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
렌조 미키히코 지음, 양윤옥 옮김 / 모모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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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 '유키코'가 맡긴 딸 '나오코'를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와 함께 집에 둔 채 자신의 딸을 데리고 치과에 다녀온 '사토코'는 집에 돌아왔을 때 나오코가 없자 당황한다. 그리고 끝내 나오코가 발견된 곳은 사토코의 집 정원의 능소화나무 아래였다.


네 살에 불과한 어린 소녀를 죽인 범인은 누구일까? 그리고 왜 소녀를 죽일 수밖에 없었을까? 소녀의 죽음 뒤에 숨겨진 추악한 비밀들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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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시작부터 상당히 강렬해서, 무려 네 살 소녀의 시신이, 그것도 친척의 집 정원에서 땅에 묻힌 채 발견된다. 처음에는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가 의심을 받지만 경찰은 탐문수사 끝에 '젊은 남자가 그 집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을 확보하고 용의자를 특정하기 위해 애쓴다. 총 열한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백광]은 화자를 여러 명으로 설정하고 있고, 장이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화자가 바뀌는데, 저마다 자신의 '진실된 고백'을 한다. 나오코의 죽음에 자신이 어떻게 얽혀있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화자가 바뀔 때마다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치 주사위의 각기 다른 한 면처럼 전혀 다른 느낌이고, 이들이 지목하는 '범인' 역시 저마다 다르다. 한 소녀의 죽음 앞에 분명 이들이 말하는 것은 진실일 터인데, 어째서 이렇게 이어지지 않는 것일까?



이 소설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으로는 단연 쉴새 없이 몰아치는 치밀한 반전을 꼽을 수 있다. 그 장의 화자가 담담하게, 그렇지만 한편으로 어린 나오코의 죽음에 죄책감을 가지고 풀어내는 고백은 당연히 강렬한 설득력을 가지고 이게 진실이구나!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장이 바뀌면 이러한 진실은 여지없이 뒤집히고, 새로운 고백이 다시 한 번 강렬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보통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 놀라움은 줄 수 있어도 개연성은 확보하기 어려운데 작가는 정말로 꼼꼼하게 복선을 마련하고 적재적소에 잘 회수하면서 독자에게 개연성 있는 반전의 매력을 선사한다. 하지만 나에게 이러한 치밀한 반전보다 더 돋보였던 것은 그 와중에도 놓치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이면의 감정'이었다. [백광]은 불과 300여페이지로 결코 볼륨이 큰 책이 아니고, 화자가 자주 바뀌는 만큼 메인이 되는 등장인물이 적은 것도 아닌데 놀라울 정도로 꼼꼼한 캐릭터 설정을 보여주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모습, 그들이 풀어내는 속마음, 그리고 그 이면의 감정까지 3단계로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변하는데 어느 하나 억지스러운 점이 없다. 오히려 읽으면서 '이건 다소 의아한가..' 싶은 부분도 결국 마지막에 도달하기 전에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된다. 와, 한 권의 책에 이렇게 촘촘하게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구나! 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어떻게 보면 추리소설의 독자가 가질 수 있는 선입견에의 도전과도 같은 느낌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내가 가진 선입견이 하나씩 깨져 나갔고, 동시에 내가 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에게 가진 선입견 마저 와르르 무너지는 강렬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분명 이 책이 가진 반전은 그 자체로도 놀랍다. 하지만 그 반전을 만들기까지의 과정과 그 반전이 가지는 의미를 곱씹어 생각하면 더더욱 놀라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넘긴 후 표지로 돌아왔을 때, 이 표지가 가지는 의미까지 느끼게 된다면 어떤 오싹함마저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이 주는 여운은 찜찜하지만 내내 미뤄왔던 렌조 미키히코의 다른 책들이 궁금해질 만큼, 흥미진진한 책이었다.




출판사로부터 책만을 협찬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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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계획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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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 응?? 재미있잖아!?"



연전연승의 천재 스키점프 선수 '니레이'가 연습 도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독극물에 의한 살인으로 추정한 경찰은 용의자를 찾으려 하지만 수많은 관계자들 사이에서 니레이에게 살의를 품을 만한 사람을 특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범인을 지목하는 익명의 제보로 인해 수사는 급물살을 타게 되지만 살해의 방법과 동기는 여전히 미궁 속이다.


