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다!


학창시절, 불교학생회 주최로 전시회가 열렸는데, 그때 커다란 그림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어떤 나그네가 우물 중간에서 넝쿨을 붙들고 대롱대롱 매달려있는데, 우물 밖에는 불길 속에 코끼리가 있었고, 마른 우물 밑에는뱀이 몇 마리 보였다. 또한 넝쿨 위쪽을흰 쥐와 검은 쥐가 갉아먹고있었는데, 그 와중에 나그네는 벌집에서 떨어지는 꿀을 받아먹고 있었다. 이 그림이 궁금해 묻자 안내자가 설명했다.
"이 그림은 『불설비유경(佛說譬喩經)』의 ‘안수정등(岸樹井藤)‘입니다. 그림 속의 나그네는 중생(衆生)을 의미하고, 불길은 타오르는욕망을 상징하고 있죠. 코끼리는 무상(無常)함을, 독사는 삼을, 흰 쥐와 검은쥐는 낮과 밤을 뜻하며, 넝쿨은 생명줄을, 다섯 방울의 꿀은 오욕락(五樂)을 뜻합니다. 이 그림은 결국 위태로운 중생들이 오욕락의 달콤함에 빠져 진실을 도외시하고 있음을 비유합니다."
이 말을 듣고 궁금해진 필자가 다시 물었다.
"그럼 이 나그네는 어찌해야 하는 걸까요?"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른바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다. 그 와중에 나그네는 벌집에 - P5

서 떨어지는 다섯 방울의 꿀을 받아먹으며 자신의 상황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나그네는 어떻게 해야 이 위기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대가 이 나그네와 같은 처지라면 과연 어찌해야 할까?
용성 큰스님이 제자들에게 안수정등을 설하며 각자의 생각을묻자 제자들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어젯밤 꿈속의 일일 뿐입니다."
"부처는 다시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누가 언제 우물에 들었던가?"
훗날 제자 중 한 사람이 전강선사를 만나 스승의 질문을 전해주었다. 그러자 전강선사는 엿 한 가닥을 엿판에 내리친 다음 한 조각을 입에 털어 넣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달다!"
우하하하! 달다! 이것야말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멋진 답변이 아닐 수 없다. 앞의 어떤 답변보다도 간단명료하면서 정확하다.
왜 그런가? 애당초 안수정등의 상황은 모두 설정(定)이기 때문이다. 현실이 아닌 허구인 것이다. 이른바 ‘가상현실‘이다.
전강선사의 답변은 그 순간 안수정등이라는 가상현실에서 벗어나 유일한 진짜 현실인 ‘바로지금 여기‘로 툭 튀어나온 것이다.
또한 우물 속 나그네가 추구하는 달콤함과 여기서의 ‘달다!‘는같지 않다. 나그네에게는 달콤함을 추구하는 ‘나‘가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달다!‘에는 ‘나‘가 없다. 다만 맛을 느낄 뿐, 맛을 느끼는자는 없다. 견문각지(見聞覺知)가 있을 뿐, 견문각지하는 자는 없다.
과거는 이미 흘러 갔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는 잠 - P6

시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거·현재·미래는 모두 가상현실이다. 유일한 진실은 ‘바로 지금 여기서 이것뿐‘이다. 현상이 있을 뿐 실체는 없다. 행위가 있을 뿐 행위자는 없다. 한마디로 아바타(avatara)인 것이다.
‘몸도 아바타, 마음도 아바타, 이 세상은 가상현실!‘이라는 소식을 ‘지금 여기‘에서부터 활용하는 것이 현명하다. 각고의 수행을 통하여 언젠가 이를 깨달은 후에는 써나갈 필요가 없다. 이미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열매를 일단 따먹어 보고, 주위에도 권장하는 것이오히려 깨달은 이가 바라는 바다. 그 비결은 바로 몸과 마음을 아바타라바라보는 것이다.
"아바타가 욕심내고 있구나. 아바타가 화가나는구나. 아바타가근심 걱정하고 있구나."
이렇게 관찰할 때 탐(貪)·진(鎭)·치()는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아바타의 몫이 된다. 나는 다만 ‘바라볼 뿐!
"아바타가 걸어간다. 아바타가 머무른다. 아바타가 앉아 있다.
아바타가 누워 있다. 밥 먹을 때는 밥을 먹을 뿐! 잠잘 때는 잠잘 뿐!"
이를 꾸준히 연습해서 온몸에 사무치면 비로소 말할 수 있으리라.
"나왔다!"


행불사문월호 합장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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