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니에서 아침을 - HD 리마스터링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 오드리 헵번 외 출연 / 피터팬픽쳐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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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을 너무 많이 들어서 보지 않았는데도 본 것처럼 생각이 되는 작품들이 있다. 주로 고전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인데, 그 중에 <티파니에서 아침을>도 있다. 오드리 햅번이 나왔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는데도 굉장히 잘 아는 것 같은 친숙한 느낌을 주는 영화다. 

  어제 <티파니에서 아침을> 리마스터링 상영회를 보고 왔다. 옛날에 만들어진 영화인데도 지금 봐도 충분히 사랑스럽다. 

  할리 고라이틀리와 같은 아파트로 이사온 폴 바젝. 작가지만 단편집 한 권 낸 이후로 재능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핑계로 글을 쓰지 않았던 폴 바젝은, 동생의 이름을 따 자신을 프레드라고 부르는 아랫집 할리와 친구가 된다. 할리는 굉장히 매력적이지만, "한 번도 안 해본 일"이라고 말하면서 결혼을 하고, "한 번도 안 가본 곳이니까"라고 말하면서 훌쩍 뉴욕으로 떠나고, 티파니와 닮은 집에 가기 전까지는 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엉뚱한 면이 있다. 할리를 만난 후 폴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고, 할리에게 점점 빠져드는데...... 종잡을 수 없는 할리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갑부와 만나 결혼하겠다는 당당한 포부를 폴에게 밝힌다. 할리는 갑부와 결혼할 수 있을까? 폴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할리와 폴(프레드)은 아주 많이 닮았다. 사랑이 아닌 필요에 의해 연애를 하고, 돈과 성공을 추구하고, 발 디딜 곳이 없어 불안하고 우울해한다. 다만, 폴이 할리보다 조금 더 솔직하고 용기가 있었던 것 같다. 현실을 진짜라고 인정하면서, 한 발 내딛을 수 있는 용기. 

  티파니 매장에 가서 할리와 폴이 가져온 것은, 과자 박스에서 나온 장난감 반지 위에 티파니가 새겨준 글귀 뿐이다. 할리/폴은 마치 그 반지-티파니의 반지가 되기를 꿈꾸는 장난감 반지 같다. 할리의 친구는 할리를 가리켜 "할리는 가짜야. 하지만 진짜 가짜지."라고 말한다.

  나는 티파니 제품이라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그냥 장난감 반지일 뿐이라고 냉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반지를, 티파니가 글귀를 새겨준 특별한 장난감 반지라고 고스란히 인정하는 건 조금 힘든 일인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인정하는 것에서 뭔가가 시작되는 건 아닐까. 결국 폴은 새로운 글을 썼고, 할리는 고양이를 찾아 택시에서 내렸다.

  마지막 부분을 보며,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는 영화가 잊히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자막에 오타가 정말 어마어마했다는 거다. 오타는 뒤로 갈수록 늘어났는데, 가끔은 대사를 해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 했다. 덕분에 몰입이 툭툭 깨져서 조금 슬펐다. 

 

p.s.  할리 고라이틀리 역을 맡아 아름답고 우아한 오드리 햅번도 좋았지만,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무엇보다 돋보였던 배우는 이름 없이 고양이라고 불리는 노란색 고양이다. 정말 귀여웠다.  

 

2011.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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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니아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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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확히는 별 네 개 반.

  나는 그리스로마신화를 좋아하고, 그래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도 읽어봤지만,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아스>를 읽어본 적은 없다. <일리아드>에도 아이네아스는 나오지만, 포스가 막강한 아킬레우스 헥토르 아가멤논 오디세우스 등등에 눌려 별로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네아스에 대해 앙키세스와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났고, 아프로디테가 이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에 가끔 개입하고, 싸우는 능력은 그럭저럭 중간이고, 엄마 닮아 미남이고,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표류하다 로마에 도착해 시조가 되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라비니아>에 관심을 가진 건 애초에 서사시 <아이네아스>나 인물 '아이네아스'에 대한 호기심은 아니었다. 나는 이 이야기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아스>를 기반으로, 거기에서 주목받지 못한 라티움의 왕녀 라비니아 시점으로 풀어낸 이야기라는 데에 흥미를 느꼈다. 고전의 재해석은 언제나 흥미로운 주제다. 

