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중환자실에서 한 할아버지가 죽음을 코앞에 둔 상황을 우연히 본 적이 있어요. 간호사들은 늘 그렇듯이 굉장히 분주했고, 할머니 혼자 그 옆에 덩그러니 있는 거예요. 자기와 평생을 함께 살아온 사람이 죽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고, 다들 각자 할 일에 바쁜 거예요. 상황은 어수선하고 조명은 밝고 커튼도 안 쳐진 상황에서 할머니 혼자 어쩔 줄 모르고 계시는데 굉장히 울컥했어요. 퇴근하다가 그 모습을 보고 커튼을 쳐드리고 의자도 갖다드렸는데, 그 모습이 너무 마음에 남았어요. 이게 이날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병원 안에서 계속 반복되는 상황이에요. 죽음이라는, 한 인간의 삶이 끝나버리는 그 엄청난 순간조차도 그렇게 다뤄지는 환경이라는 것.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것처럼 죽음이 이렇게 다뤄지는 곳이라면 환자가 다른 여러 면에서도 존중받지 못할 거라 생각해요. 이런 것들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알라딘 eBook <다른 의료는 가능하다> (백영경 외 지음) 중에서
결국 여성은 계속 증명을 해야 하는 거예요. 저는 이 ‘증명’이란 단어가 상징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의사에게 증명을 해야 하고, 성폭력상담소에 증명을 해야 하고, 쉼터에 들어가려고 해도, 산재 인정을 받으려고 해도 끊임없이 증명을 요구받습니다. 앞으로 임신중지 관련법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상담의무 조항이나 사유제한 조항들이 생기게 된다면, 임신중지를 위해 또 어딘가에 자신을 증명해야만 하는 여성들이 생기겠죠. 저는 증명과 승인의 언어로 구성된 권리가 아니라 기본권으로서의 건강권, 행복추구권으로서의 건강권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정상시민으로의 인정, 피해자로서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벗어나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기본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낙태죄 폐지운동이 좋은 예를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여성이 이렇게 힘들고 비참하니 임신중지를 허용해달라’가 아니라 ‘내 몸에 대한 결정을 할 권리는 나에게 있다’라는 기본권을 인정하라는 요구였죠.
-알라딘 eBook <다른 의료는 가능하다> (백영경 외 지음) 중에서
저는 영국이나 꾸바 같은 공공의료 모델이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들 국가에서 의사는 모두 공무원입니다. 직업에 귀천을 두지 않는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함께 만들어가는 가운데, 굳이 의사라고 해서 특권의식을 갖지 않고 임금도 크게 차이 나지 않습니다. 엄청난 지능을 요하는 특정 영역이 있긴 하겠지만 결국 의사는 반복적인 작업에 대한 성실성과 정확성이 중요한 기술자라고 생각하거든요. 한국에서 의대 문턱이 너무 높은 것도 저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의대의 문턱이 높으면 기존에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만 의대에 들어가게 되는 상황이 반복되잖아요.
-알라딘 eBook <다른 의료는 가능하다> (백영경 외 지음) 중에서
살림의원에서 화장실 개조하는 과정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원래는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이 나뉘어 있는 구조였는데 트랜스젠더 환자도 많고 조합원들 대부분이 여성이다보니까 화장실을 개조할 계획을 세웠어요. 처음에는 여자 화장실을 크게 확장하고 남자 화장실을 축소하는 정도로 생각을 했다가 조합원들의 새로운 요구들에 직면을 하게 됩니다. 기저귀 교환대가 여자 화장실에만 있는 건 성차별이라는 의견, 장애인 화장실을 따로 만들어달라는 의견, 성별이 구분되지 않는 화장실에서 실질적인 공포를 가지는 여성들도 있다는 의견 등을 조합에서 수렴해 민주적인 구조로 의결해나가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고 결국엔 성중립 화장실이 만들어집니다. 남성 소변기와 장애인용 미닫이문, 기저귀 교환대가 모두 설치되어 있고 남성, 여성, 트랜스젠더 등 누구나 이용할 수 있어요.
-알라딘 eBook <다른 의료는 가능하다> (백영경 외 지음) 중에서
어떤 의료를 꿈꿀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니 결국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내 몸을 잘 알고 내 몸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어떻게 하면 우리 모두 자기 몸에 대한 주인이 될 수 있을까요?
-알라딘 eBook <다른 의료는 가능하다> (백영경 외 지음) 중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삶에 대한 불안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안이 어디에 기인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한 연구는 신체적 건강이나 경제적 조건 등에 대한 인식도 노인의 불안에 영향을 미치지만, 가족 및 이웃과의 관계, 사회적 소속감, 사회와 타인에 대한 신뢰 정도와 같은 주관적 감각들이 노인의 사회·심리적 불안과 높은 상관관계를 가진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37 특히 우리 사회를 불평등한 사회로 인식할수록, 타인에 대한 신뢰가 낮을수록 불안을 느낀다는 이야기는 주목할 만합니다.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상태로 오래 산다는 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죽음에 대한 실존적 공포보다 더욱 큰 것 같습니다.
-알라딘 eBook <다른 의료는 가능하다> (백영경 외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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