한편 범인에게도 누군가로부터 '니레이 아키라를 죽인 사람은 너다. 자수해라'라고 적힌 편지가 도착한다. 계획도 완벽했고 실행도 완벽했는데, 과연 누가 어떻게 나의 범행 사실을 알게된 것일까? 경찰에 체포된 이후에도 편지를 보낸 자에 대한 범인의 추리는 계속되는데...




리뷰의 시작을 다소 의문스럽다는 듯이 '재미있다'는 한줄평으로 시작한 것은 이 책이 일본에서 무려 1989년, 지금으로부터 30년도 더 전에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책이라면 어느 출판사에서든 출간이 되었어도 벌써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은근히 하고 있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이니 가독성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이를 제외하더라도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최근에 출간된 어떤 책을 읽어도 '아, 다 알 것 같은데..' 했던 나였는데, 무려 30년도 더 전에 출간된 책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진실'을 만났다는 것이 무척이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스포일러가 될까봐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의외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결말도 꽤나 인상적이었다.




소설은 전개되는 동안 시점을 상당히 여러 차례 변경하는데, 물론 그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이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와 범인이다. 재미있게도 형사와 범인 모두 익명의 제보(?)를 받은 덕분에 똑같이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을 고민하고 있다. 초반부터 범인이 특정된 상황임에도 독자는 형사가 언제, 어떻게 범인의 정체를 알게될 것인지, 혹시 범인이 먼저 편지를 보낸 자를 알아내는 것은 아닌지, 편지를 보낸 사람은 대체 누구인지 등 다양한 궁금증을 가지고 책장을 넘기게 된다. 궁금증이 많아지니 책이 복잡해질 것 같지만 실제로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결국 이 모든 궁금증은 하나의 거대한 궁금증으로 모아지기 때문이다. 책의 가장 처음에 등장한 1987년의 스키점프 경기 중 발생한 사고와 니레이 살인사건을 잇는 바로 그 '조인계획'은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조인계획]은 전체적으로 보면 감정에 대한 묘사는 그다지 많지 않고, 거의 스포츠와 과학 기술에 치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무기질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앞서 언급한 두 명의 화자 외 제 3의 화자인 스키점프 선수 '사와무라'의 공이 큰데, 자신의 힘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2인자밖에 되지 못하는 사와무라의 감정이 모두가 승자일 수 없는 현실을 나름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를 여러 명으로 설정하교 교차시점으로 소설을 전개하는 것으로 상당히 여러 가지 효과를 내고 있는데, 이 작가는 초기부터 이렇게 영리하게 설정을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해보았다.




초기작품인데도.. 아니, 어쩌면 초기라서 더 이런 작품을 써낸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조인계획]은 여러 가지로 인상 깊은 책이었다. 뭔가 아주 히가시노 게이고 스타일이면서 동시에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런 것을!?!? 하는 느낌이랄까. 스포일러가 될 법한 이야기는 차치하고, 스포츠와 과학이라는 큰 줄기 아래 여러 가지를 녹여냈는데도 이쪽 저쪽의 균형을 상당히 잘 잡아서 전개도 매끄럽고 특유의 가독성도 여전하다. 스포츠에 문외한인 내가 갑자기 스키점프가 궁금해질 정도이니, 히가시노 게이고는처음부터 히가시노 게이고였구나! 하고 감탄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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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 강의 죽음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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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부유한, 그래서 모든 걸 가진 걸로 유명한 '리넷'은 가난한 친구 '자클린'의 약혼자 '사이먼'에게 첫 눈에 반하고, 기어이 그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행복해야 할 이들의 신혼여행은 어딜 가나 따라와 이들을 바라보는 자클린으로 인해 조금씩 그림자를 드리우고, 나일 강 위를 항해하는 유람선에서의 어느 날 밤 결국 자클린을 총을 손에 들게 된다. 다음 날 리넷의 시체가 발견되고 유람선에 타고 있던, 이들과 이해관계가 얽힌 모든 인물이 용의자가 되는데...


 



"저는 달이었어요...... 해가 떠오르자, 사이먼의 눈에는 더 이상 제가 보이지 않았지요...... 눈이 부셨겠죠. 사이먼은 해, 그러니까 리넷밖에 볼 수 없었던 거예요."


