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서서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이따금 돈을 지불하고 새치기를 하기도 한다. 멋진 음식점에서 지배인에게 팁을 두둑하게 쥐어주면 손님이 많은 저녁 시간이라도 대기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팁은 뇌물에 가까워서 은밀하게 다뤄진다. 50달러짜리 지폐를 찔러주는 사람에게 바로 테이블을 내어준다는 표지판은 음식점 어디에도 걸려 있지 않다. 하지만최근 들어 새치기 권리를 파는 행위가 공공연히 이루어져 낯설지 않은관행이 되고 있다. - P37
일등석을 이용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승객이 대부분이므로, 항공사는 일반석 승객도 ‘맞춤 특권‘ 서비스를 구매해서 새치기자격을 누릴 수 있게 했다. 유나이티드 항공은 덴버를 출발해 보스턴으로 가는 승객이 39달러를 추가로 지불하면 보안검색대 통과와 탑승에우선권을 부여한다. - P38
비판자들은 공항 보안검색대를 우선적으로 통과하는 권리가 매매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엑스트라 레그룸(extra legroom, 일반석 중 다리를 뻗을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한 좌석 -옮긴이)이나 우선 탑승권같은 서비스와 달리, 보안검색은 국가 안보의 문제이기 때문에 테러리스트들의 탑승을 막는 데 따르는 부담을 승객 모두가 똑같이 나누어 져야 한다는 것이다. 항공사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수준의 보안검사를 받지만 단지 비용에 따라 기다리는 시간이 다를 뿐이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모든 승객이 동일하게 몸수색을 받는 한, 보안검색대에서 새치기할권리는 항공사가 자유롭게 팔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P38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재화와 서비스를 확보하기 위해 줄이 길게 늘어서는 현상은 낭비이면서 비효율적 행동이고, 가격체계가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신호다. 그들은 공항, 놀이공원, 또는 고속도로에서 좀 더 빠른 서비스를 받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은사람들이 자신의 시간에 가격을 매김으로써 경제적 효용을 높이는 것이라 믿는다. - P42
대리 줄서기 사업은 최근 의회에서 미국 연방대법원까지 확산되고있다. 대법원에서 열리는 굵직한 헌법 소원 사건의 구두 변론을 방청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비용을 지불할 의사가 있다면 라인스탠더를 고용해 미국 최고 법정에 좋은 좌석을 확보할 수 있다! - P45
진료 예약권의 암표 판매에는 불쾌한 구석이 있다. 우선 이러한 관행으로 보상을 받는 사람은 진료 제공자가 아니라 고약한 중개인이라는 점이다. 관절염 환자의 진료 예약권이 100달러라면, ‘닥터 탕‘은 예약권 판매금의 대부분이 자신이나 병원이 아닌 암표상에게 돌아가는이유를 따져물어야 마땅하다. 경제학자라면 이 점에 동의하고 병원에진료비를 인상하라고 조언할지 모른다.실제로 베이징 소재 병원들은진료비용이 좀 더 비싸면서 줄이 훨씬 짧은 특별 진료예약 창구를 설치하고 있다." 이 값비싼 특별 진료 예약 창구는 놀이공원이나 공항의우선 탑승권처럼 새치기 권리를 돈 주고 사는 관행을 병원에 도입한것이다. - P47
이렇게 친절한 진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전담 의사는 자신의진료 환자 수를 대폭 줄인다. 전담 진료로 전환하겠다고 결정한 의사들은 기존 환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선택을 하라고 말한다. 기다릴 필요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서비스에 연회비를 지불하고 신청하든지 다른 의사를 물색하라고 말이다." - P49
지금까지 살펴본 사례는 시대를 반영하는 징후다. 공항과 놀이공원, 의회 복도와 병원 대기실에서 ‘선착순‘이라는 줄서기 윤리가 ‘돈을 낸 만큼 획득한다‘는 시장 윤리로 대체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변화는 한때비시장 규범이 지배했던 삶의 영역에 돈과 시장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치기 권리의 매매가 이러한 경향을 나타내는 가장 지독한 사례는아니다. 하지만 대리 줄서기, 암표 거래, 그리고 여러 새치기 형태들에대해 옳고 그름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시장논리의 도덕적 영향과 한계를 살펴보기에 유익할 것이다. - P51
줄서기에 관해 시장을 옹호하는 입장에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개인의 자유 존중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행복이나 사회적 효용의 극대화에 대한 주장이다. 첫 번째는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의 입장이다. 그들은 타인의 권리를 침범하지 않는 한 원하는 재화는무엇이든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P52
시장을 옹호하는 두 번째 주장은 경제학자에게 좀 더 친숙한 것으로공리주의자(Utilitarian)의 입장이다. 공리주의자는 시장에서의 거래가구매자와 판매자에게 똑같이 이익을 제공하고, 결과적으로 집단의 행복이나 사회적 효용을 향상시킨다고 말한다. 돈을 지불한 사람과 돈을받고 대리로 줄을 선 사람 사이에 거래가 성립했다는 것은 결과적으로양측이 모두 이익을 얻었다는 뜻이다. - P52
미국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경제학 교과서 중 한 권을 저술한 동료경제학자 그레고리 맨큐(Gregory Mankiw)는 암표 판매를 예로 들어 자유시장의 미덕을 설명한다. 첫째, 경제적 효율성이란 "사회구성원 전체의 경제적 행복"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재화를 분배하는 것이다. 맨큐는 자유시장이 얼마큼의 돈을 지불할 의사가 있느냐를 기준으로 재화의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하는 구매자에게 재화를 공급함으로써 이러한 목적에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 P53
