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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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타 뮐러의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친위대였다.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의 수용소에서 5년간 노역했다. 전후 루마니아의 소수 독일인들은 히틀러의 몰락과 독재정권의 탄압 속에서 강도 높은 감시를 당하며 두려움에 떨어야했다. 독재와 감시에 시달리는 이들의 강박을 제하면 그의 문학이 성립할 수 없듯이, 헤르타 뮐러의 가족력과 루마니아의 독일계 주민의 역사는 그가 평생을 천형처럼 매달리게 되는 테마가 된다. 삶과 문학이 서로를 비추어 공포의 시대를 무력하게 살아낼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모습을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에서 다시금 해후한다. 

히틀러의 몰락과 더불어 영락해버린 이방인들, 슈바벤 주민들은 이중의 감시, 이중의 탄압, 이중의 수치, 이중의 절망을 안고 산다. 쉽게 버릴 수도 없고, 버려지지 않는 삶에 대한 유일한 희망은 독일로의 이주뿐이다. 추방과도 다름없지만 자발적인 망명으로 포장되어진 채, 이주를 염원하는 이들을 둘러싼 거래에서는 거의 모든 부정한 것들이 판을 친다. 거대한 독재 못지않은 구석구석에 깃든 악취, 생존의 대가로 치러야할 인간다움의 상실, 신뢰와 애정 대신 자리 잡은 협잡과 추문의 향연으로 들썩이는 이 작은 마을은 『저지대』에서 이미 만난 적이 있었다. 

빈디시는 이장의 집에, 경찰에게 쉴 새 없이 밀가루 포대를 나른다. 5번만 옮기면 나올 것 같았던 여권은 해가 바뀌어도 발급되지 않고, 밀가루 포대 이상의 무언가를 이장, 경찰, 주임신부에게 바치지 않으면 영영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권과 서류를 허가해주는 일이 이루어지는 은밀한 장소인 권력자의 침대에 외동딸을 밀어 넣어야하는 빈디시의 용납할 수 없는 심정과는 달리 아내는 딸 아말리에가 잡은 기회를 적극적으로 반긴다. 육신을 욕보이는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낙오와 기회를 잃는 것이 수치스러운 것임을 아내는 수용소 시절에 이미 겪은 바가 있음으로 해서. 

「저지대」에 등장했던 어느 촌로는 슈바벤 마을이 샤르데냐 같은 섬이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푸념한다. 슈바벤 공동체의 지정학적인 특수성은 그네들을 더욱 고루하고 편협하게 만들고, 챠우세스쿠 시절은 이를 더욱 강화하고 무력감을 대물림하게 한다. 밀가루 포대, 모피 외투, 유리 세공품, 가축이며 농작물을 모조리 바치고, 그들의 아내와 딸들을 은밀한 침대에 밀어 넣은 후 가까스로 얻게 된 이주의 기회는 자유와 희망을 보장해주는 듯 했지만, 새 땅에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것을 또 다른 슈바벤 공동체의 축소판이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오욕의 더불어.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라고 말하던 야간경비원은 재혼을 하고 마을에 남기를 자처한다. "인간은 강해. 짐승보다 더 강하지(p. 15)" 인간은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도 전쟁과 수용소를 뒤로 할 수 있다. 살아가기 위해 무감해지고, 살아내기 위해 용서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은 살아남게 된다. 그렇지만 생존이 곧 극복은 아니며, 흉물스러운 과거는 흉터를 남긴다. 날개가 둔화된 꿩은 위협을 받으면 자기 몸에 머리를 묻는다. 옥죄이는 공포가 야기한 절망은 근시안적인 자기보신과의 타협을 강요한다. 루마니아의 독재자와 슈바벤의 음험한 유지들을 뒤로하고 자유에의 이주를 성공했을지라도, 결코 맞바꾸거나 내주어서는 인간다움을 상실했다면 그들이 자유의 땅에 건설하는 것은 또 다른 슈바벤 촌락일 수밖에 없다. 

공포와 불안이, 감시와 위협이, 부패와 부정이 어떻게 인간을 잠식해나가는지, 인간을 '세상의 거대한 꿩'으로 전락시키는지에 대한 헤르타 뮐러의 보고서는, 날카롭게 단련된 언어로 이루어진 고발장이다. 이 정제된 자성적 문학은 전쟁과 독재의 파괴력이 이름과 모습을 달리해서 등장하는 그리 낯설지 않은 현실과의 싱크로를 불러일으킨다. 빈디시, 그의 아내 카탈리나, 외동딸 아말리에와 그 주변인들이 이름과 모습을 달리해 곳곳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을 느낀다. 불온한 시대, 인간은 머리를 묻는 대신 누추한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 꿩이길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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