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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조건 - 하버드대학교. 인간성장보고서, 그들은 어떻게 오래도록 행복했을까?
조지 E. 베일런트 지음, 이덕남 옮김, 이시형 감수 / 프런티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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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 제목은 'Aging Well'이다. 즉, 잘 나이가 드는 법에 대한 것으로서 하버드 대학교에서 장기간, 전 생애에 대해 지속적 조사를 하면서 인간이 나이가 드는 것에 대해 연구한 것이다.

 

인간의 삶에 대해 이해를 하게 해주었다.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 우리가 느껴야 할 것들, 바래야 할 것들. 어찌보면 이런 책들이 바로 고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책 서술 방식은 그다지 어렵지 않으면서 깊이 있게 느끼고 생각하게 만드는 책. 그것은 글의 잘 씀과 모양과 멋에 있지 않고, 내용의 깊이에 그 근본이 있기 때문이다. 책의 대부분에서는 연구자의 관점에서 연구한 것들을 서술하는 것과 함께 여러 연구대상 사람들의 인생과 느낌과 말과 행동과 삶과 관계에 대해 관찰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 하나하나가 그 인생들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깊은 안목을 제공해 준다.

 

사람은 20대까지 몸과 지능이 성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30살까지 인격이 성장하여 이 후에는 더 이상의 성격과 인격의 발달은 없다고 듣기도 하였었는데, 또한 나이 40에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는데, 이 책은 사람이 더 나이가 들수록 더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성장 단계.

정체성 - 친밀감 - 직업적 안정 - 생산성 - 의미의 수호자 - 통합.

생산성 까지가 중년까지 사람이 이루어야 할 성장이고, 중년 이후에는 생산성과 함께 이후 단계를 이루어야 한다고 한다. 꼭 단계를 따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은 정체성 조차 달성하지 못하는 불쌍한 삶을 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젊을 때에는 예상 못했었음에 나이가 들어서는 아주 성숙해 가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모든 인생은 우리에게 내가 가야할 방향을 깊이 고민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중년 50살 전에 우리가 이루는 생산성이 삶 전체에 주는 영향력이 매우 높다는 사실. 어찌보면 약간은 아이러니하다. 그냥 마음 좋음이 아니라 뭔가 사회에 기여하는 생산성.

 

건강한 노년을 부르는 일곱 가지 요소.

비흡연 (젊은 시절에 담배를 끊음) - 금주 (알코올 중독 경험 없음) - 규칙적 운동

- 알맞은 체중 - 안정적인 결혼 생활 - 성숙한 방어기제 - 교육 년수.

성숙한 방어기제가 행복한 노년을 부르는 핵심일텐데, 어찌보면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사는 원천은 얼마나 성숙하게 인격을 가꾸는 가에 달려있다. 우리가 얼마나 성숙하는 가 알 수 있는 기준은 우리가 정신적 위급상황에서 얼마나 상황을 잘 다스리는 가에 달려 있다. 인격의 성숙.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기 위해 이 책을 읽었었는데 그 목적을, 즉 그 방법을 완전히 알려주지는 못하지만, 어찌 그런 방법을 누가 완전히 가르쳐 줄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은 어찌보면 약간의 행운과 같은 우연, 기적, 만남, 축복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행운을 기초로 다른 사람과의 행복한 관계, 전능자와의 기적적 만남, 삶의 감사한 태도 등으로 우리는 인격을 가꿀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가능성이 자신의 태도로 높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책은 그런 관점을 준다는 면에서 우리에게 아주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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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 쌓기 연습 - 매일매일 쌓아가는 자신감 : 하루에 15분씩 자신을 변화시키는 완벽한 프로그램
데이비드 로렌스 프레스턴 지음, 김나현 옮김 / 작은씨앗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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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을 포함하여 사람 마음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연습을 하게 해주는 책이다. 이론적 내용이나 서사적 서술등은 적고 365가지의 연습방법이나 항목들을 위주로 정리되어 있다. 책읽기의 즐거움은 좀 줄어드는데, 반대로 연습을 위주로 생각한다면 좋은 책이다. 연습에는 어찌보면 다른 사람의 지도가 필요할지도 모르는데 그런 것 없이 혼자 한다는 것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세한 설명으로 된 연습들을 읽고 하다보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그러한 연습의 내용들에는 단순한 연습이라기 보다 개념적 설명과 인식의 폭을 넓혀주는 내용도 많은 것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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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하나님의 세계 - 영성신학 유진 피터슨의 영성 1
유진 피터슨 지음, 이종태.양혜원 옮김 / IVP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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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피터슨의 영성 시리즈의 첫번째 책이다. 2011년 내내 읽어왔는데, 그만큼 내용이 만만한 것은 아니다. 2012년에 리뷰를 쓸려고 했는데, 이지성작가의 신작 책으로 한국의 목사님들을 찾아간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중 어느 목사님이 유진 피터슨과 릭워렌, 이동원 목사님등에 대해 비판한 내용들이 나온다는 서평을 보았다. 사실 그전에는 도올이 도마복음에 대한 해설서를 쓴 것도 알았다. 사실 도올은 기독교 핵심을 모르면서 아는체 하면서 도마복음이라는 영지주의적 책에 대해 알리려한 것인데, 반대로 이지성작가의 '한국의 진짜 목사를 찾아서'에 나오는 어느 목사님은 반대로 유진 피터슨이 영지주의적이고 뉴에이지운동가라고 하는 것 같다. 이 무슨 모순적인 상황인가.

