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다시금 장문을 열고 잡힐 것을 찾을 즈음에 누가 중문을 열고 들어온다. 우리는 누군가 하고 귀를 기울일 적에 밖에서,
"아씨!"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는 급히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는 처가에서 부리는 할멈이었다. 오늘이 장인 생신이라고 어서 오라는 말을 전한다. - P22

가난한 살림에 골몰하느라고 자기 친부의 생신까지 잊었는가 하매 아내의 정지(情地)가 더욱 측은하였다.
"오늘이 본가 아버님 생신이래요. 어서 오시라는데……."
"어서 가구려…….…."
"당신도 가셔야지요. 우리 같이 가셔요."
하고 아내는 하염없이 얼굴을 붉힌다. - P23

우리 집은 천변 배다리 곁에 있고 처가는 안국동에 있어 그 거리가 꽤 멀었다. 나는 천천히가느라고 가고 아내는 속히 오느라고 오건마는그는 늘 뒤떨어졌었다. 내가 한참 가다가 뒤를돌아보면 그는 늘 멀리 떨어져 나를 따라오려고 애를 쓰며 주춤주춤 걸어온다. 길가에 다니는 어느 여자를 보아도 거의 다 비단옷을 입고고운 신을 신었는데 아내만 당목 옷을 허술하게 차리고 청목당혜로 타박타박 걸어오는 양이나에게 얼마나 애연(然)한 생각을 일으켰는지 - P24

그 중에 제일 내게 친숙하게 인사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아내보다 삼 년 맏이인 처형이었다. 내가 어려서 장가를 들었으므로 그때 그는나를 못 견디게 시달렸다. 그때는 그가 싫기도하고 밉기도 하더니 지금 와서는 그때 그러한것이 도리어 우리를 무관하고 정답게 만들었다. - P25

아내를 형이라 하고, 처형을 아우라 하였으면아무라도 속을 것이다. 또 한 번 아내를 보며말할 수 없는 쓸쓸한 생각이 다시금 가슴을 누른다.
딴 음식은 별로 먹지도 아니하고 못 먹는 술을 넉 잔이나 마시었다. 그래도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앉아 견딜 수가 없다. - P26

나는 마지못하여 하는 듯이 부스스 일어났다. 머리가 오히려 아프며 목이 몹시 말라서 국과 물을 연해 들이켰다.
"물만 잡수셔서 어째요. 진지를 좀 잡수셔야지."
아내는 이런 근심을 하며 밥상머리에 앉아서고기도 뜯어 주고 생선뼈도 추려 주었다. - P28

어제 일이있은 후로 우리 사이에 무슨 벽이 생긴 듯하던것이 그 벽이 점점 엷어져 가는 듯하며 가엾고사랑스러운 생각이 일어났었다. 그래서 우리는정답게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오늘 장인 생신 잔치로부터 처형 눈 위에 멍든 것에 옮겨 갔다. - P29

이 말을 들으매 내 마음은 말할 수 없이 만족해지며 무슨 승리자나 된 듯이 득의양양하였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옳다, 그렇다. 이렇게 지내는 것이 행복이다.‘
하였다. - P30

"참 좋은 것인데요."
이런 말을 하다가 나는 또 쓸쓸한 생각이 일어난다. 저것을 보는 아내의 심중이 어떠할까?
하는 의문이 문득 일어남이라.
"모다 좋은 것만 골라 샀습니다그려."
아내는 인사를 차리느라고 이런 칭찬은 하나마 별로 부러워하는 기색이 없다.
나는 적이 의외의 감이 있었다. - P32

그는 근일에 드문 기쁜 소리를 치며 방바닥위에 사뿐 내려놓고 버선을 당기며 곱게 신어본다.
"어쩌면 이렇게 맞어요!"
연해 연방 감탄사를 부르짖는 그의 얼굴에 흔연한 희색이 넘쳐흐른다. - P34

"신 모양이 어때요."
"매우 이뻐!"
겉으로는 좋은 듯이 대답을 하였으나 마음은쓸쓸하였다. 내가 제게 신 한 켤레를 사주지 못하여 남에게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도다…………. - P35

나는 마음을 좀 너그럽게 먹고 이런 생각을하며 아내를 보았다.
"나도 어서 출세를 하여 비단신 한 켤레쯤은사주게 되었으면 좋으련만……………"
아내가 이런 말을 듣기는 참 처음이다.
"네에?"
아내는 제 귀를 못 미더워하는 듯이 의아(疑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얼굴에 살짝 열기가오르며,
"얼마 안 되어 그렇게 될 것이야요!" - P36

"정말 그럴 것 같소?"
나는 약간 흥분하여 반문하였다.
"그러문요, 그렇고말고요."
아직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은 무명작가인나를 다만 저 하나가 깊이깊이 인정해 준다. 그러기에 그 강한 물질에 대한 본능적 요구도 참아 가며 오늘날까지 몹시 눈살을 찌푸리지 아니하고 나를 도와 준 것이다.
‘아아, 나에게 위안을 주고 원조를 주는 천사여!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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