 



[나일 강의 죽음]은 분명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런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매혹적인 책이었다. 영미 미스터리답게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개개인의 서사도 어느 정도 있는 데다, 이 많은 등장인물을 성으로 부르다, 이름으로 부르다, 심지어 별명(?)으로 부르기까지 하고 있다. 초반부터 워낙 많은 인물이 등장해서 결국 관계도까지 그리며 읽었는데 서른 명이 넘어가며 '으아아 다 기억을 못할 것 같아!!!' 싶었고, 심지어 유람선에서 리넷이 살해당하는 것 외에도 부가적인 사건들이 발생하며 전체적인 그림이 상당히 복잡해진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많은 등장인물과 이 복잡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순간도 늘어지는 느낌이 없고, 갈수록 인물은 늘어가고 당연히 서사도 늘어가는데 어느 시점부터는 복잡하다는 느낌이 사라지고, 그저 이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해서 자꾸만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장담하건대 이 책은 최근에 출간되는 어떤 영미 미스터리보다도 가독성이 좋은, 아니 단순히 가독성만 좋은 것도 아닌 대단한 책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거의 100여 년 전에 쓰여진 책이, 그 이후 출간된 수많은 미스터리를 읽은 내게도 이렇게도 재미있을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은 최초 출간된 시기(무려 1937년)를 감안해도, 혹은 감안하지 않아도 상당히 매력적인 전개와 결말을 보여준다. 단순히 사건의 진실 만이 매력적인 게 아니라 이 수많은 등장인물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설정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것도, 촘촘하게 복선을 심어두고 아주 효과적으로 회수하는 것도, 무엇보다 그 유명한 걸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연상시킬 만큼 '유람선'이라는 공간을 멋지게 활용한 것도 어느 하나 놀랍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정말 솔직한 감상으로, 멋은 없지만 읽는 내내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는 진짜 천재다 천재.. 美쳤다 美쳤어...' 하는 감탄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발굴하는 동안 무엇인가가 땅에서 나오면, 그 주위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아주 조심스럽게 제거해야 한다네. (중략)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게 그런 걸게. 진실, 완전히 드러나 빛나는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관련 없는 것들을 제거하고 있는 거지."


 



아무래도 추리소설을 많이 읽다보니 언제부턴가 '범인은 이 사람이네', '트릭은 이거네' 하며 초반부터 김이 샐 때도 있고, 이거나 저거나 다 비슷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여기에 더해서 가장 큰 문제는 최초로 출간되고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책을 읽게 되었을 때 읽은 시기 탓에 더 뻔하고, 그래서 더 아쉽게 느껴질 때가 있다는 점이다.(특히 고전은 더더욱..) 그런데 애거서 크리스티의 책은 아직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조차 모르던 어린 내가 읽었을 때도, 한창 추리소설에 푹 빠져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던 내가 읽었을 때도, 그리고 너무 많이 읽어서 이러다 독서 슬럼프 오겠다 싶은 지금의 내가 읽어도 다 재미있다. 그냥 재미있기만 한게 아니라 그 특유의 분위기도 너무 좋고 -크리스티 여사의 책만큼 '매혹적이다'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책도 드물 듯..-, 등장인물들도 도저히 그 시대의 사람이 쓴 거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매력적이고, 소설의 전개부터 결말까지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다.(이건 뭐 그냥 추리소설의 교과서 같은 느낌이..) 결국 이 감상을 또 한 번 쓸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나일 강의 죽음] 역시 '애거서 크리스티는 애거서 크리스티구나!!!'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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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Killer's Wife 킬러스 와이프 라스베이거스 연쇄 살인의 비밀 1
빅터 메토스 지음, 최호정 옮김 / 키멜리움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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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전, 전남편 '에디 칼'이 연쇄 살인 끝에 체포된 후 검사가 된 '제시카 야들리'. 그녀에게 FBI이자 친구인 '케이슨 볼드윈'이 찾아와 최근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해 도움을 청한다. 에디 칼이 저질렀던 연쇄 살인 사건과 너무도 닮은 사건을. 고민 끝에 제안을 수락한 야들리였지만 그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증거가 부족하고 용의자를 특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그마한 단서나마 건넬 수 있는 것은 이미 비슷한 살인을 저지른 에디 칼 뿐이다. 모방범과 에디 칼은 관련이 있을까, 모방범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에디 칼이 원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야들리는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징후들은 있는 거지만 그 모든 건 나중에야 알게 되는 거야. 뒤늦게 깨닫는다는 게 그런 거지. 그 뒤늦은 깨달음 때문에 당신의 뇌는 인생이 예측 가능한 거였다고 속는 거라고.


하지만 그건 아니야."