 

 이는 어쩌면 성경의 무오성을 보는 관점과도 유사해 보이는데, 기독교 핵심교리가 아닌 교파의 신조로서 성경의 일점일획도 틀린 것이 없다고 보기도 하고, 반대로 이단들은 성경이 인간에 의해 쓰여져서 틀린 부분이 많다고 보는 입장도 있었다. 성경은 성령에 의해 쓰여지었기에 틀릴 수 없다. 이는 분명하다. 그럼 무엇이 모순을 가져오는가.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방식에 대해 관계적, 인격적이 아닌, 도식적, 철학적, 교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닌가. 인간 자신의 입장에서 설명하려는 것이 오해를 가져온다. 하나님은 창조를 마치시고 뒤에서 뒷짐지시는 분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짜맞쳐진 로보트나 비인격적 컴퓨터로 우주 전체를 콘트롤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또 다른 문제이다. 그런 식으로 이해하기에, 인간의 타락과 세상의 모순에 대해 비기독교인에게 설명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과 인간의 개인적, 인격적, 구체적 관계가 없는 영성은 그 근본에서 이해가 잘못되어 있다.

 

 성경을 하나하나 해석하고 이해할려고 하는 태도가 위의 두 가지 잘못된 이해를 가져온다. 성경을 철학적으로 이해할려니 도마복음 같은 걸로 영지주의적, 철학적 이단을 가져오는 것이다. 또한 종교적으로 이해할려니 다른 종교과 다른 바가 전혀 없는 근본주의적인 사람의 기독교가 되는 것이다.

 

 성경은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다. 삼위일체도 그렇게 해서 인간이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구체적인 관계 아래에서 성경과 영성을 이해해야 한다.

 

 이동원목사님이 관상기도로 공격을 당한 것 같았다. 관상기도가 뭔지 모르며 관심도 없고, 이동원목사님도 안하신다고 해명하셨다는데.... 통성기도에 익숙한 한국 기독교에서 순복음교회의 엄청난 통성기도에 더 익숙해지더니, 그와 정반대인 조용한 기도에는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조용한 기도가 기도의 전부도 아니겠지만 카톨릭적 기도에 대해 거부반응이 커보인다. 릭워렌, 리처드 포스터, 유진 피터슨 만이 아니라 귀용부인 같은 분도 이단으로 여기지 않을까? 목사도 아니고 교리에 대해 별도로 공부한 적도 없는 사람으로서는 이만 줄이는 것이 좋겠다.