  <라비니아>는 꽤 독특하다. 일단, 이 글은 라티움의 왕녀 라비니아의 1인칭 시점이다. 그러나 라비니아는 사건에 주도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겉으로 보기엔 '조용한' 캐릭터이고 그래서 그녀는 관찰자같은 느낌을 풍긴다. 더군다가 이 이야기에는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직접 등장하여 자신의 서사시에 대해 라비니아에게 말해준다. 라비니아는 처음부터 자신이 서사시 속의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이런 모호한 정체성은 서사시의 등장인물이 당시 상황을 다시 읊어주는 느낌을 획득한다. 그래서 <라비니아>는 원작의 재해석이라기보다는, 마치 원작에 딸린 주석과 같다.

  <라비니아> 속의 아이네아스는, (내가 호메로스의 시를 보며 생각했던 것과 똑같이) 그다지 위대한 장수는 아니다. 아이네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가 "남자다움이란 곧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할 때, 아이네아스는 트로이 전쟁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이 아킬레우스, 헥토르, 아가멤논과 싸웠다면 아마 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아이네아스는 쟁쟁한 영웅들 사이에서는 좀 초라한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라비니아>에서 아이네아스는 다른 종류의 영웅적 면모를 보여준다. 사람들을 이끄는 위대한 지도자로써의 모습 뿐 아니라, 한 개인으로써도 자신에게 부끄러움 없이 살려는 "경건한" 모습 말이다. 그는 침묵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인내할 줄 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줄도 안다. 그런 아이네아스를 보며 남자다움, 영웅다움이란 싸움에서 이기는 것 이상의 미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라비니아>에서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은 라티움의 왕녀 라비니아이지만, 이야기의 핵심에는 여전히 아이네아스가 놓여 있다. 그는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와 함께 이야기의 주춧돌로 놓여있기는 하지만 등장횟수 자체는 그다지 보잘 것 없다(더구나 이 이야기는 그의 모험의 끝부분-라티움으로 와서 아이네아스 일행이 정착하는-에 해당한다). 아이네아스가 와서 라티움의 왕이 된 이야기보다, 그 전/후의 이야기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핵심은 여전히 아이네아스이다. 아이네아스가 사라진 후에도 그가 미치는 영향력을 보면, 그가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이야기 흐름에서 조금 뒤에 물러나 있는 것은 아이네아스 뿐만이 아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는 앞에서 이야기를 끌고갔던 신들 또한 <라비나아>에서는 한 걸음 뒤에 물러나 있다. 그들은 직접 인간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일에 개입하는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징조와 계시를 통해 인간에게 나타난다. <라비니아> 속 사람들의 생활 구석구석에는 종교가 깊이 개입되어 있고, 그리하여 이러한 간접적인 입김도 이야기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다. 

  21C를 살아가는 나에게 이들의 삶의 방식이 상당히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온다. 그들의 삶은 운명적이다. 징조와 계시로 나타나는 것들을 그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아이네아스는 운명에 의해 방랑하다 라티움에 와 정착했고, 라비니아는 운명에 의해 투르누스가 아닌 아이네아스(라티움의 남자가 아닌 이방인)과 결혼했다. 이러한 운명 또는 숙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감각은 생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비니아>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푹 빠져들어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이야기 속에서 모든 일은 정해진 대로 흘러가지만(징조는 모두 현실이 된다) 그 안에는 사람들의 치열한 고민과 선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과 선택 한가운데에 '경건함'이라는 단어가 있다. 인내, 용기, 순응, 믿음- 어떤 단어로 "경건함"이라는 단어를 대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경건함"은 아이네아스에게도 라비니아에게도 그리고 실비우스에게도 있었다. <라비니아>에는 이러한 "경건함"을 갖춘 사람과 "경건함"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 대한 대비가 두드러지는데, 대체로 "경건함"을 갖춘 사람은 옳은 방향으로 그리고 "경건함"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나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라비니아의 아버지 vs 라비니아의 어머니, 아이네아스 vs 투르누스, 아스카니우스 vs 실비우스.

  그러나 이 인상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아이네아스가 투르누스를 격정에 의해 죽이고 운명과 양심에 대해 고민한 것을 보면 말이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이러한 아이네아스의 고민이 비중있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네아스의 고민은 스치듯 지나간다. 그리고 라비니아와 실비우스에게는, 이러한 갈등을 야기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단순히 운명과 경건함, 따르는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조금 더 깊이 삶과 인간과 운명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었던 이야기가 발만 살짝 담그고 빠져나온 느낌이라 무척 아쉬웠다.

