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예상치 못하게 허를 찔리는 경우가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었던 소설 "침입자들"이 그랬다.
첫 문장이 끌리지는 않았다. 근데 한 줄 한 줄 읽다 보니 내 시간을 다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목이 침입자들 인가보다.
45세. 전 재산 10만 원 남짓인 나는 고속버스터미널에 서있다. 수중에 남은 돈으로 과연 며칠을 버틸 수 있을까?
구인 면을 펴보다 발견한 택배기사. 10개월 남짓 섬에서 택배기사 경험이 있기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나는 코알라(심주창)의 말을 빌리자면 책가방이 긴 편인가 보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소설의 이름-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팩토텀 등-들을 보자면(나는 읽어보지 못한 책이었지만),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평소에 1/5 밖에 물량이 없는 월요일에 숙소(컨테이너)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니 말이다.
비아냥 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엔 적당한 눈치를 지니고 있으면서 할 이야기는 하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행운동 택배기사인 내가 매일같이 그곳 동네에 택배를 배달하며 마주치는 우울증녀(춘자), 마이클(경찰복을 입고 있으며 늘 "오줌을 누면 손을 씻어"를 외치는 남자)를 비롯해서 함께 일하는 바나나 형님(소장), 코알라(심주창), 조 따꺼(대림동 택배기사), 낙성대, 아파트, 인헌동.... (참고로 나는 행운동이다. 맡은 구역 이름 탓).
일주일에 수십 건 택배를 받기에, 택배기사들과 안면을 트고 지내긴 하지만 그들의 속내를 소설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부모 초상이 나도, 팔다리가 부러져도 아무튼 그날 택배는 그날 배송해야 한다고"란 이야기를 보며, 슬피 웃음이 나왔다. 나 역시 시쳇말로 "경리는 월 말 월초에는 아파도, 죽어도 안된다"라는 이야기가 있는 직군이지라... ㅎ)
역시 예상했던 대로 진상 고객들이 다수 등장한다. 보고 있는 내가 울화가 치밀 정도로...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ㅠ)
근데 우리의 행운동씨 역시 만만치 않다. 절대 당하고만 있지 않으니 말이다. 자신에게 가한 위해에 상응하는 반응을 해 보이기에 우울할 새가 없었다.
그런 그의 일상에 또 한 명의 불청객 아니 침입자가 등장한다. 경제학을 전공한 90세의 노인. 말을 몇 마디 섞었을 뿐인데, 다짜고짜 퇴근 후 자신의 집으로 와서 경제철학을 배우라니...! 노망든 노인네라 생각했는데, 아뿔싸! 금요일 저녁 7시에 연락이 온다.
조용히 살고 싶어 하는 그의 삶에 불청객처럼 끼어드는 침입자들.
그리고 그들의 침입에 대해 극도로 경계하기보다는, 그저 그런 삶이라 생각하고 소극적으로 자리를 내주는 행운.
워낙 요즘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소재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에 맛이 들려서 그런지 이 책 또한 뭔가 엄청난 게 있을 듯싶지만, 생각보다 신선하고 자극적이지 않다. 오히려 평탄한 이야기가 장점인 책이다.
평범해 보이는 이야기 속에 가랑비에 옷 젖듯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일상의 소재들과 평범하지만은 않은 인물들이 등장해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개똥철학이나 책을 읽으며 소주를 홀짝이고,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행운의 모습이 꽤 오래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