주인공 야들리는 썩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전남편이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된 이후 주변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하나 뿐인 딸 '타라'를 어렵게 키우며, 어려운 형편에 장학금으로 대학을 가서 검사까지 된, 어느 모로 보나 주인공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서사를 지닌 사람이다. 여기에 남성 중심 사회로 여자는 '비서'쯤으로 생각하는 검사 집단 속에서 자신의 신념으로 일을 해나가는 진취적인 여성이기도 하다. 전남편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어렵게 이겨내고 -사실 다 이겨냈다고 하기에는 상처가 너무 크지만- 지내던 그녀는 다시 한 번 벌어진 연쇄 살인 사건, 그것도 전남편의 수법을 모방한 듯한 사건에 상처가 되살아난다. 고민 끝에 사건을 맡은 그녀지만 딸과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 지고, 사건을 의뢰한 FBI 볼드윈은 그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고, 함께 살고 있는 그녀의 대학 시절 교수이자 동거남인 '웨슬리'는 그녀가 다시 한 번 과거의 사건을 되새길 위험이 있는 이 사건을 맡는 것을 반대한다. 그녀의 편이 없는 것만 같지만, 또다시 반복될 살인을 생각하면 손을 뗄 수 없는 그녀의 상황이 독자가 봐도 참 막막하게 느껴졌다.




소설은 절반 정도는 야들리와 볼드윈이 힘을 합해 범인을 추적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법정에서 치열하게 맞서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아주 강렬했던 시작과 달리 추적 과정은 다소 늘어지는 감이 있었다. 등장인물도 워낙에 많고, 하나같이 의심스러운 면이 있는 데다 단서가 부족하고 목격자의 진술마저 신빙성이 부족하다보니 추적이 빠르게 진행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중반 이후 법정 장면으로 넘어가며 긴장감 넘치고, 속도감 있고, 스릴 있고, 무엇보다 짜릿함이 있는 모습으로 확! 바뀐다. 사실 초중반이 더 늘어지게 느껴졌던 것은 야들리가 어떤 단서를 통해 답을 알아내는 과정에 대한 해설이 생략된 부분들이 있어서 였는데 -자기만 알고 얘기는 안 해준다..며 투덜투덜..- 이러한 부분을 중후반에 효과적으로 사용하면서 긴장감을 배가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이야기들이 만나는 '그' 한 지점이 강력한 한 방을 선사한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조심스럽지만, 이 연출을 이 소설보다 더 효과적으로 만들어 낸 책도 흔치 않을 것 같다.




"난 사이코패스가 아니고 해리성 장애자도 아니야. 내가 그런 일을 했던 이유는...


그게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야."



작가가 검사 출신이라는 것을 책을 읽은 후에나 알게 되었고, 긴장감 넘치는 법정 장면이 단번에 이해가 갔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실적인 묘사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치열한 법정 다툼. 여기에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등장인물들과 후속작을 기대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무언가'까지. 한 편으로 끝내기에는 너무 잘 만들어 낸 토대가 아닌가 싶다. 초중반 진도가 잘 안 나가는 것 같아 -그래도 영미 스릴러인데 인물들 서사가 별로 없어서 다른 책들에 비해서는 가독성이 좋은 편이었다- 약간 시간을 두고 읽었는데, 그래서 책을 다 읽은 후에 다시 앞으로 돌아왔을 때 '헉!' 하고 놀라고 말았다. 이 소설은 정말로 영화화 하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영화를 안 좋아하는 내가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어딘가에서 영화화 해주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만큼, 흥미진진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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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로부터의 탈출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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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로'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설'에서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다. 나는 몇 살이며 언제, 어떻게 이 시설에 들어오게 된 것일까..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방을 뒤적이고 일기장을 읽던 중 숨겨진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곳은 '감옥'이라고 하는 메시지를. 탈출을 결심한 사부로는 동료를 찾기로 결심하고, 관찰 끝에 믿음직한 세 명의 동료를 만든다. 하지만 탈출을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하던 중 동료가 연달아 사라지고, 며칠 후 돌아온 동료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탈출은 쉽지 않다. 동료들을 더이상 위험하게 할 수는 없다. 결국 사부로는 홀로 탈출을 감행하는데..



한 걸음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 그게 미래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야.



