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말
행복한 동물학자의 삶
자연과학자가 할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동물행동학자가 될운명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저는 대관령과 동해 바다 사이 강릉 비행장 근처 학동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 논이 있던들판의 끝에는 강릉 비행장을 따라 동해로 흘러드는 제법 늠름한개울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개울에서 먹도 감고 소쿠리로 작은 물고기들을 잡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개울에 사는 물고기들은모두 그저 송사리 아니면 피라미 정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가잡던 그 물고기들 중에 가시고기가 섞여 있었다는 사실은 훨씬 훗날 미국에 가서 동물행동학을 공부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가시고기는 수컷이 새끼를 돌보는 물고기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몇년 전 외환위기 때 가족을 버리고 뛰쳐나간 엄마 대신 아이들을 돌보는 눈물겨운 아빠의 사랑을 그린 소설의 제목으로 더 잘 알려져있습니다. 1970년대 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난생처음 택한 동물행동학 수업 첫주에 가장 먼저 배운 동물이 바로 가시고기였습니다. 가시고기는 근대 동물행동학의 아버지 중 한 분으로 존경받는 영국 옥스 - P5
퍼드대학교의 니코틴버겐 교수가 평생을 두고 연구했던, 이를테면동물행동학계의 대표적인 스타동물입니다. 10년도 넘게 걸린 박사학위과정을 마치고 미시건대학의 교수가 되어 동물행동학을 가르치던 어느 날 한국에서 박사후연수과정을 밟으러 온 동료 생물학자가 가르쳐줘서 우리나라에도 산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동해로 흘러드는 강이나 개울에는 퍽 흔하답니다. 게다가 어디에서 주로 채집을 했느냐는 제 질문에 그가 얘기해준 곳은 뜻밖에도 어릴 적 제가 멱감던 비행장 옆 바로 그 냇물이었습니다. 저는제가 평생토록 연구할 학문의 스타 동물과 어릴 때부터 늘 함께 논셈이지요. 저는 제가 동물행동학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지극히 만족해하고삽니다. 아마 다시 태어나도 또 다시 동물행동학자가 될 겁니다. 아무 근심 걱정 없던 어린 시절 마냥 즐겁게 놀면서 하던 일을 지금까지 하고 있으며 버젓이 밥 잘 먹고 살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동물행동학은 비록 당장 떼돈을 벌게 해주는학문은 아니지만 더할 수 없이 재미있는 학문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신기한 동물들의 행동과 생태를 보여주는 TV 다큐멘터리를 보기 싫다는 사람은 별로 없는 걸 보면 확실히 재미는 있는 분야인 것같습니다. 하지만 동물행동학이 재미만 있고 돈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이제 버려도 될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는 미국 스탠퍼드대학 기계공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상배 연구원의 발명이 시사주간지 <타임>의 2006년의 발명‘으로 선정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열대지방의 건물벽을 자유자재로 기어다니는 도마뱀의 일 - P6
종인 도마뱀붙이의 발 구조를 모방하여 이른바 ‘끈적이로봇 "stickybor‘ 을 만들어냈습니다. 발바닥에 수백 개의 인공 미세섬모를가진 이 작은 로봇은 1초에 4센티미터의 속도로 유리와 타일 등 미끄러운 벽면을 유유히 기어다닙니다. 미국 국방부는 그의 발명품을스파이 로봇으로 활용할 방법을 구상중이라고 합니다. 지난 봄 세계적으로 유명한 우리나라 전자회사의 부장님이 저를찾아오셨습니다. 초콜릿폰이며 슬림슬라이드폰 등을 만들어 세계시장에서 판매경쟁을 하고 있지만 디자인 측면을 제외하면 휴대폰시장은 이제 한계에 도달했답니다. 그래서 까치, 말벌, 귀뚜라미, 소금쟁이를 비롯한 온갖 동물들의 의사소통 메커니즘을 연구하고있는 우리 연구진과 브레인스토밍 회의를 하자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면 전혀 새로운 신개념의 휴대폰을 개발할 수 있을지모른다는 생각에 돈버는 일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저 같은 생물학자를 찾아오게 된 것이지요. 그는 신입사원 면접에서 제 연구실 출신의 학생을 만나면서 이런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 이력서를 보니 제 연구실에서 석사학위를 했다고 적혀 있더랍니다. 그래서 동물의 행동과 생태나 연구하던 사람이 전자회사에 와서 뭘 할 수 있겠느냐고 사뭇 의도적으로 삐딱한 질문을 던졌더니 제 학생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합니다. "전자공학 공부한 사람을 수백 명 모아놓아 본들 그 머리들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는 다 고만고만할 것입니다. 강화도 갯벌에서흰발농게 수컷이 집게발을 흔들며 암컷을 유혹하는 행동을 연구한저 같은 사람의 머리에서 잘하면 대박을 터뜨릴 아이디어가 나올지도 모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학생을 경쟁 회사에 빼앗긴 그 부 - P7
장님은 아예 그를 길러낸 연구실을 찾기로 한 것입니다. 인간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늘 자연에서 배우며 살아왔습니다. 유럽의 동굴벽화와 울진의 암각화만 보더라도 고대의 인간들이 동물의 행동을 얼마나 세심하게 관찰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먹이동물의 습성을 유심히 관찰하던 과학자‘가 있던 동굴 집안이 그런것에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고 마구잡이로 사는 사람들만 모여 사는집안보다 훨씬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제 이런연구를 보다 체계적으로 하려는 세계 학계의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2006년 봄 서울대에서 이화여대로 자리를 옮기면서 ‘의생학연구센터‘를 만들었습니다. 의생학은 자연이 이미 고안해놓은 구조, 기능, 섭리 등을 인간의 삶에 응용하려는 노력을 하나의 체계적인 학문으로 정립하기위해 제가 새롭게 만들어낸 말입니다. 자연을 배워 응용하려면 기존의 지식체계를 넘나들 수 있는 융합 또는 통섭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기업과 사회는 이미 컨버전스, 퓨전, 하이브리드의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얼마 전 서울대학교가 개교 60주년을 맞아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중앙인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던 김광웅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이 같은 미래의 학문을 위해 ‘통섭대학원 의설립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걸 쪼개어 분석하던 환원주의의 20세기가 저물고 통섭의 21세기가 열렸습니다. 섞여야 아름답고, 섞여야 강해지고 섞여야 살아남습니다. 학계, 기업, 사회가 함께 섞여야 합니다. 이런 거대한변화의 선봉에 일찍이 비빔밥을 개발한 우리 민족의 모습이 보이는것은 아마 우연이 아닐 듯 싶습니다. 이 책은 밥에 콩나물, 쇠고기, - P8