 

 이 책은 영성이 개인의 정신적 수양이나 수련이 아니라 현실세계와 하나님의 말씀, 혹은 언어와 우리들의 공동체인 교회에서 커가는 것임을 알게 해준다. 나는 유진 피터슨의 5가지 영성 시리즈에서 4번째 영성 언어에 대한 '비유로 말하라'를 먼저 읽고 이 책은 읽었다. 하나님의 언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예수님의 설교에 대한 이해를 가져다준 책이었다. 시리즈 첫권인 이 책은 제목이 '현실, 하나님의 세계', 원 영어 제목으로는 '수만가지 장소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라고 붙여진 이 책은 어찌보면 개인적 영성의 지도서 같지 않을지 모른다. 사실 영성의 지도서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개인적 친분/친교/교제를 쌓도록 도움을 주는 책이다.

 

 

  책의 구성과 내용을 먼저 설명하면,

- 詩 하나를 서두에 두고서 글을 이끌고, 이후에 3부로 나누어서 창조, 역사, 공동체 각각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각 장은 창조/역사/공동체의 동네 탐구하기로 전체 장의 서두를 이끌고,

- 이후 주요한 내용인 케리그마로서 예수님의 탄생/예수님의 죽음/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 한다.

- 각각의 위협으로서 창조-영지주의/역사-도덕주의/공동체-분파주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이후에 근거 본문으로서 각 장마다 창세기1~2장과 요한복음/출애굽기와 마가복음/출애굽기와 누가복음,사도행전을 설명해 준다.

- 마지막으로 주 경외함 기르가로서 각 장마다 안식일과 경탄/성찬과 손대접/세례와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ㅁ. 본문 중에서 몇가지 내용을 골라서 아래에 적어본다.

 

    그리스도는 수많은 곳에서 아름다운 팔다리로

    그의 눈이 아닌 아름다운 눈으로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에 맞추어 놀이하기 때문에.

                                                  - 제러드 맨리 홉킨스

  (위에서 언급한 詩의 주요 부분. 원문의 단어 하나와 조사 두개를 수정함.)

 

 

< 제1장. 창조 속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 >

 

p.104~105

 예수님의 탄생 안에서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복된 소식이 되며, 창조는 삶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삶에, 우리 삶에 필요한 조건이 된다. 이것은 참으로 복된 소식이며, 그리스도인들은 그 복된 소식을 '케리그마'(kerygma)라고 불렀는데, 그 의미는 공적으로 선포되는 어떤 내용이 역사적 실재 안으로 선포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창조를 받아들이고, 창조 안으로 들어가고, 창조에 참여하는 데 그리고 단지 창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창조를 살아내는 데 케리그마의 초점을 맞추게 해준다. 이 탄생은 또한 복음서 저자인 마태와 누가가 우리에게 설명해 주듯이, '동정녀 탄생'이다.

......

 창조를 믿는 행위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 즉 하나님이 만드신 것과 만드시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안으로 들어가 거기에 복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의 구경꾼이 아니라 창조의 참여자다. 무엇보다 우리는 단지 태어나는 것만으로 참여자가 된다. 그러나 이내 우리의 모든 탄생이 예수님의 탄생이라는 규정적 맥락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기독교적 삶은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고 계신 일 속에서 사는 연습이다.

.....

 우리는 파생적인 삶이 아니라 원래의 모습에 맞는(origin-ally)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시이다. 또한 그분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다. 임마누엘이시다.

 

p.166~167

 모세는 하나님께 이름을 밝혀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이랬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3:14) 이 문구는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유일무이한 이름이 되었는데, 원래 히브리어로는 '야웨'(Yahweh)지만 헬라어로 번역하면 에고 에이미다. 에고 에이미, 즉 "나는 ... 이다"(I am)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가장 개인적인 이름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문구를 자주 사용하셨다. 예수님이 '에고' 혹은 '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우리는 거룩한 이름 '야웨'를 연상하게 되는데, 예수님이 그 이름을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취하신 것이다.

....

 예수님의 "나는 ... 이다"라는 유명한 주장이 이 모든 대화에 자주 사용됨으로써 그 이야기는 두 단계에서 (혹은 두 영역에서) 동시에 작동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새 이름인 "나는.... 이다"를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하시는 것을 듣게 되고, 또한 가장 간단하고 가장 이해하기 쉽운 어법과 문법으로 동사 '이다'(to be)가 개인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듣게 된다. 이렇게 축적된 대화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목소리로 말씀하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창조 세계를 불러내어 존재케 하신 하나님, 모세에게 자신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밝히신 하나님, 하나님이 예수님의 그 대화와 강화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신다.

