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 코스톨라니 투자총서 1
앙드레 코스톨라니 지음, 한윤진 옮김 / 미래의창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서문

올해 2월 코스톨라니와 내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할 즈음에, 나는 이책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서문이 추도문이 될 거라고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9월 13일, 앙드레 코스톨라니는 93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그는 다리 골절의 후유증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그의 육신은 떠났지만, 그의 영혼은 생전의 저술을 통해 여전히 우리곁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는 이 책을 포함해 총 13권의 책을 남겼는데, 이 책들은 전세계적으로 각각 300만 권 이상 팔려 나갔다. 그는또 〈캐피탈(Capital)>이라는 잡지에 칼럼을 써 왔는데, 1965년 3월호에게재되었던 「한 투자자의 고백을 시작으로 올해 10월호까지 총 414회에 달했다. 그의 가장 큰 소망이 있었다면 그것은 2000년 1월호까지 <캐피탈>지에 칼럼을 쓰는 것이었다." <캐피탈>은 내게 2000년까지 지면을 보장하고 있지만, 정작 그때까지 내가 살 수 있다는 걸 누가 보장할 거야?"하고 그는 특유의 유머러스한 어투로 말하곤 했다.
또한 코스톨라니는 지난 35년 동안 수많은 대중 강연과 TV 강연을해 왔다. 그가 어디에 나타나든 - 다보스(Davos)의 경제 포럼에 나타 - P4

예버의 폴크스방크(Volksbank)에 나타나든, 텔레비전 주식 강좌에 나타나든, 혹은 해럴드 슈미트 쇼에 나타나든 그는 ‘깨끗한 자본주의‘를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언제나 유머와 정신적인풍요를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주식 투자의 원로였다. 그러나 코스톨라니에게 어떤 투자의비법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반드시 "나한테서 어떠한 투자의 비법도 기대하지 마십시오"라는 말로 강연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투자 유형이라고 하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은 은행이나 기관투자가들이 대중에게 돈을 우려 내려는 수작일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지난 35년 동안 수많은 조언들을 우리에게 던졌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을 소개하자면, "국제적인 우량주에해당되는 주식을 몇 종목 산 다음, 약국에 가서 수면제를 사먹고 몇년 동안 푹 자라"는 것이다. 이 조언을 십분 명심한다면 그의 예언대로 편안한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다. - P5

그는 또한 젊은 부모들에게 가장 현명한 충고 하나를 던져 주었다.
"자녀들의 교육에 투자하십시오!"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말이지만, 이것이 코스톨라니의 입을 통해서 나왔을 때는 그의 생의 무게가실린 금언(言)이 된다. 그가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그의 부모는 증권 투자를 배우도록 증권거래인 친구가 있는 파리로 그를 유학 보냈다. 이 교육 덕택에 그의 부모는 전쟁 통에 공산주의자들에게 재산을몽땅 빼앗긴 후에도 스위스에서 편안한 노년을 보낼 수 있었다. 막내아들인 앙드레가 그들의 재정 지원을 책임졌던 것이다.
"인생을 즐기십시오!" 이 말은 그가 자동차를 타고 부다페스트를통과하면서 사람들에게 했던 말이다. 이 한마디는 그의 열정의 표현이자, 그가 죽을 때까지 지켰던 일생의 잠언이었다. 그는 여러 방면에서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고전음악을 사랑했던 그는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가수>와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로젠카발리에>를 100회 이상 보았으며 스트라우스와는 개인적인 교분을 갖기도했다. 그는 최고의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오페라나 연주회가 있을 때는 하루 저녁의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밀라노로 날아가기도 했다. - P6

고전 음악을 즐기고 좋은 담배를 피우며 증시에 대해서 신중히 생각하는 것, 이것은 그에게 큰 기쁨이었다. 물론 담배는 후에 건강상의 이유로 끊었지만,
코스톨라니는 ‘삶‘뿐만 아니라 ‘일‘ 역시 즐길 줄 알았다. 그의 청중이 그를 필요로 했던 것처럼 그 역시 청중을 필요로 했으며,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젊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의 싱싱한 ‘생명력‘의비결에 대해 사람들이 물으면, 그는 항상 ‘정신적인 에어로빅‘이라고대답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는 음악을 듣고 신중하게 생각하는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계속 스로에게 도전했다. 그는 1998년에만 30회 이상의 강연을 했고, 텔레비전 방송에도 출연했으며, 인터뷰도 마다하지 않았다. 강연을 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거나 혹은 자동차를 타고 장시간 여행을 해서 몸이 파김치가 될 지경에 이르러도 코스톨라니는 강단에서 안락의자에 앉기를 거부했으며, 항상 연단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열정적으로 강연을시작하여 재미있고 진지한 시간을 이끌어냈다. 결국 그는 기립박수로 강연을 마치곤 했던 것이다. - P7

