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모시 가턴 애시는 "투명한 편파성 transparent partiality 개념을 만들었다. 투명한 편파성의 예시로는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꼽을 수 있다. 오웰은 독자들에게 스페인 내전에 대한 자신의 보도가 특정한 당파적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시각‘이라는 가식은 전혀 없었다. 가턴 애시의 지적대로, 우리가 오웰을 신뢰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을 ‘공정하고 균형 잡힌 사람이라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 P178

강력한 사적 행위자가 매개 기구를 이용해 권력을 강화하려 하는 게 사실이라면, 마땅한 해결책은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는 공적인접근법일 것이다. 일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정당과 방송국을 일종의공공시설로 보고 그에 따라 재정 지원책과 규제책을 마련한다." 정당과 믿을 수 있는 뉴스 출처가 민주주의에 꼭 필요한 인프라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한 결과다. 이들이 생산하는 건 결국 ‘공공재‘이고, 공공재의 본질은 아무도 소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대부분의 국가에서 국방이나 도로가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자). - P179

오늘날 많은 시민이 도달한 결론은 정치인이 자본에 종속되면 절차는 부패하고, 그러면 나의 정치 참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민들이 정치 참여에 소극적으로 변하면 자원을 많이 가진 부유층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게 된다. - P184

투명하게 당파적인 매체와 정당이 이처럼 결합하면 우려도 나올것이다. 정치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언론의 역할 아니던가? 민주주의 정치에서 편파성없는 틀을 제공해야 할 언론을 정치화하는 것이정말 우리가 원하는 일인가? 현실적인 우려지만, 과거 정당과 언론이종종 한데 어우러졌고 그것이 언제나 비도덕적인 결합은 아니었음을간과하는 시각이다. - P187

여기서 우리는 민주주의 인프라의 개선이 결국 한 가지에 달려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된다. 영국철학자 오노라 오닐의 말대로, 민주주의 인프라가 개선되기 위해서는 매개 기구가 접근성과자율성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평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매개 기구가 시민의 판단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이들도 시민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저 매개 기구의 재정적 기반은 무엇인가(언론사의 경우, 사주가 누구인가? 어떤 의제를 갖고 있는가? (베를루스코니의 TV 정당처럼) 부도덕한 이해관계를 가진 개인의 도구로 전락하지는 않았나? - P189

개방성과 접근성을 활용해 악한 행위자가 민주주의를 훼손하려하거나, 부정직한 태도로 민주주의 게임에 임하려 한다면 어떻게 할것인가? 이와 같은 의문에 대해서는, 그런 반민주적인 인물이 권력을잡더라도 법원이 사법 심사를 통해 의회의 입법을 견제한다면 악법은살아남지 못할 거라는 답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반민주적인 인물이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형법의 처벌대상이 될 수도 있다. - P195

전투적 민주주의란 정치 제도를 훼손하려는 정당이나 개인들에게서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권리를 제한할 수도 있다는 개념이다. 단순히 폭력 등 이미 형법이 규제하는형태의 행위를 자행하는 사람을 진압하는 문제가 아니다. 전투적 민주주의 사회는 특별한 정치적 금지 규정을 둔다. - P196

독일에서는 의도를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표현인 "싸울 의지가 있는민주주의"라 부르고, 이스라엘에서는 "민주주의 방어 패러다임"이라고 칭한다. 이런 개념 자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고대 아테네는도편추방제를 통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강력한 개인을 공동체에서쫓아냈다. - P197

전투적 민주주의는 전후 독일에서 가장 두드러진 발전을 보였다(전투적 민주주의를 헌법에 반영하자는 아이디어는 아마도 바덴의 프랑스 점령군 내부에서 나왔을 것이다). 전투적 민주주의는 반전체주의의 핵심이자 본질로 여겨졌다. 민주주의와 상대주의를 결합한 한스켈젠의 개념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대신 객관적이고 실질적인 가치, 특히 인간 존엄성을 민주주의와 동일시하면서 그 가치들을 수호하겠다는 입장이었다. - P198

시민 불복종의 고전적인 정의는 1970년대 초 미국의 철학자 존롤스가 정립했다. 시민 불복종은 공공연한 법 위반을 의미했다. 당연히 모든 법 위반이 시민불복종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양심에 따른비폭력적인 행위여야 하며, 무엇보다도 법이 기본권의 침해와 같은심각한 불의를 낳고 있으므로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동료 시민들에게 실득하려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 P210