 

p.199~200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리고 순종적으로 창조에 참여하도록, 그래서 우리가 단순히 창조의 관람객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요한이 사용하는 두 개의 주요 동사들은 '믿다'와 '사랑하다'이다.

....

 믿을 때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 즉 하늘의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믿음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기도의 삶 속에서 실행된다.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가 보고 만지고 들을 수 있는 것, 즉 땅의 것에 대해 환영하며 반응한다. 사랑은 우리 가족과 이웃과 직장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친밀감과 돌봄의 삶 속에서 실행된다.

.....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의 시간과 공간으로서의 창조에 다가가기 위한 진입로이시다.

.....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의 공간으로서의 창조에 다가가기 위한 진입로이시다.

.....

 믿음과 사랑, 이것은 창조의 참여자로서 우리가 창조에 들어가는 길이다.

 

 

< 제2장. 역사 속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 >

 

p.250~252

 하나님은 인격이시다.

.....

 역사에 흠뻑 적셔져 있는 성경의 페이지들을 읽으면서 기도하는 동안, 우리는 서서히 그러한 사고 방식을 습득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된다는 것의 의미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을 사용하셔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이 세상 속에서 그분의 구원 목적을 이루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

 성경적인 방식은, 우리에게 도덕적 규칙들을 제시하면서 "여기에 부합하는 삶을 살라"고 말하거나, 교리 체계를 제시하면서 "이렇게 생각하고 살면 잘 살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인 방식은, 견고한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해주며 " 그 안으로 너희도 들어오라. 이것이 바로 인간이 사는 모습이다. 인간이 되고 인간으로서 성숙해지려면 이러한 일들을 겪어야 한다"고 말하며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다.

 

p.258~259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최악의 것인 고난과 죽음으로 구원은 형성된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살고 싶다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살고 싶다면,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 생명으로 받고 싶다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정체성을 가지고 싶다면,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서 소위 지저분한 역사라고 불리는 그것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역사는 인격이 개입되지 않은 연구와 분석 속에서 그저 멀찌감치 두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가 구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p.264

 창조 속에서 놀이

..... (위협인 영지주의에 대해)

 하나님이 예수님의 탄생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은, 생명과 생명에 관여된 모든 것을 긍정하시고, 우리를 거기에 관여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그러나 편리한 부분만 골라내고 나머지는 폐기해 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폐기되는 부분에는 보통 우리에게 계시된 대로의 예수님도 포함된다. 그러한 행위를 간략하게 우리는 '영지주의'라고 부른다.

.....

 역사 속에서 놀이

.....(위협인 도덕주의에 대해)

 예수님이 인생에서 잘못된 모든 것을 끌어안으시고 희생적 죽음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고, 그럼으로써 그 구원에 우리로 하여금 관여하게 하시는 그분의 죽음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 지저분한 것과 그 지저분함 속에 있는 그리스도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선생들을 고용하고 규칙들을 게시하며 그 지저분한 것들을 냉정하게 치우고 싶어하는 것일까? 그들은 기독교 제단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로 대체하려고 작정했다. 그러한 태도를 간략하게 우리는 '도덕주의'라고 부른다.

 

p.352

 우리는 단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분의 속죄의 수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의 자유와 위엄을 가지고 그분의 죽음을 죽고 그분의 삶을 살라고 초대받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것이다. 우리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지 않으면서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구원은 언제나 자기 도취의 위험을 안고 있다. 내가 내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게 되면 하나님을 내 경험의 단순한 부속품으로 취급할 위험이 늘 있다. 따라서 구원은 세심한 경계를 요구한다. 영성 신학은 다른 무엇보다고 이러한 경계의 연습이다. 영성 신학은 예수님의 이야기에 우리를 완전히 그리고 성숙하게 동참하도록 만들면서 동시에 우리가 그 이야기를 점령하는 것을 막아 주는 훈련이고 기술이다.

