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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생생하게 읽기 - 공자와 그 제자들이 만드는 드라마
이응구 지음 / 빈빈책방 / 2021년 3월
평점 :
논어 생생하게 읽기
이 책은?
이 책 『논어, 생생하게 읽기』는 <공자와 그 제자들이 만드는 드라마>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공자의 어록인 『논어』를 새롭게 읽어보는 책이다.
저자는 이응구,
<대학을 졸업한 뒤에 대기업, 벤처기업, 중국기업, 원자재 영업, 무역업 등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유목민처럼 다양한 생산 활동을 하다가 늦은 공부를 시작하여, 공자와 소크라테스를 만나게 되었고 이들이 몸소 실천한 ‘평생 공부하기’를 따라하면서 많은 사상가들과 고전을 만나고 있다. 수년째 동서양고전강좌를 열어 사람들을 공부하는 행복한 삶으로 이끌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그 길로 유혹하기 위해 막 저술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책의 내용은?
『논어』는 공자의 말을 담은 책이다.
공자의 말을 담는 방법은 주로 대화로 이루어진다.
공자와 공자의 제자 중 한 명과 나누는 대화를, 수록해 놓은 것이다.
또한 편집도, 그러한 대화편을 수집하여 수록해 놓은 것이라, 읽으면서도 하나의 대화와 이어지는 대화가 내용적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다. 그저 대화들을 한 군데 모아놓았다는 식이다.
『논어』의 각 편은 그 자체만으로 뜻을 가지는 게 아니라, 전후 맥락이 생략된 표현들이다. (10쪽)
해서 다른 방식으로 편집된 논어를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래서 논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논어를 해설하면서, 주제별로 또는 인물별로 새롭게 편찬하여 책으로 엮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도 그런 책중의 하나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다양한 맥락 속에서 새로운 해석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10쪽)
이 책은 그 방법으로 공자의 제자를 각각 앞세워, 그 제자에 관한 공자의 말을 분류 해설해 놓고 있다.
공자의 제자는 수 백 또는 수 천으로 헤아리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제자는 모두 6명이다.
자로, 자공, 안연, 염유, 그리고 재아와 번지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그간 읽어왔던 『논어』를 새롭게 보도록 해준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구절들을 제대로 이해하게 해준다.
예를 들자면, 자한 11장의 구절에 이런 게 있다.
공자의 병이 깊어지자, 자로가 문인들을 가신으로 삼았다. (25쪽)
이 부분, 그간 읽으면서도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자로가 문인들을 가신으로 삼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또 왜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책으로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23-24쪽)
공자가 말하는 앎이란?
공자에게 앎의 문제는 상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이다.
위(爲)는 행동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모르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그에 맞춰 실천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고 그에 맞춰 실천하는 것이다. (31쪽)
정명(正名)으로 철학하기
공자가 말하는 정명이란 무엇인가?
지금껏 읽어왔던 『논어』에서는 정명에 대하여, 정치와 관련하여 고찰할 뿐,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데 비하여, 이 책에서 저자는 정명을 화두로 삼아 철학적 접근으로 시도한다.
이는 인식론적 차원에서 보기보다는 실천적인 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43쪽)
정명은 이름을 붙이는 행위뿐 아니라 그 이름에 걸맞은 실천까지 포함한다. (44쪽)
정명은 한 번의 이름 지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중(中)에 이르는 과정처럼 끊임없이 바름[正]을 찾아가는 과정이자 철학이다. (45쪽)
이 책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공야장 5- 8의 해석에 관한 글이다.
자공과 안회, 둘 중에 누가 나은가?
子謂子貢曰: “女與回也孰愈?” 對曰: “賜也何敢望回. 回也聞一以知十, 賜也聞一以知二.”
子曰: “弗如也! 吾與女弗如也.”
공자(孔子)께서 자공(子貢)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안회(顔回)와 누가 나으냐?” 하셨다.
대답하기를 “제가 어떻게 감히 안회(顔回)를 바라보겠습니까? 안회(顔回)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압니다.” 하였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안회(顔回)만 못하다. 나는 네가 그만 못함을 허여[인정]한다.”
지금껏 이런 해석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저자는 다르게 해석한다.
자공이 대답하기를, 제가 어찌 감히 안연만 하겠습니까. 안연은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데,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밖에 모릅니다, 하였다.
공자가 말하였다. 그렇지, 안연만 못하지. 너나 나나 안연만은 못하지. (73쪽)
마지막 문장, 공자가 대답한 것이 기존 해석과 다르다.
기존의 해석 : <네가 안회(顔回)만 못하다. 나는 네가 그만 못함을 허여[인정]한다.>
저자의 해석 : <그렇지, 안연만 못하지. 너나 나나 안연만은 못하지.>
이 부분 저자가 왜 그렇게 해석하는지 그 이유를 들어보자.
주자의 주석을 비롯한 전통적인 해석은 ‘나는 네가 그만 못함을 허락한다’라고 해석한다.
한자어 ‘여(與)’에는 ‘~ 와’ 라는 뜻도 있지만 그 외에도 주다, 참여하다, 허락하다 등 여러 뜻이 있다. 필자가 여(與)를 ‘~ 와’로 해석한 반면에 전통적인 해석은 여(與)를 허락한다 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그런데 그 해석에 따라 읽으면 공자의 의도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만일 자공이 안연보다 자신이 뛰어나다고 대답했다면 모르지만 자신이 더 못하다고 했는데, 그 판단을 허락한다는 말인가? 전통적인 해석에 의지해서 『논어』를 이해하려고 했던 필자에게 이 구절은 한동안 수수께끼였다.
