였던데 반해 가나는 190달러였다)의 운명이 갈린 원인을 설명하면서 논란의 여지가 많은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
lizations》의 저자인 저명한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은 이렇게 주장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수많은 요소가 작용했지만 문화가 큰 부분을 차지했다. 한국은 절약과 투자, 근면, 교육, 조직과 규율을 중요시하는 나라다. 가나 문화는 이와 다른 가치 체계를 지니고 있다. 요컨대 문화가 중요하다."헌팅턴이 유교 문화를 묘사하는 이 부분은 긍정적인 문화적 고정 관념의 완벽한 예다. 자기가 원하는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어떤 문화의 특정 부분만을 골라서 강조한 것이다.

유교 문화권에서 교육을 중요시한다는 평판도 그렇다. 전통적으로 중요시된 교육은 관료가 되는 시험, 이른바 과거에 필요한 분야인 정치 철학과 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경제 발전에 직접 활용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농업을 제외하고 물건을 만들거나 사고파는 등의 실용적인 일들은 경시되었다.

헌팅턴과 같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유교 문화에 대한 긍정적 고정관념을 더해체할 수도 있지만 내가말하려는 의도는 이미 전달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이슬람 문화에 대해 완벽하게 긍정적인 고정 관념을 만드는 일만큼이나 유교 문화에 대해 완벽하게 부정적인 고정 관념을 만드는 일도 가능하다. 문화라는 것은 다양하고 복잡한 측면들을 가지고 있다. 다른 종교에 관용적이고, 규칙을 근간으로 하며, 과학을 중시하고, 상업 정신을 갖춘 버전의 이슬람 문화도 실제로 존재하는 모습이고, 현세에 관심이 없고, 비관용적이며, 군국주의적인 버전의 이슬람 문화도 실제로 존재하는 모습이다. 근면하고, 교육을 중시하고, 절약 정신과 규율을중시하는 버전의 유교 문화도 있지만, 구성원에게 근면성을 함양하지 못하고, 계층 이동을 제한하며, 상업과공업을 경시하고, 창의성을 억누르는 버전의 유교 문화도 있다. 한 사회가 주어진 문화적 재료로 무엇을 만들어 내는가는 많은 부분 선택의 문제며, 따라서 정책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문화가 사람들의 가치관과 행동에 영향을 주고, 따라서 그 나라의 경제가 조직되고 발전하는 양상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그러나 문화가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는흔히 통용되는 단순한 고정 관념으로 설명할 수 없다. 모든 문화는 복합적이고 끊임없이 진화하는 다양한 부면을 지니고 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개인의 경제적 행동과 국가의 경제적 성과를 결정하는 데서 문화는정책에 비해 그 영향력이 훨씬 약하다는 점이다. 그 점은 도토리를 먹는 한국인에게나 도토리를 먹여 키운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슬람교도에게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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