 

 

< 제3장. 공동체 속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 >

 

p.406~407

 예수님에게 근본적으로 부활은 놀라운 창조 세계 안에서 사는 일, 구원 역사를 온 몸으로 껴안는 일 그리고 거룩한 공동체에 참여하는 일이다. 성령을 받으라(요2 0:22).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 세우신 이 성령을 받으라. 그러면 당신은 기도와 순종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 생명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지, 우리가 일어나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금 하고 계신 일에 더 많이 참여할수록, 실은 우리가 일을 꾸려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점점 더 깊이 깨닫게 된다. 예수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일에 더 많이 참여할수록, (우리가 하는 일보다는) 우리에게 행해지는 일들, 우리를 통해 행해지는 일들이 더 많아진다.우리가 부활을 더 많이 연습할수록 우리는 자신만의 삶 혹은 스스로 꾸려 가는 삶에서 더욱 벗어나게 되는데, 왜냐하면 부활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에서 참으로 관계적이며 인격적인 것으로서 우리를 전례 없는 형제자매들과의 관계 속으로 던져 넣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공동체 안에 있게 된다. 이 공동체 안에 있기로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님의 부활 덕분에 지금 이 공동체 안에 있는 것이다.

 

p.417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성 형성의 방법, 즉 '어떻게 해야 하는지'(how to do it)를 말씀하시지 않는다. 대신, 그분은 영성 형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how it is done)를 말씀하신다. 영성 형성이란 근본적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로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형성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

 무엇보다, 부활 공동체는 성령의 작품이다.

p.421~425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늘 좀더 쉬운 길, 완화된 공동체, 내 취향에 맞게 축소된 공동체, "출입 통제가 있는 공동체"(gated community)를 찾고자 하는 유혹들을 마주하게 된다.

영지주의가 창조 안에서 응답하고 참미하며 사는 우리 사람에 대한 표준적 위협물이고, 도덕주의가 역사 안에서 희생하고 손대접하며 사는 우리 삶에 대항 항구적 위협물이듯이, 분파주의(sectarianism)는 공동체 안에서 관대하게 사랑을 베풀며 사는 우리 삶을 갑자기 위험에 빠뜨리는, 늘 "문 옆에 엎드려"(차4:7) 있는 죄이다.

.....

 분파주의는 늘 의도적이고 의지적으로 큰 공동체를 떠나 버린다.

.....

 분파주의는 이단이 신학에 하는 일을 공동체에 한다.

.....

 분파란 무엇인가? 분파란 꼭 공동체를 부인한다는 것이 아니다. 분파란 할 수 있는 한 공동체를 배척하면서 공동체를 자신에게 맞도록 재정희하는 것이다.

....

 분파주의 충동은 '자기주의'(selfism)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p.428

 그런데 예수님을 따른다는 그들이 갑자기 느닷없이 놀라운 구원을 경험한 자기 영혼에 몰입해서는, 자기 자신의 영성을 계발시키는 데 분주해진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다. 자아 영성(self-spritualty)은 이제 우리 시대의 얼굴이 되었다. '나'(Me)를 중심으로 하는 영성. 자기 중심. 자기 충족. 자기 발전을 꾀하는 영성.

.....

 그러나 거룩한 삶, 부활의 삶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따라서 개개인드로서는 거룩한 삶, 부활의 삶을 살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의해 정의되는 공동체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정의되는 공동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또 우리 안에 쏟아부으시는 그 사랑은, 그 사랑이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재생산되는 그런 공동체를 창조해 낸다.

 

p.522

 "내가 초대받은 이 공동체의 독특한 특징은 무엇이며, 어떻게 나는 여기에 바른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는가?"

 이러한 '어떻게'에 대한 간단한 답은, 창조와 역사의 장들에서도 그랬듯이, 바로 '주 경외함'을 기르는 데 있다. 주를 경외하는 이들은 현재 이미 되고 있는 일들 앞에서 경건한 존중의 태도를 가지며, 앞으로 되어야 할 일들을 참된 즐거움 안에서 행한다. 주 경외함의 실천은 점진적으로, 그러나 확실히 우리의 관심을,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에 대한 몰두로부터, 하나님이 해 오고 계신 일과 하나님이 그 일을 성령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행하고 계신 그 방식에 주의 깊게 몰입하는 것으로 옮긴다.

