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방문의 손에 잡히는 성과는 워싱턴 의회 도서관으로부터현악 사중주 작곡을 위촉받은 것이다. 프로코피예프는 유럽으로돌아간 뒤 작곡에 들어갔는데, 그 예비 작업으로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곡들을 깊이 공부했다. 주로 연주회장에서 다음 연주회장으로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였다. 그러고 나서, E단조라는 조성을택해 사중주 작곡에 도전했다. 이 조의 으뜸음이 비올라와 첼로의 가장 낮은 현의 음 높이보다도 반 음정 낮기 때문에 생기는 고유한 문제점들을 자신이 극복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작곡한 <현악 사중주 제1번 Op.50>의 러시아적인 특징을사람들이 놓치지 않았다. 미야스콥스키는 이 곡의 ‘진정한 깊이‘와 ‘압도적인 선율과 격렬성‘을 반겼다. - P67
평화롭게 곡을 쓰게 해주고, 써내려간 악보의 잉크가 마르기 전에출판해주고, 내 펜에서 나온 모든 음표를 연주해준다면 어떤 정부이든 난 괜찮다. - P75
듣는 이의 가슴에 가닿을 수 있는 단순성을 성취하기 위해 특별한노력을 기울였다. 대중이 이 작품에서 어떤 멜로디도 정서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조만간 발견하게 될 것만 같다. - P81
그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1940년 키로프 극장에서 있었던 소련 초연에서 유명한 갈리나 울라노바 Galina Ulanova가 줄리엣 역할을 맡아 춤췄고, 그녀를 바라보며 관객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1946년 뒤늦게 볼쇼이 극장무대에 올려졌을 때, 이 발레는 이미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발레 중 하나로 굳건히 자리 잡은 뒤였다. 이 발레의 가장 널리 알려진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충격적으로 대담한 ‘기사들의 춤(1막 4장)‘으로, 고전 발레 레퍼토리를 통틀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명장면 중 하나가 되었다. ‘발코니 장면(1막 5장)‘에 이어 줄리엣은 다시 무도회장으로 돌아가고, 로미오가기둥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로미오의 바리아시옹‘에 이 연인들이 추는 가장 중요한 2인무(pas-de-deux)인 ‘사랑의 춤‘이 이어진다. 발레 장면을 통틀어 가장 기억할 만한, 우아하게 사랑이 넘치는장면임에 틀림없다. - P81
1936년 봄, 프로코피예프는 마침내 가족과 함께 소비에트의 수도에 정착했다. 눌러앉은 파리 사람에서 새로운 모스크바 사람으로 돌아오는 기나긴 개인적, 예술적 여정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이는 용감한 이주였으며, 공공연한 국가 차원의 격려를 받았던 초기의 뿌듯함이 프로코피예프로 하여금 자신이 소련의 우월한 사회 체제의 ‘증거‘로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눈 감게 만들었음이틀림없다. 그게 아니라면 서구화된 유명 작곡가가 왜 그토록 선뜻국가의 명령에 자신의 운명을 던져 넣었을까? - P84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저술과 연설문을 기초로 한 초대형의<10월 혁명 20주년 기념 칸타타 Cantata for the Twentieth Anniversary ofthe October Revolution Op.74>는 선전용(프로파간다) 음악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음악인 것은 아님을 증명한다. 1966년까지 공연되지 않은 이 작품은 엄청난 드라마와 상상력으로 가득하다. 이 칸타타가 ‘저속한 좌파 성향을 드러낸다는 프로코피예프 전기작가네스티프의 비난은 그가(1940년대에 요령을 익힌 다른 소비에트 비평가들과 마찬가지로) 지배층 엘리트들에게 만연해 있던 사고방식을 글에 반영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증명해줄 뿐이다. - P89
1939년은 또한 프로코피예프가 15년 만에 다시 피아노 소나타로 돌아온 해이기도 했다. 그는 훗날 ‘전쟁 소나타‘라는 명칭으로 곧잘 묶어 불리게 될 비중 있는 세 편의 연작 소나타를 쓰기 시작했다. - P93
그 첫 곡인 <피아노 소나타 제6번 Op.82>을 스뱌토슬라프 리히테르는 이렇게 잘 표현했다. 이 음악의 아주 명확한 형식과 구조적인 완벽함에 놀랐다. 나는 이와 같은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작곡가는 낭만주의적 관념들과 대담하게 인연을 끊고 20세기의 충격적인 맥박을 곡에 담았다. - P94
이 격변기에 쓰인 또 다른 주요 무대 음악이 두 곡 있다. 발레곡 <신데렐라>(다시 자세히 다룰 것)와 오페라 <전쟁과 평화>이다. 프로코피예프는 톨스토이를 깊이 숭배해서 그의 걸작들을 평생토록 읽고 또 읽었다. - P96
것이다. 미야스콥스키는 <피아노 소나타 제7번> (날칙에서 트빌리시Tbilisi로 피난한 다음에 쓴 작품이 ‘최고로 야생적‘이라고 보았고, 리히테르는 이 작품에 너무나 푹 빠져서 고작 나흘 만에 이 곡을 익혔다. 1943년 1월 18일의 초연은 굉장한 성공이었고 청중이 거의연주장을 빠져나간 다음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던 이들은(오이스트라흐도 있었다) 리히테르에게 다시 한 번 연주하라고 강권했다. 분위기는 들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지했다. 그리고 나는 만족스럽게 연주했다. 좌중은 매우 예리하게 이 작품의 정신을 간파했다. 거기에 자신들의 내면 깊숙이 숨겨진 감정과 우려가 반영되어있었기 때문이다. - P99
<교향곡 제5번>에서 나는 자유롭고 행복한 인간을, 그의 막강한 힘과 고결함, 영적인 순결함을 노래하고 싶었다. 내가 이 주제를 선택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주제가 내 안에서 솟구쳐 나와 표현해달라고 아우성쳤다. 나는 내 영혼 안에서 저절로 여문 것들을 마침내음악으로 완성했다. - P103
예술가들의 자기 규탄 행태들이 이어지는 와중에 프로코피예프가 보인 행동은 자못 품위 있다. 그는 흐레니코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형식주의 병증‘이라는 즈다노프의 비판을 받아들이며 이렇게 주장했다. - P109
나는 선율의 중요성에 대해 조금도 의심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음악적 지식이 없는 감상자들조차도 금방 이해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독창적인 멜로디를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하찮고 나약하고 어디선가 베낀 듯한 잡동사니로 전락하는 걸 경계하면서 한 줄기 간결한 멜로디를 뽑아내려면 그야말로 노심초사해야 합니다. - P110
이처럼 작곡가 조합의 관리들은 프로코피예프의 시민으로서의삶을 너무나 치밀하게 조종했기 때문에 그는 청년과 음악이라는정치적 대의명분에 자신이 충실하게 복무하고 있음을 정기적으로내보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병약하고 지적인 억압 상태에 놓인 작곡가가 젊은이와 사적이고 순수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상황의 억지스러움을 타개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문제의 젊은이는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로, 프로코피예프로 하여금 말년에 최고의 작품들을 쓰게 한 장본인이다. 당시 이십 대 초반이었던 로스트로포비치가 미야스콥스키의 첼로 소나타 제2번>을 초연한 날 이 두 음악가는 만났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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