  <라비니아>는 로마가 형성되기 전, 조금은 생소한 작은 세계를 보여준다. 베르길리우스가 노래한 서사시 <아이네아스>를 기반으로 두고 있지만, <라비니아>는 모험보다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모험이 시작되기 전에도 끝난 뒤에도 계속되는 것임을 알게 해 준다. <라비니아>는 첫 번째 페이지를 펼쳐들었을 때부터 사람을 확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라비니아나 아이네아스 등의 인물 뿐 아니라, 라티움의 사람들, 그들의 삶과 종교 등이 더없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라비니아>는 아주 매혹적이고, 그래서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아스>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긴다. 어슐러 르귄 여사는 저자후기에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아스>를 현대어로 옮겼을 때 그 매력을 완벽히 살릴 수 없다면, 서사시라는 장르를 소설이라는 장르로 옮기는 변화를 주어 <아이네아스>를 되살리고자 했다고 말한다. 별 관심 없던 서사시에 대한 호기심을 끌어냈으니, 그녀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듯 하다.

  

p.s.

  실비우스와 아스카니우스의 이야기가 더 보고 싶었는데 축약되어 아쉽다. 하지만 라비니아의 이야기니까 어쩔 수 없나 싶다.  

 

2011.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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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업 - 세계 최고의 범죄소설 작가들이 창조한 위대한 탐정 탄생기
켄 브루언 외 지음, 오토 펜즐러 엮음, 박산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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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 탐험가들>을 읽고 나서, 데이비드 모렐의 다른 책은 없나 검색해보다가 알게 된 책이다. 이 책이 탄생한 비화는 꼭 한 편의 소설 같다. 스릴러 전문 서점을 경영하던 오토 펜즐러는 경영난이 닥치자 어떻게 서점의 수익을 올릴까 궁리하던 와중에, 유명한 범죄소설 주인공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엮어내어 독자에게 제공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그 기획은 성공했고, 기획의 결과물들을 엮어낸 책이 바로 이 <라인업>이다.

  숨겨진 이야기들은 늘 흥미롭다. 그게 내가 좋아하는 시리즈(혹은 캐릭터)의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라인업>은 매우 흥미로운 소재를 가지고 있지만, 아쉽게도 내가 아는 시리즈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라고 생각하며 두근두근거리며 읽기보다는 "오, 이 캐릭터 설명을 보니 이 시리즈는 좀 재미있겠다.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이 책에는 21명의 작가와 시리즈가 등장하고 있는데, 국내에 소개되지 않거나 한두 편만 소개된 시리즈가 많다. 아예 그 작가 자체가 국내에 소개되어 있지 않기도 하다. (아래는 인터넷서점에서 검색해서 나온 정보다. 괄호 안이 작가의 책이 국내 소개된 총 권수, 괄호 안의 괄호는 <라인 업>에서 소개된 시리즈 권수. 막검색이라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마이클 코넬리와 제프리 디버 외의 작가들은 대부분 소개된 책이 몇 권 없었다. 그리고 절판된 소설은 대부분 1990년대 초에 국내에 소개되었다. 


켄 브루언(1권), 리 차일드(4권(시리즈 1)), 존 코널리(3권(시리즈 1)), 로버트 크레이스(4권(엘비스 1, 조 1)), 콜린 덱스터(총 6권 중 3권 절판(시리즈 4권)), 존 하비(없음), 스티븐 헌터(1권(시리즈 1)), 페이 켈러맨(없음), 조너선 켈러맨(조나단 켈러맨? 4권 모두 절판), 존 레스크로아트(없음), 로라 립먼(1권), 데이비드 모렐(15권, 현재 14권 절판), 캐롤 오코넬(없음), 로버트 B. 파커(7권 모두 절판), 리들리 피어슨(3권 모두 절판, 다른 작가와 공저한 피터팬 시리즈 4권 존재), 앤 패리(없음), 더글러스 프레스턴&링컨 차일드(3권(시리즈 2)), 이언 랜킨(2권(시리즈 1)), 알렉산더 매컬 스미스(7권(시리즈 5))

  상당히 슬픈 결과다. <라인업>에서 소개된 이 캐릭터를 더 보고 싶다, 라고 생각해도 볼 수 있는 길이 별로 없으니까.

  하지만 작가가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말하는 내용 자체는 흥미로웠다. 똑같이 자신이 쓴 시리즈물에 나온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도, 집어내는 포인트도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도 작가들마다 다르다. 아예 소설의 한 대목처럼 꾸며서 캐릭터의 약력을 짚어주는 작가도 있고, 그 캐릭터를 만들게 된 계기를 말하는 작가도 있고, 캐릭터의 특징을 말하는 거나 캐릭터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혹은 그 캐릭터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말하는 작가도 있다. 그리고, 작가는 범죄소설 주인공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을 뿐이지만, 가만히 읽다 보면 작가의 생각, 환경, 삶이 엿보인다. 캐릭터가 어떻게든 작가의 일부를 이어받는다는 건 꽤 재미있는 발견이다.