 공동체 안에서 주 경외함을 기르기 위한 핵심적 실천은, 사랑의 실천을 통한 성숙한 형성을 가져오는 게례다.

 

p.526~528

 삼위일체: 그 이름

.....

 인격성.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령으로, 즉 본질적으로 관계적으로 공동체적인 존재로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엇보다 인격적인 존재로 이해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유일한 방식은 인격적인 방식이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인격적 명칭들 아래서 인격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며, 결코 이 밖에 다른 방식으로는 존재하시지 않는다. 즉, 하나님은 어떤 비인격적인 힘이나 영향력으로, 어떤 추상적 관념이나 진리나 원리로 존재하시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그분을 결코 비인격적으로나 추상적인 방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

 하나님은 전적으로 인격적이고, 상호 인격적이며(interpersonal), 관계적이고, 주고받고, 사랑하며, 인도하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부-성자-성령에게는 공동체적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참여.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참여를 환영하시는 존재로 이해한다는 말이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삼위일체의 공동체적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영적 삶을 산다는 말은 하나님의 존재와 일에 참여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비참여적으로 일하시는 존재가 아니다. 그분은 대리자를 차견해 일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어떤 비인격적인 자리에 앉아 그저 관리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세례는 자신이 지금껏 할 수 없다고, 자격 없다고 생각해 온 일에 참여하게 될 때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준다.

 

p.533~534

 부활 공동체 안에서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길이 되어 주는 두 가지 명령이 있다. 둘 다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으나, 따라 살기 위해서는 평생에 걸친 주의와 훈련이 필요한 명령들이다. 바로 '회개하라'와 '따르라'는 명령이다. 세 번째 명령인 '기도하라'는 그 둘을 결합하고 내면화한다.

' 회개하라'는 세례받은 삶의 '아니오'이고, '따르라'는 '예'다. 이 두 명령은 공동체와 우리 각자의 삶 전체에 걸쳐, 변화하는 조건들에 맞추어 늘 새롭게 실천되어야 한다. 두 명령 모두 어느 순간 통달하면 졸업하고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갈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이들은 기본이며 언제까지나 기본으로 남는 것이다.

 

p.544

 사랑의 실천은 인격적으로 되지 않으면 실상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의 실천은 어떤 기능으로 단순화될 수 없다.

 위험한 것은 개념 자체가 아니라, 사물과 사람들을 개별적 관계들에서 떼어 내어 개념으로 추상화하는 탁상공론적인 태도다. 위험한 것은 프로그램 자체가 아니라, 어떤 비인격적인 목표를 더 효율적으로 성취하기 위해 인격적인 것들을 늘 무시해 버리는 프로그램 중심적인 태도다. 이들은 위험할 뿐 아니라 신성 모독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시고 성령이 형성하시는 우리의 정체성, 즉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랑받는 존재로서의 우리 정체성의 중심은 다름 아니라 관계적 개별성과 인격적 친밀성이기 때문이다.

 요한 목사의 편지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 정체성을 기르는 일에 지침으로 삼고자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명령에 대한 우리의 공동체적 헌신을, 어떤 공통된 신조나 공통된 대의에 기초한, 좀더 단순하고 좀더 쉽게 얻어지는 정체성을 위해 희생시키지 말아야 한다.

 세례는 절대적으로 관계적 존재이신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안에 우리를 잠기게 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정의한다. 동시에 세례는 사랑받는 이들, 즉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 사랑으로 창조되고 명령받은 형제자매들로 이루어지는, 사랑으로 정의되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 삶을 재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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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진짜 목사를 찾아서
이지성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행동으로 보여지는 목사님들은 확실히 믿을 수 있다.

좋은 행동을 하는 목사님을 찾아간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좋은 말을 하는 목사님을 그냥 믿는 건 이단 만큼이나 위헙하다.

그들이 성령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박희돈목사님, 김종찬목사님, 최흥호목사님, 탁지원목사님에 대해서는 나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바이다.

특히 최흥호목사님에 대해 그 행동에 대해 옹호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또한 이억주목사님에 대해서도 인터넷에서의 악성댓글에서 기독교를 사수하는 모습을 옹호한 것은 잘한 일이다.