앙드레 코스톨라니는 두 세대에 걸친 독일 증권거래 시장의 우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의 방식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최고 스타의 궤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젊은 사람들이 그에게 사인을요청해도 그는 항상 거절했다. 사람들의 간청에 못 이겨 할 수 없이해야 할 때도 그는 항상 "저는 록스타가 아니에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자칭 ‘방랑 연설자‘가 되기 전에는 아내와 함께 파리나 제2의고향인 뮌헨에서 살았다. 뮌헨에 살 때는 점심때면 대로인 히포 파사지에 있는 카페에 들르기도 했고, 저녁때는 막시밀리언 거리에 있는 전형적인 이태리 음식점 ‘로마‘에 가거나 아우스테른켈러에 가곤했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식당으로는 역시 파리의 식당들을 꼽았다.
파리에서는 점심때가 되면 마르뫼프가에 있는 레스토랑인 ‘체스앙드레‘에서 종종 시간을 보냈다. 거기에는 그가 좋아하는 파리 최고의굴 요리가 있었다. 디저트로는 초콜릿 케이크와 얇은 빵을 즐겨 먹었다. 그 다음에는 샹젤리제에 있는 유명한 ‘푸케 카페‘로 갔다. 그곳은 1924년 이후 전쟁 기간을 빼고는 코스톨라니의 단골집이었다. 그리고는 오후가 되면 규칙적으로 낮잠을 즐겼고, 저녁에는 파리의 명소인 브라스리엥으로 갔다. - P8

특히 그는 몽파르나스에 있는 라꾸뽕(IaCoupole: 프랑스 학원,편집자 주)을 좋아했는데, 그에게는 그곳이 1930년대 아주 열정적인 날들의 추억이 어린 곳이기 때문이었다.
앙드레 코스톨라니는 1917년 이후 한순간도 쉬지 않고 돈과 주식에 몰두했으나 결코 금전숭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가 투자할 때 심각하게 고려한 것은 돈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자신의 결정이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에게 상당한 기쁨이기도 했다. 그는 기꺼이 스스로를 주식투자자라고 칭했는데, 그에게 투자 행위는 ‘지적인 도전 행위‘였다. 그는 항상 돈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했으며, 이러한 태도야말로 투자자가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전제라고 말했다. 코스톨라니는 기세등등하지도, 탐욕스럽지도,
돈으로 뽐내지도 않았다. 그에게 있어 돈은 목표를 향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가 나치를 피해 도망쳤을 때 돈은 위기 상황 속에서 그를 보호해 준 방패막이가 되었고, 말년에는 최고의 의학적인 치료를 가능하게 해주었으며, 덕분에 그는 편안하고 즐거운 생을 누릴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거창한 노력 없이 무엇인가를 절약할 수 있다면 항상 그렇게 했다. - P9

그를 강연자로 초청한 회사에서 1등석 비행기표를 보내면, 그는 자신이 너무 말라서 1등석의 넓은 자리를 채울 수 없다고 하면서 2등석으로 바꿔 타기도 했다.
세계 시민이었던 코스톨라니는 무엇보다도 재정적 독립을 즐겼다.
그가 생각하기에 재정적인 독립은 건강 다음으로 중요한 최고의 선이며 가장 귀한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독립‘의 의미는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고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하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하기 싫다"고 말할 수 있고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코스톨라니는 칼럼니스트로서도 자신의 독립성에 무척 자부심을 가졌다. 1970년대 IOS의 헤지펀드에 대한 투쟁, 1980년대의 금본위제도 반대 로비 그리고 1990년대의 구 동독시장과 분데스방크(독일중앙은행)에 대한 반대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던 그는 어떠한 투쟁에서든 항상 신념에 찬 행동가의 모습을 보였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본 일부 비판가들은 그가 일부러 뚜렷한 투쟁의 구도를 만들어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고 한다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를 인간적으로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일상 생활에서도 마치 칼럼이나 강연에서처럼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열광적으로 싸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P10

그가 여든 살이었을 때 한번은 어느 기자가 그에게 20세로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지금 날 놀리는 거요? 난 지금에 만족한다. 다만 분데스방크와 싸우기 위해 한 10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소"하고 대답했다.
이미 오래 전에 코스톨라니는 유명한 정치가인 오스카 라퐁텐(Oskar Lafontaine: 독일의 유명한 좌파 정치가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를 저술하였음-편집자 주) 앞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내 심장은 왼쪽에서 뛰고 있소. 그런데 내 머리는 오른쪽에 있고,
내 지갑은 오래 전부터 미국에 있다오."
그는 수십 년간의 주식시장 경험을 통해 경제 영역에서는 현실과이론이 따로 논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앙드레 코스톨라니의 최후의 역작이다. 1999년 초부터 임종을 맞이할 때까지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책에 쏟았다. - P11

파리의집에 머물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작업을 끝마치고자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서문은 쓰지 못했다. 독자에게 빚을 진 셈이다.
그는 이 책을 쓰면서 독일텔레콤의 상장을 통해 새로 형성된 주식투자자 층과 고민을 나누고자 했다. 그는 독일 사람들이 주식 투자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을 매우 환영했으며, 반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주식 도박광에 대해 염려했다. 이 책에서 코스톨라니는 주식 및 다양한 투자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코스톨라니는 몇 년 전부터 증권거래소에 가지 않았는데, 그이유를 『미래의 결산』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유인즉, 전지전능한 신이 증권거래소에서 자기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까봐 두려워서라는 것이다.
"뭐? 그 늙은 코스토가 아직도 거기에 있어? 이제 그만 나오라고해. 이제 내가 그의 도움을 좀 받아야겠어. 그의 오랜 친구들도 모두여기 와 있고, 그의 자리도 마련해 놨으니까."
그리고 언젠가 신이 자기를 불러들였을 때 거기서 만난 친구, 제자, 독자들이 "코스토가 옳았어!"라고 말하면 너무도 행복할 거라고도 썼다. - P12

사랑하는 앙드레, 자네가 하늘에서 앉아 주식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좋겠네. 그러면 자네의 낙관주의와 대립했던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이 늦었지만 자네가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거야.

1999년 12월

브레멘에서

스테판 리쎄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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