  범죄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 읽어봄직하다. 어떤 범죄소설이 취향에 맞을 것인가의 가이드라인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의 비하인드 스토리로 즐길 수도 있고, 내가 작가라면 어떤 캐릭터를 만들어낼지 힌트를 얻을 수도 있을 법한 책이다. 꽤 재밌었다.

 

2011.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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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독방의 문제 동서 미스터리 북스 55
잭 푸트렐 지음, 김우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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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안락의자 탐정을 좋아한다. 발로 뛰어다니면서 범인을 잡아내는 탐정도 매력적이지만, 앉은 자리에서 기묘한 사건을 단번에 풀어내는 안락의자 탐정에게는 헤어나올 수 없는 매력이 있다(천재란 언제 보아도 매력적인 단어다). <13호 독방의 문제>를 읽게 된 것은 이 책에 안락의자 탐정이 나오기 때문이다. 오거스터스 S.F.X. 반 도젠 교수의 별명은 무려 '사고 기계'다. 그는 논리대로 풀어나가면 못 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이성의 화신 같은 사람이다.

  <13호 독방의 문제>에는 표제작인 '13호 독방의 문제' 외에 12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대부분의 단편이 '범행 수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언뜻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가 생각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13호 독방의 문제', '수수께끼의 흉기', '정보 누설', '절단된 손가락', '완전한 알리바이'가 재미있었다. 루벤스 도난사건과 수정점술사, 갈색 윗옷은 조금 시시했다.

 * 13호 독방의 문제 : 가루치약과 5달러짜리 지폐 1장, 10달러짜리 지폐 2장과 잘 닦인 구두만으로 밖으로 나가기까지 7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철통 보안의 교도소에서 일주일만에 탈옥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 반 도젠 교수가 등장하는 첫 단편. "정신은 물질에 우선한다"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교도소 탈옥을 해 보이는 반 도젠 교수의 솜씨가 재미있었다. 

 

* 사고 기계 조사에 나서다 : 3년 전, 노인으로 변장하여 한 소녀 앞에서 서류에 사인하는 장면을 연기하는 것을 의뢰받았던 한 배우의 기묘한 경험을 듣고 반 도젠 교수는 범죄가 얽혀 있음을 직감한다. 그러나 배우는 의뢰한 사람도, 연기했던 장소도 모르는 상태이고 아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난 날짜 뿐이다. 반 도젠 교수는 어떻게 범인을 찾아낼까? 

-> "범인이 왜 그랬는지"는 한눈에 파악이 가능했는데, 어떻게 그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을지는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반 도젠 교수의 솜씨를 보면서 감탄했다. 이번에는 해친슨 해치를 시키는 게 아니라 반 도젠 교수가 직접 조사에 나서는 게 흥미롭다. 서술자인 '나'가 뒤에 나왔으면 좋을텐데, 이번 단편 앞에만 조금 모습을 드러내고 사라져서 아쉽다. 

 

* 수수께끼의 흉기 : 바이올렛 던베리 양이 자택 방에서 사망한다. 앞에는 깨어진 유리잔이 있고, 입술에는 가볍게 맞은 듯한 흔적과 왼쪽 뺨에 작은 상처가 나 있다. '폐에 공기가 없어진' 것이 사망 원인이다. 경찰은 자살이라고 결론내리려 하지만, 얼마 후 부둣가에서 일하는 헨리 샘너가 똑같은 증상으로 사망한다. 둘을 살해한 방법은? 

-> 범인을 짐작하기란 역시 쉽다. 그런데 범행 수법이 궁금했다. 학교 다닐 때 배워서 다 아는 건데 실제로 범행에 적용해서 번뜩! 하고 떠오르지를 않는다. 

 

* 불꽃에 휩싸인 유령 : 해친슨 해치 기자는 유령이 나온다는 웨스턴 저택에 취재를 갔다가 불꽃에 휩싸인 유령을 목격한다. 유령의 정체는 무엇인가? 

-> 불꽃에 휩싸인 유령에 대해 반 도젠 교수가 설명할 때, 어쩐지 '바스커빌 가의 개'가 생각났다. 

