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소년과 고속도로

김유영 - P13

"이제야 깨달았어. 내가 원한 건 당신이 아니라 K라고." - P14

"맞아. 당신에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웃음이 나왔다. 어떠한 조롱이나 분노에서우러나온 것이 아니다. 머리가 고장이 나서 웃음이 나는 거라고, 누군가가 장난스럽게 말한적이 있다. 정말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닐까. 눈앞에서 꾸물거리는 양떼가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녀가 갑작스럽게 이별을선언한 탓일까. 그 이유가 소설의 주인공에게그녀를 빼앗긴 탓일까. - P15

반포동의 작은 카페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이미 늘 앉던 창가 자리에서 커피의 마지막 한모금을 남기고 있었다. - P17

"「한낮의 양치기 소년」. 당신이 그걸 읽고있었어."
내 등단작. 그리고 K가 등장하는 소설. 그녀는 이 카페의 단골이었고, 나와 만난 후로도 이곳에서 「한낮의 양치기 소년」을 자주 읽곤 했다. 생각해보니 카페에 있는 내내 그녀는 그 책을 읽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P18

"맞아, 일부. 그저 일부에 불과한 거지. K를사랑하지만, 그게 당신은 아니야."
"대체 나와 K가 뭐가 다른 건데? 심지어 K는…………" 그녀가 갑작스레 말을 끊고 물었다.
"스스로 생각해봐. 당신은 누구야?"
내가 누구냐고?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계절이 수차례 지나도록 보아온 그녀의 얼굴이낯설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 놓인 낮은 원목 탁자의 간격이 닿을 수 없을 만큼 늘어난 듯했다. - P19

당신은 누구야?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계속해서 되뇌었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나는, 그녀는 그리고 K는 누구인가. 의식의 저변에 당연하다는 듯 깔려 있던 그들이 한순간에 증발해버렸다. 그녀 탓이다. 그녀가 기어코 끄집어냈기 때문에 사라진 것이다. - P20

나는 속으로 일방적인 통보를 내렸다. 그 고속도로에서 죽은 것은 분명 K다, 라고.

의자를 끌어내 책상 위 노트북 앞에 앉은 것은 순전히 K의 사망 선고를 적어낼 심산이었다. 그녀를 향한 마지막 작은 복수심이었는지도 모른다. - P22

하지만 새벽을 넘기고 일출을 알리는 새가지저귈 즈음에 다다랐을 때, 나는 멈출 수밖에없었다. 생각나는 모든 기억을 필사적으로 붙잡아 기록해도, 거기다 미사여구를 붙이고 길게 늘여 써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점점 쓰면 쓸수록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글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는 고심하다 끝끝내 파일의이름을 ‘나‘라고 설정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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