우리의 목적이 사회적 효용을극대화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자유시장이 줄서기보다 믿음직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재화에 기꺼이 가격을 지불하려는 것이 꼭 해당 재화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 가격에는 자발적으로 지불하려는 마음만큼이나 지불할 수 있는 능력도 반영된다. 셰익스피어 연극이나 레드삭스 경기를 가장 간절하게 보고 싶어하는사람이라도 입장권을 살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을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최고 가격을 내고 입장권을 손에 넣은 사람이라도 그 경험의 가치를 전혀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도 있다. - P55
암표 거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줄서기가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차별"이라고 비판한다. 맞는 말이지만, 시장이 돈 많은사람들을 유리하게 ‘차별‘한다는 말과 같은 맥락에서만 그러하다. 시장이 자발적으로 돈을 지불하려는 마음과 능력을 바탕으로 재화를 분배하듯, 줄서기는 자발적으로 기다리려는 마음과 능력을 바탕으로 재화를 분배한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가격을 지불하려는 마음이, 자발적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려는 마음보다 더 나은 가치 평가 기준이라고 추정할 근거는 없다. - P56
그런데 줄서기보다 시장논리를 옹호하는 공리주의자들의 주장은 더욱근본적인 반박에 부딪히기 쉽다. 즉 공리주의적 사고가 유일하게 중요한 견해는 아니라는 반박이다. 어떤 재화는 구매자와 판매자에게 부여하는 효용을 넘어선 가치를 지닌다. 재화의 분배방식은 재화가 지닌 본질의 일부일 수도 있다. - P57
이런 방식으로 생각한다면 돈을 받고 국회의사당 앞에 대리로 줄을서는 관행이 왜 잘못인지 알 수 있다. 한 가지 이유는 공정성 때문이다. 부유한 로비스트가 평범한 시민에게서 기회를 빼앗아 의회 공청회 방청권을 독점하는 행위는 불공정하다. 하지만 불공평한 방청권 획득만이 이러한 행위의 문제점은 아니다. 대리 줄서기 회사를 이용하는 로비스트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그렇게 거둔 세금으로 일반 시민이 대리 줄서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가정해보자. 보조금은 대리줄서기 회사가 할인율을 적용해 교환 가능한 쿠폰 형태로 지급할 수 있다. 이러한 정책을 실시하면 현재 시스템이 안고 있는 불공정성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회 공청회 방청권을 상품으로 바꾸는 행위는 의회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부패시킨다는 더욱 심각한 반대에 부딪힌다. - P58
부패라고 하면 흔히들 부정 이득을 연상한다. 하지만 부패는 뇌물이나 불법 거래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어떤 재화나 사회 관행을 부패시키는 행위는 그 평판을 깎아내리는 행위고, 가치를 합당한 수준보다낮게 평가하는 행위다. 이러한 의미에서 의회 공청회 방청권에 가격을매기는 것은 일종의 부패다. 의회를 대의정부의 기관이 아니라 하나의사업체로 생각하고 다루는 셈이기 때문이다. - P59
어떤 행위는 불쾌하게 여기지지 않는데, 돈을 지불하고 얻는 새치기 권리, 대리 줄서기, 암표 거래 등과 같은 사례는 불쾌하게 여겨지는 이유가무엇일까? 시장적 가치는 어떤 재화는 손상시키기도 하지만 어떤 재화에는 적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정 재화를 시장논리로 분배할지 줄서기로 분배할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분배할지 결정하기 전에, 우리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재화인지, 어떻게 가치를 매길 것인지 결정해야한다. - P60
가격을 지불하고 새치기하는 방법으로 라인스탠더 고용, 입장권 암표구매, 항공사나 놀이공원의 새치기 특권 직접 구매 등을 알아보았다. 이러한 거래는 자기 차례를 줄서서 기다리는 줄서기의 도덕을, 더욱 빨리 서비스를 받으려고 가격을 지불하는 시장의 도덕으로 대체한다. 시장과 줄서기, 즉 가격을 지불하는 행위와 기다리는 행위는 재화를분배하는 서로 다른 방식이며, 각 방식에 적합한 활동은 다르다. 줄서기 도덕은 ‘선착순‘ 원칙으로 평등주의적 매력을 지닌다. 따라서 적어도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면 특권 영향력·풍부한 재력 등을 무시할 수있어야 한다. . - P65
물론 시장과 줄서기가 재화를 분배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가치나 필요, 혹은 추첨이나 우연이 재화를 분배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대학교는 가장 먼저 지원하거나 가장 많은 돈을 등록금으로 지불하는학생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재능이 많고 장래가 유망한 학생들에게 입학을 허가한다. 병원 응급실은 환자가 도착한 순서나 진찰을 먼저받으려고 기꺼이 추가비용을 지불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증상의 위급한 정도를 기준으로 환자를 치료한다. 배심원 의무는 추첨으로 분배되고, 배심원으로 소환된 경우에는 다른 사람을 고용해서 자기 대신 의무를 수행하게 할 수 없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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