매일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오늘 하루가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반복되는 하루 중 무언가 느껴지는 위화감. 주름이 자글자글해진 얼굴과 손, 휠체어가 없으면 1미터 앞을 나아가기도 어려울 정도로 쇠약해진 몸, 치매인가.. 싶을 정도로 사라져버린 과거의 기억까지. 소설은 자신을 100세 정도 되었다고 '추정'하는 사부로를 화자로 해서 전개된다. 부족할 것이 없이 편안한 시설에 살고 있지만 직원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고 -정확히는 자신들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지만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다- TV에서는 자신이 젊었을 때 활약하던 선수들이 여전히 젊은 채 스포츠 경기를 진행하고 있다. 시설에 들어온 기억도 없고, 당연히 나갈 기약도 없다. 심지어 시설 밖으로는 나갈 수 없게 굳건히 잠겨 있다. 일기장을 읽고 탐색한 끝에 시설을 나갈 방법은 찾았지만 밖은 숲 속이었고, 일정 거리 이상은 휠체어가 나가주지 않아 결국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 시설 밖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누구일까, 여러 가지 궁금증은 사부로와 동료들로 하여금 탈출 계획을 세우도록 만든다.



내가 있는 편안한 이 장소가 사실은 나를 가두고 있는 곳이었다는 것, 그래서 탈출을 계획한다는 설정 자체는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주인공이 100세 노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이 탈출은 다른 탈출과 상당히 다른 모습일 수밖에 없다. 일단 이들은 휠체어가 없으면 이동이 쉽지 않고, 자그마한 충격으로도 신체에 큰 무리가 될 수 있다. 추격자가 따라올 경우 이들을 뿌리치고 달아나는 것도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완벽한 계획과 완벽한 수행이 뒷받침 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사부로가 처음 위화감을 느낀 순간부터, 단서를 찾고 동료를 마련해 탈출을 시도하기까지, 모든 과정은 속도감 있고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사부로를 포함한 일명 '헌드레즈' 멤버들이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준비하고, 논의하고, 그 과정에서 다투고, 혹은 은밀한 '연심'을 품는 것까지, 읽는 사람까지 두근두근해지는 탈출 드라마(?)의 정석과도 같은 전개.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이 뭔가 예상이 가면서도 연출이 참 '세련되었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소설 [미래로부터의 탈출]은 총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재미있게도 한 소설 안에서 '장르'를 달리 하고 있다. 일단 첫 번째 장은 앞선 줄거리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확연히 '미스터리'이다. 그런데 해결되지 않는 미스터리..라고 해야할 것 같다. 첫 번째 장의 미스터리는 첫 번째 장에서 그 답을 알려주지 않고 다음 장으로 이어진다. 장르를 달리한 두 번째 장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전개가 되고, 어느 정도 첫 번째 장의 미스터리를 해결해 주는 역할도 한다. 그리고 세 번째 장에서는... 어떻게 될지는 직접 읽어보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전체 분량이 300페이지 정도로 각 장 역시 100페이지 내외의 분량이지만, 그 한정된 분량 안에서 해당하는 장르의 매력을 물씬 느끼게 하는 것이 정말 놀랍다. '죽이기 시리즈'를 비롯한 작품들이 통통 튀고 색다른 매력이 있고, 어딘가 '젊은' 혹은 '어린' 느낌이 있었다면 [미래로부터의 탈출]은 주인공들은 100세 가량의 노인으로 설정해서일까,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겁게,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진중하면서도 유쾌하고, 나이듦과 젊음이 공존하는 느낌이다. '아, 정말 이렇게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공감을 절로 들게 하고, 동시에 이 영리하기 짝이 없는 제목에 대한 감탄까지 빼놓지 않게 만든다. 그리고 이 책이 쓰여진 시기가 작가가 투병 생활을 하던 때라는 것을 생각하면 제목의 '미래'가 좀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그 '죽이기 시리즈'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분위기의, 그렇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책 [미래로부터의 탈출]. 그래서일까, 이 책이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이 너무 아쉽게 느껴진다.(물론 국내에는 작가의 미출간 작품이 출간될 수도 있겠지만..) 인기를 끌었던 시리즈와 유사한, 안전한 길 대신 색다른 매력을 안겨주며 기대감을 자아내는 이 작품이 마지막이라니... 보통 재미있게 읽은 책의 리뷰는 말미에 '작가의 다른 작품이 출간되기를 손꼽아 기다려야겠다'라고 적을 때가 많은데 이번에는 뭐라고 적어야 할지 어렵다. 오로지 책에 대한 감상만을 남기면, 누구나 흥미롭게 읽지 않을까.. 싶은 좋은 책이었습니다...라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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