 

* 정보 누설 : 금융자본가와 그의 속기사 이외에는 모르는 정보가 매번 다른 투자자에게 빠져나간다. 그러나 속기사는 주식시장이 열리기 30분 전에야 이 정보를 알고, 방을 나가거나 전화를 걸거나 하지도 않고 꼼짝않고 책상에 앉아있다. 어떻게 정보가 누설되는 것일까? 

-> 소거법을 이용해보면 범인이 누구인지는 명백하지만, 대체 어떻게 정보 누설이 가능한지 감이 안 와서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다. 좋은 말로 포장하지만 금융자본가가 하는 일이 명백한 주가 조작이라 찜찜했는데, 마지막에 반 도젠 교수가 한 방 먹여줘서 시원했음! 

 

* 절단된 손가락 : 한 여인이 멀쩡한 손가락을 절단해달라며 찾아온다. 그녀가 손가락을 자르고 싶어한 이유는? 

-> 범행 수법이 아닌 동기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 익숙한 듯한 흐름인데도 재미있다. 

 

* 루벤스 도난사건 : 그림수집가에게 부탁해 그의 화랑에서 일주일 간 그림을 모사한 화가. 그 방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그림수집가와 화가, 둘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작품의 모사를 끝내고 화랑의 정리를 도우려던 때, 루벤스의 그림이 사라진 것이 발견된다! 

-> 이 작품은 범인은 물론 수법까지 짐작이 가능해서 좀 재미가 없었다. 

 

* 수정 점술사 : 한 사업가가 수정 점술가의 수정에서 자신이 자신의 서재에서 어떤 남자에게 살해되는 장면이 비치는 것을 목격한다. 사업가는 자신의 죽음을 막을 방법이 없겠느냐며 반 도젠 교수를 찾아오는데....... 

-> 이 작품도 좀 별로였다. 반 도젠 교수가 열심히 설명했지만, 그런 장치가 가능할까? 장치 설치비도 만만찮을 거 같은데, 동기가 아무래도 좀 약한 느낌이 든다. 

 

* 갈색 윗옷 : 은행에서 11만 달러를 훔친 도둑이 잡힌다. 그러나 돈을 숨긴 곳은 찾을 수 없고, 범인은 돈을 숨긴 곳을 알려주는 것을 빌미로 협상을 요구한다. 

-> "어디에 돈을 숨겼을까"가 포인트인데, 도둑이 부인에게도 아무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즐거워했다. 반 도젠 교수는 그래도 결국 돈을 숨긴 곳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 사라진 목걸이 : 영국에서 유서깊은 진주목걸이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레이턴이라는 유력한 용의자의 뒤를 쫓아 콘웨이 주임경감이 레이턴과 같은 유람선을 타고 미국으로 온다. 그러나 유람선에 있는 시간동안 어디에서도 진주목걸이는 찾을 수가 없었다! 

-> 콘웨이 주임경감이 목걸이를 찾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재미있었다; 

 

* 완전한 알리바이 : 청년실업가 포레스트가 아파트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다. 그의 시신 곁에는 범행 시간과 범행 동기와 범인의 이름을 적은 쪽지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범인으로 지목된 체이스는 범행 시각인 새벽 2시에 치과의사의 치료를 받았다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제시한다. 

-> 끝까지 다 읽고 처음으로 돌아가서 읽으면 사건이 어떻게 진행된 건지 한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처음에 읽을 때는 그냥 대충 지나가게 되어서... 어쨌든 단서는 다 앞에 있고, 다잉메시지는 거짓말이 아니다. 트릭은 사실 엄청 단순하다. 그런데 그 트릭이 수반하는 위험 때문에 떠올리지 못하는 것 같다. 

 

* 빨강 실 : 밤마다 가스등을 켜놓고 자는 습관이 있는 젊은 주식중개인. 그러나 밀실인 방에서 가스등이 꺼지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 어떻게 된 일일까?

