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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중용 ㅣ 동양고전 슬기바다 3
주희 지음, 김미영 옮김 / 홍익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매우 짧은 책이라 금방 읽었다. 중용은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장의 길이가 매우 짧고
상당수가 단지 하나의 절, 한 개의 문장뿐이라 내용이 적다. 20장이 좀 긴데 실제 삶 혹은 정치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책의 요점은 1장과 21장이다. 1장은 전체의 개요를 말하는 장인데 그 중 1절과, 21장은 (한 개의 절만 있다.)
동일한 이야기인데 이것이 전체 중용의 요점이다.
1장의 내용은 이 리뷰 맨 아래에 있는데, 그 내용은 '우리가 가진 본성을 따르는 것, 혹은 그 본성을 찾는 것에는 길(道)이 있는데,
그 길로 가는 방법, 혹은 그 길이 바로 배움 혹은 가르침이다'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진리를 찾아가는 도(道)는 사물을 탐구하는데 있다는 대학의 내용을 일맥상통한다고 봐야 한다.
길, 道는 가장 오래된 은유(Metaphor)이다.
내가 최근에 일고 있는 책중에 3권이 공교롭게도 길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도 이른바 '본성'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각각의 책은 그 길이 다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 중용과 그나마 유사한 책이 바로 로저 펜로즈의 '실체에 이르는 길 Road to Reality'이다.
이 책은 현대 물리학자가 현대물리학의 기원과 발전사를 수학이라는 언어로 서술한 책이다.
그 제묵이 과감하게도 실체(Reality)에 이르는 길(Road)라고 붙였다.
>> 길, 도, 道, Road, Path, Way. <<
현대물리학이 오히려 중용에 말하는 敎에 근접한 것이 아닐까.
유학자들이 구하던 교敎가 이 물리학자가 자신있게 주장하는 실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의견에 동의하진 않지만, 어쨋든 중용에서 말하는 性에 이르는 道보다는
오히려 현대 물리학이 더 나은 진실임에는 틀림이 없지 않을까.
물론 현대물리학도 결코 실체에 우리를 이르게 못하리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말이다.
(덧붙이는 말)
사실 본문을 읽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고전을 읽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한다.
최근, 이 짧은 중용을 가지고 길고 긴 해설을 붙인 책이 유행인데,
그 책은 결코 중용을 읽게 해 주지 못한다. 단지 그 해설을 읽고 그 해설을 재밋어 하기 때문에 보는 책이다.
도올의 중용 책을 보면, 중요한 부분은 한자 단어 그대로 남겨놓은 형태로 번역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 한자를 길게 해설한다.
이는 자신의 유식함을 가지고 독자에게 낯설움을 들이대 왠지모를 신선함을 주는 목적일 뿐이다.
한마디로 잘나체 하는 것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냥, 이 책처럼 본문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한글로 된 내용을 음미하는 것이 좋다.
아래에 내용을 일부 인용했는데, 한자 본문까지 있으니 내용을 좀 더 살필려면 한자를 살펴보면 된다.
그리고 전체를 그냥 우리말로 읽는 것이 좋다. 예전 유학자들은 한자 그대로 읽었던 것도 그런 맥락이다.
한자와 한글을 뒤섞여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르는 것은 언어에 대한 기본이 아니다.
또한, 도올은 기독교에 대한 깊은 근원적 열들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책들에서는 유교와 전혀 상관없는 기독교 내용이 나온다.
앞에서 이야기한 '중용에 관한 책인데, 중용과 전혀 상관없는 다른 책'일 뿐이다.
--------------(중용 본문, 참조)------------
1장. (공자가 전해 준 요체를 자사가 서술하였다)
1절.
하늘이 만물에게 부여해 준 것을 '본성'이라고 하고,
자신이 부여받은 본성에 따르는 것을 '도'라고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1장 주) 명(命), 성(性), 도(道), 교(敎)가 서로 연결되어서 체계적으로 설명하게 된 것은 '중용'이 처음이라 할 수 있다.
21장. (하늘의 도와 사람의 도)
1절.
성실함을 통해 명철해지는 것을 본성이라고 한다.
명철함을 통해 성실해지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
성실하면 명철해지고 명철하면 성실해진다.
21장 주) '성실함을 통해서 명철해지는 것'은 하늘의 도리이고, '명철함을 통해서 성실함'은 사람의 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