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프 Olaf
정연주
점심식사 후 서둘러 테이크아웃해온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졸음을 쫓기 위해 연료를 충전하는 동안 이메일 확인을했다. 급한 용무가 없을 개인 이메일을 들여다보는 것이 본격적인 오후 업무 전의 루틴이었다. - P88
잘 들어가지 않던SNS 웹사이트의 우측 상단 종이비행기 모양의아이콘 옆에 숫자 1이 반짝였다. 눈사람 ‘올라프‘에게서 온 다이렉트 메시지였다.
-안녕 - P89
당시 어른들의 사정과는관계없이 스스로 조숙하다 여기던 일부 청소년들은 신물문인 PC통신에 몰두하고 있었다. 지금 관점으로는 말이 되지 않지만, 순수하게도자신의 실명과 거주지역을 그대로 공개하며 특정 가수나 장르를 추종하기도 하였다. - P90
나만의 기억 저장 공간, 요즘 IT 기술로 치면 클라우드 스토리지를 항상 이고 다닌 셈이다(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다는 건 아주 뒤늦게 깨달았다). 아, 어쩌면 나는 시시한 군중 속의 ‘스타걸‘처럼 이해받지 못하는 가엾은 존재, PC통신에서라면 어디선가 지적 허영을 떨 수 있지않을까? 재기 넘치는 나의 글을 보고 혹시 누가 나에게 관심 가져주지 않을까? 안타깝게도수백 개의 동호회에는 이미 수천의 ‘스타걸‘과 ‘스타보이‘로 가득했다. - P91
부끄럽지만 나의 남자 버전이 바로 K, K의여자 버전이 나였다. 텍스트 홍수 속에서 영혼을 복사해놓은 듯한 사람을 찾아내다니 지금돌이켜보면 완벽한 블라인드 데이팅이었다(사실 잠깐 본 얼굴도 내 취향이긴 했다). 대화는끊이지 않았다. K는 놀이공원 대관람차를 좋아한다고 했다. 이따금 밤을 새워 손끝으로 대화했다. 학교 기숙사에 있을 때면 편지를 썼다. - P92
그렇게 시간이 흘러, 급기야 그의 클라우드와 나의 클라우드는애플사의 아이튠즈처럼 점차 동기화되어갔다. 그는 생일선물로 정성껏 녹음한 믹스테이프를우체국 1호 사이즈 소포로 보내주기도 했다. - P93
올라프에게 답을 할까 말까 망설이며 올라프 그림을 눌러 그의 개인 프로필 페이지를 훑어보았다. 역시나 만화가는 아니고 결국 아버지가 바라시던 전문직을, 심지어 프로답게 잘하는 그였다. 십 년 전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때 느낀 대로 그다운 선택이었다. 지금으로부터십 년 전은, 대략 한일 월드컵의 십 년 이후이다. - P94
K를 어떻게 다시 만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뭐든 잘 참는 편이라(하긴 비슷한 성격이니 둘 다) 정말로 서로전혀 연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통의 친구J가 함께하긴 했지만, 그녀마저 오랜만에 연락이 된 것이었고, 십 년 전의 상황 역시 아무도모르는 일이었으므로 굳이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알았다면 더더욱. 물론 이런 사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순수하게 반가웠다. - P95
럼 얘기했다. 우리는 소란스러운 호프집을 벗어나 걷기 시작했다. 그는 사실 최근 수년간 음악을 거의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내내 그의 생각을 했다고 말하지 못했다. 시시때때로 마음속으로 말을 걸었었다고, 이 노래를좋아했을 거라고 - P96
J와 어느 시점에 헤어졌는지는 둘 다 기억하지 못한다. 시간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둘은 쉴새없이 입과 발걸음을 놀렸다. 잊고 지내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다시 각각의 머릿속에 숨어있던 클라우드에 불이 켜졌고, 블루투스처럼연결됐다. 꽁꽁 언 호숫가를 걷다 내가 갑자기빙판 위로 뛰어들어 피겨스케이팅 시늉을 하자K는 깜짝 놀랐다. - P97
다음날 그에게 연락이 왔다. 사실은 지금의삶은 원하던 삶이 아니라고, 그간의 헛된 노력이 다 거짓이었음을 깨닫고 그녀와 정리했다고했다. 나는 잠시 너의 착각일 거라고 차분히 설득했다. 그는 왜 자신을 그냥 왔다가 떠나는 사람으로 만드느냐고 했다. 틀린 말도 아니지 않아?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지만 이번 이별의실제 사유는 건물의 벽돌 너덧 장 정도도 살 수없던 내 초라한 시급 때문이었다. - P98
업데이트했다. 내가 그를 찾은 것처럼 그도 나를 계속해서 찾고 있었다. 그동안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세세한 부분들을 확인했다. 몹시 많이 걸었던 겨울날, 갖고 온 차는 결국 다음날 찾으러 다시 갔다고 했다. 너무 잘안다고 생각해서 말 못한 오해가 적지 않았다. 그게 우리의 패인이었나봐. 놓친 시간이 슬프고 서러웠다. 그러다 금세 그동안 서로가 좋아할 만한 음악과 영화와 식당을 많이 알아놓았다며 즐거워했다. - P99
-지금은 어디야? -도쿄에 파견 나와 있어. ‘도요스‘라는 지역인데, 오다이바 근처야. 차를 타고 약간만 나가면 네가 좋아하는 바다와 대관람차도 보이지. 그런 곳에 살고 싶다고 했잖아. 잠시 정적, 올라프는 메시지를 썼다 지우길반복했다. -내가 지금 네 쪽으로 갈게. 꼭 갈 테니 기다려야 해.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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