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비니아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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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확히는 별 네 개 반.

  나는 그리스로마신화를 좋아하고, 그래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도 읽어봤지만,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아스>를 읽어본 적은 없다. <일리아드>에도 아이네아스는 나오지만, 포스가 막강한 아킬레우스 헥토르 아가멤논 오디세우스 등등에 눌려 별로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네아스에 대해 앙키세스와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났고, 아프로디테가 이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에 가끔 개입하고, 싸우는 능력은 그럭저럭 중간이고, 엄마 닮아 미남이고,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표류하다 로마에 도착해 시조가 되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라비니아>에 관심을 가진 건 애초에 서사시 <아이네아스>나 인물 '아이네아스'에 대한 호기심은 아니었다. 나는 이 이야기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아스>를 기반으로, 거기에서 주목받지 못한 라티움의 왕녀 라비니아 시점으로 풀어낸 이야기라는 데에 흥미를 느꼈다. 고전의 재해석은 언제나 흥미로운 주제다. 

  <라비니아>는 꽤 독특하다. 일단, 이 글은 라티움의 왕녀 라비니아의 1인칭 시점이다. 그러나 라비니아는 사건에 주도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겉으로 보기엔 '조용한' 캐릭터이고 그래서 그녀는 관찰자같은 느낌을 풍긴다. 더군다가 이 이야기에는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직접 등장하여 자신의 서사시에 대해 라비니아에게 말해준다. 라비니아는 처음부터 자신이 서사시 속의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이런 모호한 정체성은 서사시의 등장인물이 당시 상황을 다시 읊어주는 느낌을 획득한다. 그래서 <라비니아>는 원작의 재해석이라기보다는, 마치 원작에 딸린 주석과 같다.

  <라비니아> 속의 아이네아스는, (내가 호메로스의 시를 보며 생각했던 것과 똑같이) 그다지 위대한 장수는 아니다. 아이네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가 "남자다움이란 곧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할 때, 아이네아스는 트로이 전쟁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이 아킬레우스, 헥토르, 아가멤논과 싸웠다면 아마 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아이네아스는 쟁쟁한 영웅들 사이에서는 좀 초라한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라비니아>에서 아이네아스는 다른 종류의 영웅적 면모를 보여준다. 사람들을 이끄는 위대한 지도자로써의 모습 뿐 아니라, 한 개인으로써도 자신에게 부끄러움 없이 살려는 "경건한" 모습 말이다. 그는 침묵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인내할 줄 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줄도 안다. 그런 아이네아스를 보며 남자다움, 영웅다움이란 싸움에서 이기는 것 이상의 미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라비니아>에서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은 라티움의 왕녀 라비니아이지만, 이야기의 핵심에는 여전히 아이네아스가 놓여 있다. 그는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와 함께 이야기의 주춧돌로 놓여있기는 하지만 등장횟수 자체는 그다지 보잘 것 없다(더구나 이 이야기는 그의 모험의 끝부분-라티움으로 와서 아이네아스 일행이 정착하는-에 해당한다). 아이네아스가 와서 라티움의 왕이 된 이야기보다, 그 전/후의 이야기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핵심은 여전히 아이네아스이다. 아이네아스가 사라진 후에도 그가 미치는 영향력을 보면, 그가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이야기 흐름에서 조금 뒤에 물러나 있는 것은 아이네아스 뿐만이 아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는 앞에서 이야기를 끌고갔던 신들 또한 <라비나아>에서는 한 걸음 뒤에 물러나 있다. 그들은 직접 인간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일에 개입하는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징조와 계시를 통해 인간에게 나타난다. <라비니아> 속 사람들의 생활 구석구석에는 종교가 깊이 개입되어 있고, 그리하여 이러한 간접적인 입김도 이야기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다. 

  21C를 살아가는 나에게 이들의 삶의 방식이 상당히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온다. 그들의 삶은 운명적이다. 징조와 계시로 나타나는 것들을 그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아이네아스는 운명에 의해 방랑하다 라티움에 와 정착했고, 라비니아는 운명에 의해 투르누스가 아닌 아이네아스(라티움의 남자가 아닌 이방인)과 결혼했다. 이러한 운명 또는 숙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감각은 생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비니아>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푹 빠져들어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이야기 속에서 모든 일은 정해진 대로 흘러가지만(징조는 모두 현실이 된다) 그 안에는 사람들의 치열한 고민과 선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과 선택 한가운데에 '경건함'이라는 단어가 있다. 인내, 용기, 순응, 믿음- 어떤 단어로 "경건함"이라는 단어를 대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경건함"은 아이네아스에게도 라비니아에게도 그리고 실비우스에게도 있었다. <라비니아>에는 이러한 "경건함"을 갖춘 사람과 "경건함"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 대한 대비가 두드러지는데, 대체로 "경건함"을 갖춘 사람은 옳은 방향으로 그리고 "경건함"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나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라비니아의 아버지 vs 라비니아의 어머니, 아이네아스 vs 투르누스, 아스카니우스 vs 실비우스.

  그러나 이 인상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아이네아스가 투르누스를 격정에 의해 죽이고 운명과 양심에 대해 고민한 것을 보면 말이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이러한 아이네아스의 고민이 비중있게 다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네아스의 고민은 스치듯 지나간다. 그리고 라비니아와 실비우스에게는, 이러한 갈등을 야기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단순히 운명과 경건함, 따르는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조금 더 깊이 삶과 인간과 운명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었던 이야기가 발만 살짝 담그고 빠져나온 느낌이라 무척 아쉬웠다.

  <라비니아>는 로마가 형성되기 전, 조금은 생소한 작은 세계를 보여준다. 베르길리우스가 노래한 서사시 <아이네아스>를 기반으로 두고 있지만, <라비니아>는 모험보다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모험이 시작되기 전에도 끝난 뒤에도 계속되는 것임을 알게 해 준다. <라비니아>는 첫 번째 페이지를 펼쳐들었을 때부터 사람을 확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라비니아나 아이네아스 등의 인물 뿐 아니라, 라티움의 사람들, 그들의 삶과 종교 등이 더없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라비니아>는 아주 매혹적이고, 그래서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아스>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긴다. 어슐러 르귄 여사는 저자후기에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아스>를 현대어로 옮겼을 때 그 매력을 완벽히 살릴 수 없다면, 서사시라는 장르를 소설이라는 장르로 옮기는 변화를 주어 <아이네아스>를 되살리고자 했다고 말한다. 별 관심 없던 서사시에 대한 호기심을 끌어냈으니, 그녀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듯 하다.

  

p.s.

  실비우스와 아스카니우스의 이야기가 더 보고 싶었는데 축약되어 아쉽다. 하지만 라비니아의 이야기니까 어쩔 수 없나 싶다.  

 

2011.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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