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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박상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평점 :
🌲우리는 종종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기곤 한다. 나는 한 때 추억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떠오르는 장면들이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대학시절에 썼던 일기장을 펴 볼 때면 온통 회색빛이 뿜어 나온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쓰지 않고 온몸으로 비를 맞았다. 비가 나의 눈물이었다. 어느 덧 세월이 흘러 흔적들을 되짚어 보면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퍼진다.
백수린이 <시간의 궤적>에서 '화자'는 과거 언니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행복해 하지 않을까? 외국에 가 보면 모두가 낯설다. 관광으로 가던 공부하러 가던. 그 외롭고 쓸쓸한 시간에 나에게 길을 알려 주거나 음식점을 안내해주는 자그마한 친절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화자'도 프랑스에서 만난 언니로 인해 공부를 마치고 외국인과 결혼하여 정착하기 까지...
물론 타국에서 생활하는 지금이 행복한 지 불행한 지는 모르겠다. 게다가 이방인으로서 불안감도 없지 않으리라. 시간이 많이 흘러 남긴 흔적들을 되돌아 보면 절망이 희망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추함이 아름다움으로 변해 있음에 놀라곤 한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타국에 살며 자신의 시간을 엮어 나가는 용기에 응원을 보낸다.
언니가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은 부활절 방학이 시작되기 전의 어느 수요일이었다. 언니와 나는 어학원에서 몇 달째 수업을 같이 듣고 있었다. 열다섯 명의 외국인 틈에서 우리 둘만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서로 말을 섞어본 적은 없었다. 언니는 언제나 강의실의 오른쪽 둘째 줄에, 나는 왼쪽 맨 뒷줄에 앉으니 그럴 기회가 없기도 했지만 사실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나는 한국 사람들하고만 어울릴 거면 서른 살의 나이에 직장까지 그만두고 파리에 올 필요는 없었다는 생각으로 한국인들을 피하고 있었다. (p.153)
우리가 대화를 마치고 카페 밖으로 나왔을 때 거리에는 더 이상 비가 내리지 않았다. “가끔 이렇게 만나서 놀까요?” 언니가
지하철역 앞에서 헤어지기 전에 물었다. 외국에 사는 날이 쌓일수록 한국인 지인을 만드는 것이 외국인 지인을 만드는 것보다 쉽지만, 취향과 마음이 맞는 한국인 친구를 만나는 것은 취향과 마음이 맞는 외국인 친구를 만나는 일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깨달아가던 차였으므로 나는 기쁜 마음으로 답했다. “전 좋아요.” (p.156)
나는 언니가 유부남이 되어버린 옛 애인에게 여전히 연락을 한다는 말에 깜짝 놀랐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그 순간 언니가 더 좋아졌다. 언니에게도 그런 바보스러운 면이, 인간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덜 외롭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언니에게 새내기 시절부터 사귄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p.158)
애인이 내 후배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하고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서울 시내의 프랑스어 학원에 등록하는 것이었다.(중략) "그렇게 마음먹은 날, 커플링을 빼서 버리고 이 반지를 내가 사서 꼈어요." 나는 내 오른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보았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실 금반지였다. "예쁘네." (p.159)
돌이켜보면 브리스와 내가 결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언니였던 것 같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아직도 미래를 걱정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을 한심해하고 있던 내게 어느 날 언니가 “우리는 전부를 걸고 낯선 나라에서 인생을 새로 시작할 만큼 용기를 내본 적 있는 사람들이니까, 걱정 마.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스스로 원하는 걸 찾을 줄 아는 사람이야”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어느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어디선가 베트남 국수 냄새가 풍기던 골목에서 다른 것은 잘 몰라도 브리스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내 마음만큼은 확실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테니까 (p.166)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황금색으로 빛나던 장소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바람이 불면 파라솔의 몸체가 흔들렸고 이제 끝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끝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그런 생각이 들었고 옅은 슬픔 같은 것이 가슴 안에서 서서히 퍼졌다.
(p175)
한국의 여동생이 아이를 낳았다거나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나는 프랑스에 있어서 내 가족의 기쁨이나 슬픔을 공유할 수 없는데 브리스는 그의 가족에게 생기는 모든 일을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에 여전히 화가 나고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런 마음도 전보다는 많이 옅어졌다. 아마도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조언해준 것처럼 나에게도 아이가 생겼고, 그 덕분에 이제는 이곳에도 나의 삶이 생겼다고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아이가 나를 이곳에 뿌리내리게 만드는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나는 때때로 견딜 수 없을 만큼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p.179)
머지않아 거짓말같이 비가 그치고 해가 날 거라는 사실엔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처럼. 지금도 그날을 추억하면 빗속을 뛰어가는 언니와 나의 모습은 손끝에 닿을 듯 생생하고, 그러면 나는 어김없이 울고 싶어진다.(p.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