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김지수 지음, 이어령 / 열림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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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스승이 필요한 당신에게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달콤한 인생>의 독백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 평온하고 쓸쓸한 무드에 젖어 가슴이 미어지곤 했다. - P6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슬픈 꿈을 꾸었느냐?"
풀피리를 불 듯 그 질문을 내 입술 바깥으로 밀어내 달짝거려보았다. 인간이 아니라 시간이 주인공인 세계에서 속절없이 미끄러지는기분이 들 때마다, 나는 막막했다. 그리고 그리웠다. 울고 있는 내게 ‘왜 그리 슬피 우느냐?‘고 진지하게 물어주는 이가, 그런 스승이스승이란 무엇인가. 시인 이성복은 스승은 생사를 건네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생사를 공부하는사람이 스승이라고. ‘죽음의 강을 건널 겁먹고 급류에 휩쓸리지않도록 이쪽으로 바지만 걷고 오라‘고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몽테뉴가 그랬고,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모리 교수가 그랬다. 멘토나 롤 모델, 레퍼런스가 아니라 정확하게 호명할 수 있는 스승이 곁에 있다면, 우리는 애틋하게 묻고 답하며 이 불가해한 생을 좀 덜외롭게 건널 수 있지 않을까.

생의 길목마다 어김없이 돌부리에 걸려 머리가 하얘지는 내가 이어령이라는 스승을 만난 건 축복이었다. 선생님이 암에 걸려 투병중이던 2년 전 가을, 나는 당신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그때 선생님은 말했다.

"내가 느끼는 죽음은 마른 대지를 적시는 소낙비나 조용히 떨어지는 단풍잎이에요. 때가 되었구나, 겨울이 오고 있구나....… 죽음이 계절처럼 오고 있구나. 그러니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 - P7

선생님은 ‘라스트 인터뷰‘라는 형식으로 당신의 지혜를 ‘선물‘로남겨주려 했고, 나는 그의 곁에서 재앙이 아닌 생의 수용으로서 아름답고 불가피한 죽음에 대해 배우고 싶어 했다. 그렇게 매주 화요일, ‘삶 속의 죽음‘ 혹은 ‘죽음 곁의 삶‘이라는 커리큘럼의 독특한과외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사전에 대화의 디테일한 주제를 정해두지 않았고, 그날그날 각자의 머리를 사로잡았던 상념을 꺼내놓았다. 하루치의 대화는 우연과 필연의 황금분할로 고난, 행복, 사랑,용서, 꿈, 돈, 종교, 죽음, 과학, 영성 등의 주제를 타고 변화무쌍하게 흘러갔다.

그와 대화를 나눌 때면 그의 시한부 삶이 그의 입술 끝에 매달려전력질주하는 것 같았다. 그의 이야기가 소크라테스와 필록테테스와 니체와 보들레르, 장자와 양자 컴퓨터를 넘나들며 커브를 돌 때마다, 그 엄청난 속력에 지성과 영성이 부딪혀 스파크를 일으켰다.우수수 떨어지는 부스러기만 수습해도 남은 인생이 허기지지 않을것 같았다.

왜 케이스 바이 케이스에 진실이 있는지, 왜 인생은 파노라마가아닌 한 커트인지, 왜 인간은 타인에 의해 바뀔 수 없는지, 그럼에도우리는 파뿌리 한 개에 우수수 매달려 함께 천국에 가는지, 자족은무엇인지, 눈물은 언제 방울지고 상처는 어떻게 활이 되는지....... - P8

무엇보다 스승은 내게 죽음이 생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어 했다. 정오의 분수 속에, 한낮의 정적 속에, 시끄러운 운동장과 텅 빈 교실 사이, 매미 떼의 울음이 끊긴 그 순간...... 우리는제각자의 예민한 살갗으로 생과 사의 얇은 막을 통과하고 있다고.
그는 음습하고 쾌쾌한 죽음을 한여름의 태양 아래로 가져와 빛으로일광욕을 시켜주었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이 책에 가장 많이 나온단어는 죽음일 것이다.

그가 한 말은 때로는 이율배반적이었다. 우리는 모두 천사로 죽는다고 했다가 그 반대인 것 같다고도 했다. ‘죽음을 기억하라‘고한껏 엑셀을 밟았다가 ‘나 안 죽어‘라고 싱긋 웃으며 급브레이크를걸었다. ‘내게 다가온 죽음은 철창을 벗어난 호랑이가 덤비고 있는상태‘라고 말할 때조차 그는 진실하게 몸부림치되 겁을 먹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가 철창을 벗어난 호랑이 등을 타고 달리고 있다고 느꼈다. 죽음을 숙고하면서 죽음을 가지고 놀이를 시작한 이어령. 때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나의 선생님은 호흡이 멈추는 순간까지 스스로를 관찰하고 머릿속으로 죽음을 묘사하는 마지막 단어를 고르시겠구나.