정성구목사님은 칼빈신학 위주라 교파에 따라 선불호가 있을 것 같으나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 같다.

 

이단을 확실히 구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말씀에 기초가 안된 많은 사람들을 구해내는 역할을 하니.

하지만 어떤 부분은 위에서 언급한 목사님들이 지키려한 기독교와는 오히려 반대로

기독교 핵심교리가 아닌 교단의 세부교리로 일종의 잇권을 지키는 행위와 구별이 없어진다.

이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공동체로서 카톨릭 기반의 영성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단군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정반대이나 별 차이 없는 행동이다.

대부분의 목회자와 나 같은 평신도도 성령님의 역사로 이단을 구별할 수 있다.

미혹하는 영도 있으나, 이를 넘어서 지금도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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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thecross 2011-12-31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부탁 괜찮을지...
이지성 씨는 아직 성령체험을 하진 못 한 것 같았어요.
저 책을 읽으면서 인터뷰 과정을 보니 그렇더라구요.

지체님께서 이지성 씨를 위해 강력하게 기도해주시면
어떨런지요...

이지성 작가가 성령 충만한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요.^^

바람파편 2012-01-0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전 솔직히 비판이 될 것같아 말을 계속 줄였지만,
솔직히 위에서 언급하지 않은 목사님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 주요한 내용인데요.
그 목사님의 의견이 완전히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완전히 맞는 내용도 아닌.

이지성작가는 사회에서 무조건 비판받는 기독교의 살아있는 다른 면을 건져올린건 좋은데요.
목사님들의 배열이 조금 이상해요.
잘못하면 기독교에 오히려 분란만 생길 교계 내부에서 좀 더 토의가 되어야 할 문제가 아닌지.

그 목사님도 다른 분 리뷰에 덧글로 하나의 일로 이동원목사님의 전 사역이 오해받지 말라는 의도라고 하셨는데, 그런 관상기도 자체가 이단인지는 좀 더 교계 내에서 논의가 필요하다고 보여줘요. 이동원목사님도 복어의 독을 제하고 써야한다고 하셨다고도 하던데.
그런 논의가 없이 일방적인 것으로 일반 독자에게 내용이 가면
오히려 기독교를 욕하는 많은 책들과 차이가 없어집니다.

다른 영성신학자들도 어찌보면 경계에서 왔다갔다 하는 것일수도 있는데,
그런 경계에 있지 않으면 예전의 단순 보수적 교리가 전면에 나서는 일에 빠지게 되요.
피해를 주기는 관념적 이단과 차이가 없다고 보여져요.

그게 이 책에서 언급한 다른 많은 행동하는 목사님들과는 오히려 반대로
현재 욕먹는 기독교, 교인을 사고파는 목사에 빠지기 쉬운 거라고 생각되거든요.
많은 새로운 영성운동에 대해 단순 배척은 자기 구역지키기로만 보여줘요.

예전에 오순절파 순복음 교회가 이단으로 선고된 것은 아이러니죠.
어떻게 보면 아직도 기존 보수교파에서는 이단으로 볼 여지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운동으로 한국 기독교가 한단계 더 발전하게 되었거든요.

많은 목회자와 신도들이 성령의 도움으로 이단에 대해 구분할 능력이 있어요.

이지성작가가 아직 성령체험이 없다면 현재 기독교 내부를 비판한 목사님이 들어간 것이 이해가 되긴 합니다.

그 목사님이 코엘료 등을 비판한건 동의하겠는데, 조엘 오스틴목사도 그럴만하다고 보여지지만
외국 영성신학자들이 개인적 영성추구를 한다고 보거나
이동원목사님을 그렇게 비판한건 좀 많이 오버하신거라고 말하고 싶군요.
 
한국의 진짜 목사를 찾아서
이지성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이지성 작가에서 일반 고전만이 아닌 `기독교 고전`에 대한 독서를 권한다. 이지성작가는 훌륭한 삶을 산 목사님을 취재하여 글 쓴 것은 좋지만, 훌륭해 보이는 말에는 스스로 판단할 능력을 갖추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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