시민불복종을 공손함이나 품위의 결여 따위로 혼동하는 것은 위험하다. 제대로 실행한 시민불복종은 "법 앞에 가장 높은 존경을 표하는 것"이라던 마틴 루서 킹 주니어의 말을 존 롤스도 그대로 따랐다. 다시 말해 법을 어기더라도 법 아래 깔려 있는 정의의 원칙에 호소해야 하며, 차후 동료 시민과의 협력 가능성을 아예 차단해버리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마틴 루서 킹은 법을 "애정 어린 마음으로 어겨야 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 P211

그렇다면 시민 불복종을 실천에 옮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얻을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우선 체면이라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통제된 범법 행위, 일반적인 규칙을 무시하는 행위는 무정부 상태와 다르다. 헝가리에서 야당 정치인들이 의사 진행을 막기 위해 연단으로 올라가는 통로를 막아버렸을 때, 이들의 행동은 쿠데타시도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들이 원했던 것은 이미 정부에 유리하게절차를 무시하고 규칙을 왜곡하는 의회가 더 이상 정당한 법을 통과시키는 입법 기관이 아님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특정한 사안에 대해반대 의사를 표현한 것이라기보다, 민주주의 절차상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런 행위는 전투적 민주주의의 실천으로 해석할 수 있다. - P213

독일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헌법은 이와 같은 행위를 명시적으로 독려하고 있다. 이들 헌법에는 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하에 다른 모든 방법이 실패로돌아갔을 때 마지막 시도로서 저항할 권리가 포함되어 있다. - P214

민주적 절차의 수호자들은 자신이 어떤 조건하에서 실질적인 정책 문제에 대한 패배를 수용할 수 있는지, 나아가 민주적 절차에 대한지적이 다른 시민들의 공감을 사지 못한 것을 인정할 수 있을지를 자문해봐야 한다. 내가 선호하는 입법안이 통과되지 못했다는 사실은불복종의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다. 정치 과정의 구조적인 왜곡과 시민들의 적절한 참여 부족으로 인해, 패자가 정치적인 결과에 동의할수도 없고 이번 결정을 내린 집단적인 과정에 자신이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했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다. - P215

달리 표현하자면 불복종은 이 책의 1장에서 정의한 "타협할 수 없는경계", 즉 민주주의 사회 내 모든 구성원의 자유와 평등을 수호하는행위일 때 가장 정당한 것이 된다. 이런 경우라면 진짜로 시민답지 못한 쪽은 소란을 일으키는 쪽이 아니라, 재킷에 넥타이까지 갖추고 점잖은 말투를 쓰더라도 시민 개념의 근간을 공격하는 쪽이 된다. - P217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다. 갈등이 어떻게 다루어지는지가 관건이다. 패자 없는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정치체제의 존속이라는 명분하에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희생하는 게임인지가 관건이다. 나의 정적이 옳을 수도 있다는 마음가짐이 존재하는사회에서는 이것이 가능하다. 상대가 지금 있는 자리에 언젠가 내가갈 수도 있다고 상상 가능한 사회에서는 이것이 한층 더 용이해진다. - P221

매개 기구는 접근성이 높아야 하고 정확하며 자율적이며, 평가가능해야 하고, 따라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당파성이 없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정당의 경우에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언론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목표는 진실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갈등에서 각자 다른 입장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팩트가 언제나 깨지기 쉬운 것이라 해도 그 과정은 팩트에 의해 가능해지고 또 팩트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소셜미디어가 민주주의를 망치고 있다고 한탄하나, 이 새로운 매개체가 시민들에게 전례 없는 접근성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P223

현시점에 민주주의에 대해 낙관적이어야 할 이유는 딱히 없다. 민주주의의 수호자들이 위기 대응 매뉴얼을 펴내느라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민주주의를 뒤집어 엎으려는 자들도 포퓰리즘- 권위주의 통치 기술을 완벽하게 다듬기에 여념이 없다. 경험했다시피 이런 상황에서 법원이 반드시 우리를 구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종국에는 결집한 시민만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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