남자들은 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면 추레해지기 마련이지만, 나의스승은 매주 화요일, 깨끗하게 다려진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목에‘확대경‘을 걸치고 나를 맞았다. 심지어 실내에서 모자를 쓰고 있기도 했다. 머리가 웃자라 있거나 면도를 하지 않아 얼굴이 석회빛을 띤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P9

‘탄생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간다던 당신의 약속처럼, 만날 때마다 선생은 소멸을 향해 가는 자가 아니라 탄생을 향해 가는 자다웠다. 태어나기 전 세상과 가까워질수록, 그의육체는 흙과 빛을 반죽한 것처럼 더 작아지고 밝아졌다. 내가 멋쩍은 눈으로 우문을 거듭하는 사이에도 그는 웃으면서 빛이 되어 부서지곤 했다.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마음껏 슬퍼했고 여한 없이기뻐했다. 한 번도 쓰지 못했던 감정의 근육과 지성의 근육이 자극받아 경련을 일으켰고,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가을 단풍, 겨울산, 봄의 매화, 그리고 여름 신록의 시간에 이르기까지・・・・・… 그는나의 흉곽과 나의 뇌곽을 뒤흔들어 ‘최대치의 나‘로 넓혀갔다. 스승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빌려온 진실은 빌려 입은 수의만큼이나 부질없다고 느꼈다. 이제 나는 나에게 꼭 맞는 영혼의 속옷을 찾았다.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 스승이 필요한 당신에게 이 특별한 수업의 초대장을 건넨다. 위로하는 목소리, 꾸짖는 목소리, 어진 목소리………… 부디 내가 들었던 스승 이어령의 목소리가 갈피마다 당신의 귓전에도 청량하게 들리기를.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슬픈 꿈을 꾸었느냐?"
"왜 그리 슬피 우느냐?" - P10

궁극적으로 이 책은 죽음 혹은 삶에 대해 묻는 이 애잔한 질문의아름다운 답이다. 더불어 고백건대 내가 인터뷰어로서 꿀 수 있었던 가장 달콤한 꿈이었다.

2021년 10월 김지수 - P11

<에필로그>

선생과의 대화를 기록하는 작업을 끝내고 나는 한동안 허둥거렸다. 넘치는 지혜의 꿀물을 들이켜다 흥분해서 종종 사레가 들렸고,불현듯 덮쳐오는 공허감에 새벽에 깨어 오래 앉아 있었다. 그럴 땐선생의 쓸쓸한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인간은 지혜를 아는죽는 자야. 그래서 슬픈 거라네.‘

나는 마치 그 유명한 애착놀이, ‘포르트-다‘에 빠져 있다가 어느순간 실타래를 놓치고 울상이 된 어린아이 같았다.
‘스승, 있다····· 스승, 없다.‘

‘없다‘의 데시벨이 높아지면, 머릿속이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의 전화가 걸려왔다. 천국에서 걸려온벨소리 같았다. 스승이라는 실타래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 P295

"눈감기 전에 꼭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네."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에 윤기가 돌았다. 오래전에 숙명여대에서 신입생을 위한 강연을 하고 내려오던길이었다고 했다. 여학생 한 명이 발을 동동 구르며 주차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추위에 얼굴이 파래져가지고, 나한테 꼭 할 말이 있다는 거야.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그러더군. ‘선생님, 돌아가시면 안 돼요!‘

생뚱맞은 말에 나는 몹시 당황했네. 그래서 그만 차갑게 툭 던지고 말았지. ‘학생! 그게 뭔 소린가? 죽고 사는 문제를 어떻게 내 맘대로 하나?‘

그 여학생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슬퍼하며 돌아갔네. ‘선생님, 그래도 돌아가시면 안돼요………….‘ 하면서. 얼마 전에 그날의일들이 떠올랐어.

그 아이는 아마 내 책을 읽고 나를 좋아하게 됐겠지. 그런데 한존재에 깊이 의지하면 ‘이 사람이 이 세계에서 사라지면 어쩌나 더럭 겁이 나거든. 어렸을 때 엄마와 애착이 심해지면 치맛자락 붙잡고 그러잖아. ‘엄마, 나 두고 죽으면 안 돼.‘

그때 어머니가 뭐라고 그래? ‘엄마 안 죽어. 너 두고 절대 안 죽어.‘ 그러면 마음이 풀리고 안심이 되지. 아무리 어린애라도 죽는다는 걸 왜 몰라. 그런데 엄마가 ‘너 두고 절대 안 죽는다‘ 그러면 그순간 우리에게 죽음이란 없는 거야. 우리가 죽음을 이기는 거라네."

선생님은 오래전에 스무 살이었던 그 여학생을 다시 만나 이야기 해주고 싶다고 했다. - P296

그때 그렇게 매정하게 떠나는 게 아니었다고.
30분 넘게 추위에 덜덜 떨며 당신을 기다리던 그 아이에게 이 말을했어야 했다고.

"걱정하지 마. 나 절대로 안 죽어."
스승은 환희에 차서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내게 해줬던 것처럼 ‘걱정 마. 나 절대로 안 죽는다‘ 그러면 그 아이는 얼었던 두 손을 비비며 너무 기뻐하겠지. 그 순간주차장의 자동차들은 팡파르처럼 경적을 울릴 거야. 죽음을 이긴승리의 트럼펫이 울리는 거야. 그러면 그 춥고 멋없는 콘크리트 차고는 초원으로 변하고 꽃들이 사방에서 피어나겠지."

만개한 꽃을 바라보듯 그가 웃으며 독백처럼 말을 마쳤을 때, 내두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책상 앞 통유리너머로 6월의 장미몇 송이가 바람에 산들거렸다. 마지막까지 스승이었던 분, ‘내가영화감독이라면 엔드 마크 대신 장미꽃 한송이를 올려놓겠다‘던그의 말이 그렇게 실현되었다.

"나 절대로 안 죽어."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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