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훈은 낯선 소파에서 눈을 떴다. 등허리가욱신거렸다. 목이 졸리는 듯한 느낌에 넥타이를 풀기 위해 손을 올렸다. 넥타이는 없고 퇴근하며 가방에 넣어둔 공무원증만 목에 걸려 있었다. 그는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며 몸을 일으켰다. 가죽소파가 내는 소리를 들었는지 철문이 열렸다. 나이가 지긋한 경사가 재훈을 보더니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일어나셨네!" - P26
교육청으로 발령받은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과장님 곁에서 사업소의 과들을 돌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수십 번 고개를 숙였다. 구내식당 앞 카페에서 팀장님에게 커피를 얻어마시다 재훈의 환영회 이야기가 나왔다. 회식자리에서 유리잔 가득 담긴 술을 애써 넘긴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 P27
"어제 제가 뭘, 어떻게 여기." 재훈이 더듬거리며 말하자 뒷머리를 긁적이던 순경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느냐고 물었다. 재훈은 고개를 저었다. 순경은 컵라면을 슬쩍보고는 어제 재훈이 지나가던 행인에게 시비를걸고 발길질을 했다고 말했다. - P28
재훈은 이름난 명문 사립고에 다녔다. 옆 반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기업 총수의 자제가 다녔다. 재훈의 아버지는 작은 육가공업체를 운영했다. 학교의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경제적 격차가 있었지만 재훈은 자신의 현재에만족했다. 집은 평수가 작았지만 학군 좋은 부촌에 위치해 있었고 재훈은 외동이었다. 재훈의 어머니는 재훈의 교육에 열을 올렸다. 매달수백만 원을 교육비로 지불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재훈의 아버지는 그걸 무리한 지출이라고 생각했다. - P29
원하는 대학의 합격 발표를 확인하며 재훈은 그의 인생이 지금까지처럼 순탄하게 흘러가리라 확인받은 듯 활짝 웃었다. 그러나 즐거움을 충분히 즐길 새 없이 예기치 못한 반전이 재훈을 맞이했다. 재훈의 집이 폭삭 망해버렸다. - P30
가족관계는 파탄이 났다. 어머니는 전처럼순종하지 않았고 아버지는 전처럼 자신감이 넘치지 않았다. - P31
쫓겨나듯 집을 옮긴 후에도 한참을 옛집 앞을 서성거렸다. 너무 당연해서 생각조차 해본적 없던 것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나니 그위에 있던 ‘나‘를 잃는 것은 당연했다. 재훈은자신이 가지고 있던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정의들이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 P32
원하지 않는 과에서 어설픈 점수로 졸업을앞둔 재훈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그는 중고책방에서 산 공무원 영어 기본서를 들고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양쪽이 막힌 열람실의 책상에서 첫 챕터를 펼친 재훈은 한참 동안 수험서 구석을 들여다보았다. - P33
재훈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9급 공무원에합격했다. 육 개월의 수습 기간을 무사히 마치고 정식으로 9급인 사무직 서기보에 임용되었다. 주위에서 축하를 건넸으나 투자한 돈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월급이 들어온 통장을보면 재훈은 여전히 웃을 수 없었다. - P34
그제야 코가 욱신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재훈은 한 번도 눈치채지 못한 폭력성이 제게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냥 가시면 돼요." 재훈이 정신을 차린 듯하자 순경이 불어버린 컵라면을 흘끔 보고 재훈을 배웅하려는 듯 부축했다. - P35
짜증을 숨기지 못한 순경이 한숨을 쉬며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풀린 다리로 냄새나는 하수구 앞에 쪼그려 앉은 채로 재훈은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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