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감탱이
유주얼
남자친구가 살던 집에 유품을 정리하러 갔다. 그가 쓰던 이불과 옷가지를 정리하고, 손걸레로 방바닥을 닦았다. - P102
지가 나왔다. 제일 안쪽에는, 캔맥주가 들어 있었다. 500밀리리터짜리 에델바이스. 위아래에둘러진 파란 띠 가운데 하얀 바탕에 알프스가그려져 있었다. 남자친구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 P103
제로 종종 다투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왜 이 냉장고에 술이 있는 걸까. 골똘한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냉장고 문을 닫으라는 경고음이 삑삑울렸다. 움찔 놀라서 문을 닫으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캔맥주가 말을 걸었다. "나를 데려가게." - P104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남자친구가 떠올랐다. 그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면도 있었지만 그래도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가 내 앞으로 낸 대출이자를 밀리지 않으려고 하나하나 중고로 내놓았던 물건들을 떠올렸다. - P104
눈물이 북받쳐 잠시 걸음을 멈추려는데 가방 속에 들어 있던 캔맥주가 말했다. "이보게, 내 몸이 급속도로 식고 있어. 이건위험하네. 감상에 젖는 건 나중에 하고 지금은어서 집으로 가면 어떻겠나. 서둘러주게. 냉장실에 들어가야 해." - P105
다음날 일어나 냉장고를 열자 캔맥주가 인사를 했다.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 땀도 나지 않고, 이집 냉장고는 무척 쾌적하군. 고맙네." 나는 캔맥주의 말을 못 들은 척, 그릭 요거트를 꺼내고 냉장실 문을 탁 닫았다. 캔맥주는문도 안 열린 냉장고 안에서 웅웅거리며 말을했다. - P106
"자네 그거 아나? 이렇게 날씨가 더워질 적엔 낮맥도 일종의 특권이라네." 그러나 나는 만두 여덟 개를 다 먹을 때까지캔감탱이를 마시지 않았다. 그는 이제나저제나 개봉을 기다리다가 실망한 눈치였다. 그러나 다시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자존심 때문인지 입은 꾹 다문 채였다. - P107
우선순위, 신용불량 같은 단어를 조용한 골목이떠나가라 외치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꺽, 꺽, 그는 자꾸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그때처럼공기는 목의 상처로 새어나올 뿐이었다. - P109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캔감탱이를 꺼내 책상 앞에 앉았다. 나도 캔맥주도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을 깬 건 그였다. "자네, 그 친구가 날 자기 냉장고에 넣어놓은 이유를 알고 있나?" "몰라. 이제 와 그런 게 무슨 소용이야." 방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잠시 후 캔감탱이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자네, 그 친구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선 궁금하지 않나?" 심장이 두근거렸다. - P109
딸칵. 유리잔을 가져와 맥주를 따랐다. 냉장고에 오래 재워둔 맥주는 조밀한 거품을 산뜻하게 밀어올렸다. 크림 같은 거품은 손가락 두개를 겹친 이상적인 두께였다. 밝은 금색 맥주에 어둡게 켜놓은 수면등 불이 비쳐, 잔 속에달빛을 따라놓은 것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캔도 맥주도 나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완벽한 정적에 어울리는, 완벽한 맥주였다. - P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