전통적인 해석이 이렇게 풀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완벽한 인간인 공자가 제자(안연)보다 자신이 못하다고 인정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심 끝에 여(與)가 가지고 있는 여러 뜻 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뜻을 들어 자공이 안연보다 못하다고 말한 것을 허락한다는 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이 대화를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의 대화로 읽을 수 없다. (75쪽)
나 역시 저자의 의문과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공자가 자공에게 안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허락한다니’, 무슨 대화가 이렇게 흘러가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던 구절이었는데, 저자가제시한 생각과 해석의 근거를 들어보니, 매우 합리적인 해석이라 판단이 된다.
그래서 오랫동안 품었던 의문, 이 책으로 풀리게 되니, 기쁘다.
안연 (顔淵 = 顔回)
공자가 유일하게 ‘인(仁)하며 호학(好學)하는 자’라고 인정한 안연.
그는 41세에 사망하여, 공자가 아쉬워한다.
공자는 그 소식을 듣고, “아아!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 하며 통곡한다. (선진, 11-8)
안연과 관련된 구절, 선진 7장의 해석에 관한 대목이다,
顔淵 死 顔路 請子之車 以爲之槨
子曰 才不才 亦各言其子也 鯉也死 有棺而無槨
吾不徒行 以爲之槨 以吾從大夫之後 不可徒行也
안연이 죽자 그의 아비인 안로가 공자의 수레를 팔아 관의 외관인 곽을 만들 것을 청하니,
공자가 말하였다.
“재주가 있든 없든 각자 자기 아들은 소중한 법이다. 내 아들 리(리)가 죽었을 때에도 관만 있었고 곽은 없었다. 내 아들이 죽었을 때 수레를 팔아 곽을 만들어주지 않은 것은 내가 나라에서 대부의 지위인 상황에서 걸어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 (98쪽)
이 부분, 전에 읽으면서 공자가 안연의 아비 안로가 청하는 것을 거절한 것에 대하여 그 상황과 그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았었다.
그토록 사랑하는 제자인 안연에게 그 정도도 못해준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저자의 해설을 듣고 납득이 되었다.
수레를 팔아 곽을 만드는 것은 몇 가지 이유로, 예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첫째, 당시 대부 이상의 지위를 가진 자는 거리를 다닐 때 걸어다니면 안 되었다. 반드시 수레를 이용해야만 되었다. 그러니 대부인 공자에게 수레는 꼭 필요했었다.
둘째, 공자의 수레는 사적으로 구입한 것이 아니라, 임금이 하사한 것이다. 그러니 마음대로 팔 수가 없는 것이다. (100쪽)
그러니 당시 상황에 비추어보면, 예에 어긋난 것은 안연의 아비인 안로였지, 공자가 아닌 것이다.
의미 모르고 그냥 넘어갔던 구절, 새롭게 만나다.
『논어』를 읽으면서, 그냥 의미를 새겨보지 않고 지나가버렸던 구절의 의미를 새롭게 만나게 된 것들이 많다.
계씨 13장의 구절이다.
진항이 공자의 아들 백이를 두 번 만난 기록이다. 그때마다 진항은 묻는다.
”아버님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가르침을 들은 바가 있는가?“
그런 질문에 백이는 그저 무심히 대답한다.
특별히 가르침을 받은 바는 없고, 그저 시를 공부하라 하신다.
또 다음날 만나서는, 같은 질문에, 그저 예를 공부하라 하신다,고 답한다.
그 다음 구절이 내가 흘러 넘겼던 구절이다.
진항이 물러나와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하나를 물어서 세 가지를 얻었으니, 시를 듣고 예를 들었으며 또 군자가 그 아들을 멀리하는 것을 들었구나.“ (190쪽)
마지막 부분, 새롭게 들린다.
또 있다.
헌문 41장의 구절이다.
석문이라는 곳에서 문지기가 자로에게 묻는다.
”그대는 어디에서 오는 길인가?“
자로가 답한다. ”공씨(공자)로부터 왔습니다.“
문지기가 말한다. ”안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 시도하는 그 자 말인가?“(198쪽)
내가 놓친 부분은 ”공씨(공자)로부터 왔습니다.“라는 말이다.
그 다음 말이 중요하다 해서 그말 ”안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 시도하는 그 자 말인가?“라는 말만 열심히 새겨보았지, 정작 그 말을 하게 만든 자로의 말은 새겨보지 않았던 것이다.
저자 그 말을 이렇게 새긴다.
자로가 대답한 ‘공자로부터 왔다’는 말은 자신의 현재를 있게 한 과거는 공자와의 만남으로부터라는 의미다. (198쪽)
다시, 이 책은?
모처럼 『논어』를 생생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성인 공자를 숭상하는 해석에서 벗어나, 살아 움직이는 공자의 모습을 보고,
그와 함께 한 제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새롭게 새겨가며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저자가 자한 16장을 인용하면서 맺음말을 남기는데, 그게 아주 의미있다.
공자가 시냇가에서 흐르는 물을 보며 말하였다.
”물이 흐르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203쪽)
『논어』와 공자의 삶은 흐르는 강물과 유사하다.
『논어』라는 강을 흐르는 공자의 삶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독자와 만나면 새로운 드라마로 거듭난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는 것처럼 『논어』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드라마를 보게 된다.
새로운 드라마로 다가온 『논어』, 생생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