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11월에 한장 낙엽이 바람에 업혀 가듯 그렇게 조용히 떠나가게 하소서
한점 흰구름 하늘에 실려 가듯 그렇게 조용히 당신을 향해 흘러가게 하소서
죽은 이를 땅에 묻고 와서도 노래할 수 있는 계절 차가운 두손으로 촛불을 켜게 하소서 - P154
해 저문 가을들녘에 말없이 누워 있는 볏단처럼 죽어서야 다시 사는 영원의 의미를 깨우치게 하소서
- 이해인, <순례자의 기도> 중에서 - P155
내가 살아 있기에 새롭게 만나는 시간의 얼굴 오늘도 나와 함께 일어나 초록빛 새옷을 입고 활짝 웃고 있네요 하루를 시작하며 세수하는 나의 얼굴 위에도 아침 인사를 나누는 식구들의 목소리에도 길을 나서는 나의 신발 위에도 시간은 가만히 앉아 - P157
어서 사랑하라고 나를 재촉하네요 살아서 나를 따라오는 시간들이 이렇게 가슴 뛰는 선물임을 몰랐네요
- 이해인, <시간의 선물> 전문 - P158
시간은 날마다 지혜를 쏟아내는 이야기책 그러나 책장을 넘겨야만 읽을 수 있지 살아있는 동안 읽을게 너무 많아 나는 행복하다 살아갈수록 시간에겐 고마운 게 무척 많다………… - P160
신앙의 여정에서도 좀 더 특별한 것을 체험하고 싶고, 인간관계 안에서도 좀 더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고, 문학의 길에서도 좀더 멋지고 특별하고 싶은 욕심과 허영심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나를 괴롭힐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평범하지 않고서는 특별한 것도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날이 그날 같은 평범한 일상이 때로는 지루한 사막처럼 여겨지기도 할 테지만, 나를 시간속에 길들이고 성숙하게 하는 것은 바로 평범함을 견디고 충실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평범한 길에서 멀리 있어 눈물 흘린 날들도 많았지만 평범함의 행복을 다시살고 또 노래할 수 있어 행복한날들입니다. 한결같은 마음, 평소와 같은 마음이 낳아 주는 수수하고도 순수한 평상심시도의 주인공이 되도록 제가 사랑하는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P163
너는 네 말만하고 나는 내 말만하고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대화를 시작해도 소통이 안되는 벽을 느낄 때
꼭 나누고 싶어서 어떤 감동적인 이야길 옆 사람에게 전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 - P164
나는 아파서 견딜 수가 없는데 가장 가까운 이들이 그것도 못 참느냐는 눈길로 나를 무심히 바라볼 때
내가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며 화해의 악수를 청해도 지금은 아니라면서 악수를 거절할 때
누군가 나를 험담한 말이 돌고돌아서 나에게 도착했을 때
나는 어쩔수없이 외롭다 쓸쓸하고 쓸쓸해서 하늘만 본다
- 이해인, <내가 외로울 땐> 전문 - P165
바람에 실려 푸르게 날아오는 소나무의 향기 같은 것
꼭꼭 씹어서 먹고 나면 더욱 감칠맛 나는 잣의 향기 같은 것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고 사랑할 때의 평화로움 같은 것 - P169
누가 나에게 싫은 말을 해도 내색않고 잘 참아냈을 때의 잔잔한미소 같은 것
날마다 새롭게 내가 만들어 먹는 기쁨과자 기쁨 초콜릿 기쁨 음료수
그래서 나는 평생 배고프지 않다
- 이해인, <기쁨의 맛> 전문 - P170
‘이제 죽음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나는 깨닫는다. 만일 내가 나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수 있었을 것을 누가 아는가, 그러면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지!‘ - P179
기다리는 행복
온 생애를 두고 내가 만나야 할 행복의 모습은 수수한 옷차림의 기다림입니다. 겨울항아리에 담긴 포도주처럼 나의 언어를 익혀내 복된 삶의 즙을 짜겠습니다. 밀물이오면 썰물을 꽃이 지면 열매를 어둠이 구워내는 빛을 기다리며 살겠습니다. 나의친구여, 당신이 잃어버린 나를 만나러 더이상 먼 곳을 헤매지 마십시오. 내가 길들인 기다림의 일상 속에 머무는 나, 때로는눈물 흘리며 내가 만나야 할 행복의 모습은 오랜 나날 상처받고도 죽지 않는 기다림, 아직도 끝나지 않은 나의 소임입니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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