달걀 등을 섞고 고추장과 참기름을 부어 비비고 싶어하는 학자, 기업인, 디자이너, 소설가, 학생 모두에게 풍부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할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 옛날 고대의 ‘동물행동학‘은 사실 상당히 실용적인 학문으로 시작했습니다. 동물을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그들에게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이제 통섭의 세기를 맞아 다시금 동물행동학은 너무나 순수해서 골동품처럼 취급되던 수준을 벗어나 엄청난 응용 가능성을 지닌 미래의 학문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히게 우수한 두뇌를 지녀 만물의 영장이 된 우리지만 사실 우리 인간의 역사는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일천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20여만 년 전에 지구촌의 가장 막둥이로 태어난 동물입니다. 그러니 우리보다 수천만 년 또는 수억 년 먼저 태어나 살면서 온갖 문제들에 부딪쳐온 다른 선배 동물들의 답안지를훔쳐보는 일은 지극히 가치있는 일일 겁니다. 이 책은 제가 <EBS 세상보기>라는 프로그램에서 2000년 3월부터9월까지 6개월 간 매주 한 번씩 26번에 걸쳐 했던 강의의 내용을 정리하여 만든 책입니다. 그보다 앞서 저는 1999년 5, 6월에는 자연과 인간‘이라는 주제로 4회, 그리고 2000년 1, 2월에는 ‘여성의 세기가 밝았다‘ 라는 주제로 역시 4회 강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EBS 측에서 프로그램 역사상 비교적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며 또 다른 강의 요청을 해왔습니다. 몇 번 거절하다가 제가 대학에서 강의하는 내용을 그대로 하게 해주면 고려해 보겠다고 했더니무슨 뜻이냐고 묻더군요. 동물행동학에 대한 학생들(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때로 상당히 개념적인, 그래서 시청률이 떨어 - P9
질 수밖에 없는 강의들도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더니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더군요. 그러나 결국 승인이 났고 저는 이 책에서도 보듯이 때론 한 시간내내 TV에서 게임이론 또는 최적화이론 등을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시청률이 그리 험악하게 떨어지지는 않았는지 제게 연장 강의를 요청해왔고 그러다 보니 결국 6개월 동안이나 계속 하게되었습니다. 한 학기 동물행동학 강의 전체를 TV에서 장장 6개월동안 한 것은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용감한 결정을 내려주신 EBS에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과 더불어 경의를 표합니다. 대학에서 하는 강의를 그대로 TV에서 하겠다고는 했지만 다양한시청자들을 고려하여 되도록 쉬운 말로 강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내용에 물을 타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최근몇 년 간 이른바 ‘과학의 대중화‘ 를 위해 많은 비용과 노력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노력이 지나치면 때로과학의 저질화를 범하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사실 ‘대중의 과학화‘ 입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사고할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과학을 알리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강의를 하던 시절 어느 날 저는 어느 농촌에 사시는 70대 어르신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제 강의를 들으신 다음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던 해충 문제를 보다 환경친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제가 가르쳐드린 대로 ‘과학적 실험‘ 을 하시기로 했다는 겁니다. 밭을 둘로 나눈 다음 한쪽에는 의도하시는 조처를 취하고 다른 쪽에는 동일한 노력을 투입하되 조처는 취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 P10
그 어르신께서는 바로 ‘실험군‘ 과 ‘대조군‘을 만들어 그 결과를 비교하여 결론을 내리시려는 시도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적인 실험의 기본입니다. 저는 그 어르신의 편지 한 장으로도 제가 6개월 간 강의한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TV에서 한 강의를 정리한 것이지만 동물행동학의 대학교재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언급하는연구들의 데이터를 인터넷 등의 매체를 이용하여 찾아 함께 공부하실 것을 적극적으로 권합니다. 동물행동학은 지금 몇몇 대학에 개설되어 엄청난 수의 학생들이 수강하는 인기 있는 과목입니다. 마땅한 교재가 없는 게 흠입니다. 동물행동학을 강의하시는 교수님은학생들로 하여금 이 책의 각장을 미리 읽고 오게 하고 시간 중에는원 논문의 내용을 강의하시면 될 것입니다. 제가 TV에서 강의할 때에도 퍽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시청하신 걸로 기억합니다. 이 책 역시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기때문에 다양한 연령층의 독자들이 읽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저는 소통의 힘을 믿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제가잘못 설명한 부분이 있다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아래에 있는 이메일로 문의해주십시오. 어차피 대학의 강의를 TV로 옮겼던 것을 책으로 만든 것입니다. 수업시간에 질문하듯이메일로 질문하시면 성의껏 답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더 많이배우게 될 것입니다. "알면 사랑한다!" 제가 늘 하는 말입니다. 이책을 통해 동물들에 대해, 자연에 대해 보다 많이 알게 되어 사랑하게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최재천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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