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그, 아야."
홀로 바느질을 하고 있던 아내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가늘고 날카로운 소리로 부르짖었다. 바늘 끝이 왼손 엄지손가락 손톱 밑을 찔렸음이다. 그 손가락은 가늘게 떨고 하얀 손톱 밑으로 앵두빛 같은 피가 비친다. - P3

"왜 집혀지지를 않아!"
그는 마침내 울듯이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것을 집어 줄 사람이 없나 하는 듯이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안은 텅 비어 있다. 어느 뉘 하나없다. 호젓한 허영만 그를 휩싸고 있다. - P4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된 지는 벌써 오랜 일이다. 어느덧 7, 8년이 지냈으리라. 하건만 같이있어 본 날을 헤아리면 단 일 년이 될락 말락한다. 막 그의 남편이 서울서 중학을 마쳤을 제그와 결혼하였고, 그러자마자 고만 동경(東京)에 부급한 까닭이다. 거기서 대학까지 졸업을하였다. 이 길고 긴 세월에 아내는 얼마나 괴로웠으며 외로웠으랴!  - P5

남편이 돌아왔다. 한 달이 지나가고 두 달이지나간다. 남편의 하는 행동이 자기의 기대하던 바와 조금 배치(背)되는 듯하였다. 공부 아니 한 사람보다 조금도 다른 것이 없었다. 아니다, 다르다면 다른 점도 있다. - P6

그의 남편은 도리어 집안 돈을 쓴다. 그러면서도 어디인지 분주히 돌아다닌다. 집에들면 정신없이 무슨 책을 보기도 하고 또는 밤새도록 무엇을 쓰기도 하였다. - P7

어느 날 새벽, 아내가 어렴풋이 잠을 깨어,
남편의 누웠던 자리를 더듬어 보았다. 쥐이는것은 이불자락뿐이다. 잠결에도 조금 실망을아니 느낄 수 없었다. 잃은 것을 찾으려는 것처럼, 눈을 부스스 떴다. 책상 위에 머리를 쓰러뜨리고 두 손으로 그것을 움켜쥐고 있는 남편을 보았다. 흐릿한 의식이 돌아옴에 따라, 남편의 어깨가 덜석덜석 움직임도 깨달았다. 흑 흑느끼는 소리가 귀를 울린다. - P8

또 한 두어 달 지나갔다. 처음처럼 다시 출입이 자유로웠다. 구역이 날 듯한 술 냄새가 밤늦게 돌아오는 남편의 입에서 나게 되었다. 그것은 요사이 일이다. - P9

망설거리면서도 꿈꾸는 사람 모양으로 저도모를 사이에 마루까지 올라왔다. 매우 기묘한생각이 번개같이 그의 머리에 번쩍인다.
"내가 대문을 열었을 제 나 몰래 들어오지나 않았나?………… - P11

남편은 한 다리를 마루 끝에 걸치고 한 팔을베고 옆으로 누워있다. 숨소리가 씨근씨근 한다. 막 구두를 벗기고 일어나 할멈은 검붉은 상을 찡그려 붙이며,
"어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세요."
라고 한다.
"응, 일어나지." - P13

"원 참, 누가 술을 이처럼 권하였노."
라고 짜증을 낸다.
"누가 권하였노? 누가 권하였노? 흥 흥."
남편은 그 말이 몹시 귀에 거슬리는 것처럼곱삶는다.
"그래, 누가 권했는지 마누라가 좀 알아내겠소?" - P17

"옳지, 누가 나에게 술을 권했단 말이요? 내가 술이 먹고 싶어서 먹었단 말이요?"
"자시고 싶어 잡수신 건 아니지요. 누가 당신께 약주를 권하는지 내가 알아낼까요?
저…… 첫째는 화증이 술을 권하고 둘째는 하이칼라가 약주를 권하지요." - P19

내게 술을 권하는 것은화증도 아니고 하이칼라도 아니요, 이 사회란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이 조선 사회란 것이내게 술을 권한다오. 알았소? 팔자가 좋아서조선에 태어났지, 딴 나라에 났더면 술이나 얻어먹을 수 있나 …………" - P20

무어라 할까……… 저 우리조선 사람으로 성립된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아니 못 먹게 한단 말이요.. 어째 그렇소?………… 또 내가 설명을 해 드리지. 여기 회를하나 꾸민다 합시다. 거기 모이는 사람 놈 치고처음은 민족을 위하느니, 사회를 위하느니 그러는데, 제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으니 아니하는 놈이 하나도 없어. 하다가 단 이틀이 못되어 단 이틀이 못되어……." - P21

"되지 못한 명예싸움, 쓸데없는 지위 다툼질,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내 권리가 많으니 네 권리 적으니………… 밤낮으로 서로 찢고 뜯고 하지, 그러니 무슨 일이 되겠소. 회(會)뿐이아니라, 회사이고 조합이고………… 우리 조선놈들이 조직한 사회는 다 그 조각이지. 이런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한단 말이요. 하려는 놈이 어리석은 놈이야. 적이 정신이 바루 박힌 놈은 피를토하고 죽을 수밖에 없지. 그렇지 않으면 술밖에 먹을 게 도무지 없지. - P22

66
"술 아니 먹는다고 흉장이 막혀요?"
남편의 하는 짓은 본체만체하고 아내는 얼굴을 더욱 붉히며 부르짖었다.
그 말에 몹시 놀랜 것처럼 남편은 어이없이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그 다음 순간에는말할 수 없는 고뇌(苦惱)의 그림자가 그의 눈을거쳐 간다. - P24

아내는 뒤에서 구두 신으려는 남편의 팔을잡으며 말을 하였다. 그의 손을 떨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담박에 눈물이 쏟아질 듯하였다.
"이건 왜 이래, 저리고 가!"
배앝는 듯이 말을 하고 휙 뿌리친다. 남편의발길이 뚜벅뚜벅 중문에 다다랐다. - P26

쏠쏠한 새벽바람이 싸늘하게 가슴에 부딪친다. 그 부딪치는 서슬에 잠 못 자고 피곤한 몸이 부서질 듯이 지긋하였다.
죽은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해쓱한 얼굴이 경련적으로 떨며 절망한 어조로 소근거렸다.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 P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