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벌써 반이나 지났건마는 이슬을 실은듯한 밤기운이 방구석으로부터 슬금슬금 기어나와 사람에게 안기고 비가 오는 까닭인지 밤은 아직 깊지 않건만 인적조차 끊어지고 온 천지가 빈 듯이 고요한데 투닥투닥 떨어지는 빗소리가 한없는 구슬픈 생각을 자아낸다.
"빌어먹을 것 되는 대로 되어라." - P4

늦게야 점심을 마치고 내가 막 궐련[卷煙] 한개를 피워 물 적에 한성은행(漢城銀行) 다니는 T가 공일이라고 놀러 왔었다.
친척은 다 멀지 않게 살아도 가난한 꼴을 보이기도 싫고 찾아갈 적마다 무엇을 뀌어 내라고 조르지도 아니하였건만 행여나 무슨 구차한소리를 할까 봐서 미리 방패막이를 하고 눈살을 찌푸리는 듯하여 나는 발을 끊고 따라서 찾아오는 이도 없었다. 다만 이 T는 촌수가 가까운 까닭인지 자주 우리를 방문하였다. - P5

"T는 돈을 알고 위인이 진실해서 그 애는 돈섞어푼이나 모을 것이야! 그러나 K(내 이름)는 아무짝에도 못 쓸 놈이야. 그 잘난 언문서 무어라고 끄적거려 놓고 제 주제에 무슨 조선에 유명한 문학가가 된다니! 시러베아들놈!" - P6

여하간 이만하면 T의 사람됨을 가히 알 수가 있다. 그러고 그가 우리집에 올 것 같으면지어서 쾌활하게 웃으며 힘써 자미스러운 이야기를 하였다. 단둘이 고적(寂)하게 그날그날을 보내는 우리에게는 더할 수 없이 반가웠었다. - P7

"이것도 퍽 좋은데요."
이런 칭찬을 하면서 양산을 펴 들고 이리저리 홀린 듯이 들여다보고 있는 아내의 눈에는,
‘나도 이런 것을 하나 가졌으면‘ 하는 생각이역력(歷歷히 보인다. - P8

T를 보내고 책상을 향하여 짓던 소설의 결미(結尾)를 생각하고 있을 즈음에,
"여보!"
아내의 떠는 목소리가 바로 내 귀 곁에서 들린다. 핏기 없는 얼굴에 살짝 붉은빛이 돌며 어느 결에 내 곁에 바싹 다가앉았더라.
"당신도 살 도리를 좀 하셔요." - P9

"우리도 남과 같이 살아 보아야지요!"
아내가 T의 양산에 단단히 자극(刺戟)을 받은것이다. 예술가의 처 노릇을 하려는 독특(獨特)한 결심이 있는 그는 좀처럼 이런 소리를 입 밖에 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무엇에 상당한 자극만 받으면 참고 참았던 이런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나도 이런 소리를 들을 적마다 ‘그럴 만도 하다‘는 동정심이 없지 아니하나 심사가 어쩐지 좋지 못하였다. - P10

나는 이런 일을 가슴에 그리며 그래도 내일아침거리를 장만하려고 옷을 찾는 아내의 심중을 생각해 보니, 말할 수 없는 슬픈 생각이 가을바람과 같이 설렁설렁 심골(心骨)을 분지르는것 같다. - P11

아내가 애써 찾던 그것도 벌써 전당포의 고운 먼지가 앉았구나! 종지 하나라도 차근차근아랑곳하는 아내가 그것을 잡혔는지 아니 잡혔는지 모르는 것을 보면 빈곤(貧困)이 얼마나 그의 정신을 물어뜯었는지 가히 알겠다. - P12

육 년 전에 (그때 나는 십육 세이고 저는 십팔 세였다)우리가 결혼한 지 얼마 아니 되어 지식에 목마른 나는 지식의 바닷물을 얻어 마시려고 표연히 집을 떠났었다. 광풍(狂風)에 나부끼는 버들잎 모양으로 오늘은 지나(支那) 내일은 일본으로 굴러다니다가 금전의 탓으로 지식의 바닷물도 흠씬 마셔 보지도 못하고 반거들충이가 되어 집에 돌아오고 말았다. - P14

처가 덕으로 집 간도 장만하고 세간도 얻어우리는 소위 살림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지내었지마는 한 푼 나는 데 없는 살림이라 한 달 가고 두 달 갈수록 점점 곤란해질따름이었다. 나는 보수() 없는 독서와 가치없는 창작으로 해가 지고 날이 새며 쌀이 있는지 나무가 있는지 망연케몰랐다. - P15

이런 고생을 하면서도 그는 나의 성공만 마음속으로 깊이깊이 믿고 빌었었다. 어느 때에는 내가 무엇을 짓다가 마음에 맞지 아니하여쓰던 것을 집어던지고 화를 낼 적에,
"왜 마음을 조급하게 잡수셔요! 저는 꼭 당신의 이름이 세상에 빛날 날이 있을 줄 믿어요.
우리가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이 장래에 잘 될근본이야요."
하고 그는 스스로 흥분되어 눈물을 흘리며나를 위로한 적도 있었다. - P16

내가 알다시피 내가 별로 천품은 없으나 어쨌든 무슨 저작가(作)로 몸을 세워 보았으면하여 나날이 창작과 독서에 전심력을 바쳤다.
물론 아직 남에게 인정될 가치는 없는 것이다. 그 영향으로 자연 일상생활이 말유()하게 되었다.
이런 곤란에 그는 근 이 년 견디어 왔건마는나의 하는 일은 오히려 아무 보람이 없고 방 안에 놓였던 세간이 줄어 가고 장롱에 찼던 옷이거의 다 없어졌을 뿐이다. - P17

"마누라!"
하고 부르면 그는 몸을 흠칫 하고 고개를 저리로 돌리어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으며,
"네에?"
하고 울음에 떨리는 가는 대답을 한다. 나는등에 찬물을 끼얹는 듯 몸이 으쓱해지며 처량한 생각이 싸늘하게 가슴에 흘렀었다. 그렇지않아도 자비쉬운 마음이 더욱 심해하기지며,
‘내가 무자격한 탓이다.‘ - P18

그는 마음속으로,
‘네가 육 년 동안 내 살을 깎고 저미었구나!
이 원수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매 그의 불같던 사랑까지 엷어져 가는 것 같았다. 아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 같았다. 나는 감상적으로 허둥허둥하며,
"낸들 마누라를 고생시키고 싶어 시켰겠소! - P19

그러길래 왼종일 쉬지 않고 공부를 아니하우, 남 보기에는 편편히 노는 것 같아도 실상은 그렇지 안 해! 본들 모른단 말이요."
나는 점점 강한 가면(假面)을 벗고 약한 진상(眞相)을 드러내며 이와 같은 가소로운 변명까지 하였다. - P20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린다. 뒤숭숭하던생각이 다 이 뜨거운 눈물에 봄눈 슬듯 스러지고 말았다.
한참 있다가 우리는 눈물을 씻었다. 내 속이얼마큼 시원한 듯하였다.
"용서하여 주셔요! 그렇게 생각하실 줄은 몰랐어요."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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