->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인데, 반 도젠 교수의 설명을 들으면 또 쉬운 일 같다. 가스등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으면 트릭을 풀기는 힘들 것 같다. ㅎㅎ

  반 도젠 교수는 참 이성적인 성격이라 '사고 기계'라는 별칭과 잘 어울린다. 그래서 (자주) 인간과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13호 독방의 문제>에서는 반 도젠 교수의 외모를 자주 묘사하는데, 왜소한 몸집, 작은 키, 주름살투성이의 얼굴, 넓은 이마와 부스스한 노란 머리카락 등의 묘사는 그를 탁월한 능력을 지닌 학자이자 탐정으로 보이게 하기보다는 기인으로 보이게 한다. 가만히 보면 독자의 뇌리에 틀어박히게 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기묘하게 그를 설정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2 더하기 2는 4이다. 이따금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언제나 반드시 그렇다."라는 게 반 도젠 교수의 입버릇인데) 이 말을 할 때의 반 도젠 교수나,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표현을 썼을 때 신경질을 내는 교수는 좀 귀엽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소위 말하는 '탐정의 조수' 역할인 해친슨 해치 기자와 반 도젠 교수와의 관계가 흥미로웠다. 보통 탐정에게 끌려다니거나 탐정을 경외하는 조수와 달리 이 둘은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다. 해치는 특종 기사를 위해서 도젠 교수를 따른다(도젠 교수의 능력에 감탄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해치에게는 기사가 우선! 이랄까). 그리고 도젠 교수는 이런저런 일을 조사할 때 해치를 부려먹는다. 이런 건조하면서 밀착된 관계도 재미있다. 

  생각보다 더 즐거웠다. 책이 그렇게 두껍지 않은데 생각보다 단편이 많이 들어 있어서 좋다. 하지만 번역은 좀 그렇다. 중간중간 문장이 꼬여서 몇 번 읽어야 문장 뜻을 알 수 있는 문장들이 보였다.  

 

2011.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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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중고서점 오픈 이벤트] 방문 후기 작성하기

  종로 2가 사거리에 생긴 알라딘 중고책방에서 책 판매 뿐 아니라 책 매입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안에서 자고 있던 책들을 그냥 둬서 뭐하나 싶어 들고 나갔다. 그 동안 귀찮아서 쌓아뒀더니 한 짐 되었더랬다.

  오전 11시 경이었는데 새로 책이 들어왔는지 책장 쪽에서 직원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카운터 쪽에는 두 분이 있었는데, 두 분이서 얘기를 하고 계서서 한동안 꿔놓은 보릿자루처럼 뻘쭘하게 서 있었다.

  책을 팔려고 가져가면(책 판매 뿐 아니라 책 매입도 카운터에서 한다) 일단 직원분이 책 상태를 구분한 다음, 책 바코드를 찍으면 가격이 자동으로 뜨는 방식이다. 다만 그 책이 이미 재고가 충분한 책이라면 매입하지 않을 수도 있다(이것도 바코드를 찍어보면 자연히 알게 되는 모양이다). 가져간 책 중에 1/3은 매입이 거절되었다. 이건 조금 불편했는데, 남은 책을 한 짐 들고 다른 일을 보러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lllorz 정보 부족이었다. 오늘처럼 책이 남으면 낭패니까, 아무래도 다음에 갈 때는 팔려는 책 재고가 있는지 검색해보고 가야 할 것 같다.

  영수증을 보니, 가격은 책 상태가 최상급일 경우 약 30% 정도인 것 같다. 신간의 경우 55%까지 가격을 쳐 주기도 한다고 한다. 이건 자동으로 프로그램되어 있는 모양이라, 가져간 책의 양에 비해 처리는 굉장히 빨리 되었다. 간편하게 안 보는 책을 처분할 수 있는 것은 좋았다.

  다만 중고서점의 직원분들이 친절하다는 느낌은 못 받았다. 오픈한지 얼마 안 되어 분주한 느낌도 나쁘지 않고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만, 말을 걸었는데 대답이 없으면 아무래도 뻘쭘하다(다른 직원분을 교육하는 중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반응이라도 좀 보여주시지 ㅠㅠ). 그리고 말투도 뭔가 툭툭 놓는 느낌이라서, 내가 바쁜 분을 방해하는 느낌이 들었다. 계속 걸음하고 싶어지는 서비스는 아니다. 판매야 다른 데에 책 판매하는 것보다 간편하고 빠르니 이용하는 게 나쁘지 않지만, 책 구입할 때 이런 반응이라면 굳이 이용할까 싶기도 하다. 

 

2011/10/15  덧+ 

  NT노벨과 만화책은 매입 불가라고 한다. 재고가 있을 시 매입 불가한 것은 똑같다.

  직원 분에게 물어보니 중고책 재고가 있는지 여부는 알라딘에서 책 이름을 치면 옆에 나온다는데, 내 눈은 해태눈인가 도저히 못 찾겠다 lllorz 

 

2011/10/16  덧++ 

  알라딘중고서점(종로2가) 페이지가 생겼다. 종로점 <- 을 클릭하면 들어가진다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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