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유대교는 내생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에 대해 별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대개 정통 유대인들은 내생을 거의 혹은 전혀 믿지 않는데, 그것은 유대교의 성전인구약성서가 그 문제에 대하여 거의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유대인들이 유대 종족과그 존속에 크게 의미를 두는 것은 앞서 언급한 유물론자와같은 경우이다. 물론 그 내용은 다르다. 즉 유대인은 종족존속에 관심을 쏟음으로써 개인의 사후 존속에 대해 거의생각하지 않는 반면, 유물론자는 개인의 사후 존속을 부인하기 때문에 종족의 존속에 희망을 걸곤 한다.
- P17

프로이트의 전기를 쓴 어네스트 존스 같은 위대한 심리학자까지도 내생을 믿는 마음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어떻게든지 내생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할 수만 있다면, 한 걸음더 나아가 심리분석이나 그와 비슷한 방법으로 사후 소멸의 두려움을 없앨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을 것이다. 그러나이러한 시도들이 성공하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므로 그의주장은 설 땅을 잃고 만다. - P19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는 사후 존속을 믿는 사람들이나 믿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각기 나름대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영매나 심령주의자나 신을 믿는 종교의 골수분자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이상 그는 아마 의심에 시달리거나 고작해야 자기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막연한 상태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여러 가지 엉뚱한 억측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리고 어떤근거로 그러한 억측들이 가능한지 가늠조차 하지 못한다. - P21

존스 박사와 같은 학자들이 공포심을 덜기위해서는 내생을 믿어 보려는 마음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실제로 그것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더구나 존스식해결 방법이 이 사회나 개인에게 미치는 악영향은 심리적억압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원래 사후 존속을 부정하는 사고방식은 유물론적 세계관에서 비롯했고 아직도 많은 과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실상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며 인간 생명에대한 우리의 존엄성을 훼손시키고 있다. ‘동물은 영혼을가지고 있지 않다‘는 전통 기독교적 견해는 실제로 그 부분에서는 유물론적 입장에 선다. - P22

임종 때 혼미하여 의식을 놓치면 죽는 사람은 금생에 그러했던 것처럼 맹목성과 혼동을 그대로 지닌 채 다음 생으로넘어가게 된다. 그렇다 해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내생 같은것은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이러한 배려를 전혀 가치 없는 것이라고 일축할 수도 있다. 설사 내생이 없다 치더라도 임종을 맞는 많은 사람에게서 내생이 있다는 위안을 박탈하는 것은 매우 잔인한 일이다.

그렇게 볼 때 일부 인본주의자들이 병원 주재 성직자 제도를 폐지하자고 하는 것은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병원주재 성직자들 가운데 일부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대다수는 환자나 임종을 맞는 사람들에게어느 정도 위안을 줄 수 있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높은 수행을 쌓은 스님이 그런 일을 맡는 것이다.
- P25

죽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 그 시간이 불확실할 뿐
Mors certa - hora incerta.

이와 같은 생각을 항상 지니는 것은 불교도가 닦아야 할정견正見, 바른 견해 수행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그런의미에서 (서구에서는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지만) 죽음을 주제로 한 불교의 명상 수행은 마땅히 권장되어야 한다.
- P26

불교도에게 있어서 죽는다는 것은 실제로 완전한 끝장이 아니라 다만 우리를 현생에 묶어 놓는 모든 고리들이일단 끊어짐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과 그 즐거움에서 초연하면 할수록 죽음을 맞을 올바른 준비를 한셈이고, 그것이 불사不死의 경지에 이르는 팔정도를 따라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불사는 죽음이 없는 상태인 열반Nibbāna, amatam을 가리키는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팔정도 수행이 완성의 경지에까지 가지 못한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곧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윤회samsira는그 자체가 끊임없는 생사의 반복일 뿐이다. - P26

우리는 죽으면 곧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을 똑바로 알아야만 한다. 
불교에서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태어나는 곳이 아무리 행복한 선처善處라 할지라도 그것조차도초월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할 때에만 성취될 것이다. 

그러나 초보 단계에서는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는 재생에 집착하는 마음까지도 점차 극복해야만할 것이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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