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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틀랜드 -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뼈 빠지게 일하고 쫄딱 망하는 삶에 관하여
세라 스마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0년 5월
평점 :
가난, 성적, 경제적 불평등은 개인의 문제일뿐인가?
1.
지난 며칠 동안 이 책에 흠뻑 빠져서 지냈다.
2020. 6. 5.자 한겨레 책 소개 기사를 보고 바로 주문해서 책을 받은 후 읽기 시작했는데 얼마전 비슷한 성격의 두 책, 『제인스빌 이야기』(에이미 골드스타인), 『힐빌리의 노래』(J. D 밴스)와는 또 다른 매력이 넘치는 책이었다.
2.
『힐빌리의 노래』는 개인적 경험에 바탕 한 미국 노동계급의 현실을 실감나게 알려주고 있지만, 개인적 성공에 치중하고 그 성공의 원인을 개인의 선택 및 해병대의 좋은 교육덕분이라고 말하는 등 사회를 보는 시각이 좁고, 구조적 문제는 도외시하는 책이라는 단점이 있고, 『제인스빌 이야기』는 이에 비해 GM공장 폐쇄로 위스콘신주의 작은 마을이 어떻게 어려움에 처하는지 기자 출신 저자의 객관적인 시각 및 심층 취재로 하나의 잘 짜인 소설을 보는듯한 느낌의 책이라면,
이 책 『하틀랜드』는 낙후된 캔자스 주의 시골에서 모계 쪽으로 수대에 걸쳐 10대 임신, 남편의 폭력, 가난, 약물중독의 늪에서 허덕이는 가운데 이 고리를 끊기로 결심하고 이를 실행하는 큰 과정 속에서 저자 및 그 주위 가족들의 삶을 세밀하게 복원하고 있는 책이다.
3.
이 책은 저자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속의 딸 오거스트(August)에게 들려주는 내밀한 이야기 형식의 책이다. 그러나 이것은 저자가 늪에서, 굴레에서 멋지게 벗어나서 대학교수까지 됐다는 성공스토리가 아니다.
온갖 어두운 가족의 과거를 두려움 없이 회고하고 직시하고, 그 과정에서 가난은 단순히 개인의 게으름 문제가 아니고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설교조가 아닌 진솔한 어투로 말하고 있다.
백인 여성인 저자는 “날마다 일을 하는데도 생계를 유지할 수 없고 그 원인이 인종주의가 아니라면,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의문을 표시한다.(29쪽)
레이건이 주 정부의 권한 확대와 규제 완화를 내세우며 감세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실제로는 개인 영역에 정부가 간여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종류의 억압이 생겼으며, 20세기 중산층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던 연방 정책들이 폐기되고,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갑부들이 막후의 제왕으로 등극해 기업의 지배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50쪽)
미국의 현실에서 가난한 여자가, 그것도 10대에 아기를 낳아 기르는 것은 힘들고 아기가 있으면 더 가난해지므로 엄마와 자녀들로 이루어진 싱글맘 가족이 미국 전체에서 압도적으로 가난한 가족 형태를 이룬다. 그래서 저자는 가난과 폭력 등의 고리를 끊는 첫 걸음으로 임신, 출산을 거부하고 실행한다.(77쪽)
“내 어린 시절의 많은 부분은 어른의 악몽 속에서 깨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리의 악몽은 가난이었어. 가난은 심리적 위험뿐 아니라 죽음의 위험도 함께 가져오지.
내 어린 시절은 민간 건강보험과 제약업계가 실질적으로 미국의 영리병원 제도와 결합한 시기이기도 해. 그래서 보험이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지”(112쪽)라고 저자는 토로하고 있다.
4.
저자는 자신이 거둔 성공은 혼자만의 개인적 노력뿐만 아니라 외할머니와 엄마 덕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하고 있다. 외할머니 베티는 개정교육법 제9조에 따라 기회를 잡아 법원에서 일자리(제도권 일자리)를 구해 극도의 빈곤을 탈출하고 남자에 의존하는 삶의 고리를 끊었으며, 엄마는 적어도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를 선택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126쪽)
이것을 보면 가난, 폭력, 약물 등의 고리를 끊는 것이 한사람 또는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새삼 알게된다.
5.
400쪽이 넘는 책 곳곳에 저자의 내밀한 목소리가 들리는데, 가장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부분은 어릴 때부터 겪은 엄마로부터의 애정결핍 부분이다. 16세 때 자신을 출산한 엄마조차 정신적으로 완벽한 어른이 아니었으리라. 귓불에 이어링 구멍을 내고 앙 울음을 터뜨린 자신을 엄마가 품에 안고 가게 밖으로 나갔던 순간이 엄마 품에 안긴 유일한 순간이었다는 저자의 회고에서 엄마 품에 따뜻하게 안기고 싶은 어린 꼬마의 열망이 절절하게 전해져온다.
6.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주옥같은 내용이 너무도 많아서 다 정리하기가 어렵다.
저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가상의 딸 오거스트에게 말한다.
“그래, 너는 내 딸이 아니라 고양된 나 자신이었어. 너는 수호천사가 아니라 사회에서 내 몸과 정신이 가치가 없다고 계속 주입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기에서 분리되어 표출된 나 자신의 힘이었어.”(412쪽)
오거스트는 대문자로 쓰면(August) 8월을 뜻하지만, 소문자 august라고 하면 형용사로 대단하고 위엄 있음을 뜻한다고 하는 내용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저자는 굳은 결심과 행동으로 위엄있고 중요한 사람으로 성장해간다.
7.
사족
책 표지의 촌스런 그림이 정겹다. 호수에 배가 떠있고, 버팔로를 몰고가는 말탄 사람들, 웨건을 끌고 가는 소들,밭가는 농부 등....
그림 상단에 “AD ASTRA PER ASPERA”라고 써 있는데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해”라는 뜻의 라틴어라고 한다.(187쪽)
저자의 의지를 대변하는 말인 듯 하다.
우연히 캔자스 주기라는 말이 본문 중에 나오길래 구글을 찾아보았더니 위 촌스런 그림이 바로 캔자스 주기(Kansas State Flag) 그림이었다. (사소한 발견 ^^)
정말 간만에 좋은 책을 읽은 느낌이다.
먼 나라 백인 하층계급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현실과 전혀 무관한 내용이 아닌듯하다.
일독을 강추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