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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일기 - 200년 전 암행어사가 밟은 5천리 평안도 길 ㅣ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 9
박래겸 지음, 오수창 옮김 / 아카넷 / 2015년 3월
평점 :
매우 흥미로운 독서였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고전번역의 모범적인 사례가 아닌가 생각한다.
유려한 번역, 상세한 지도 및 사진 그리고 친절한 평설과 관련 사료를 통한 상세한 주석까지 고전번역이 갖추어야할 모든 것을 충족하고 있다.
게다가 역자가 관련 분야의 전문 학자여서 해제 부분을 통해 더 깊은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서수일기(西繡日記)』는 홍문관 부교리로 있던 박내겸(朴來謙, 1780~1842)이 43세 되던 1822년 3월 16일부터 동년 7월 28일까지 장장 126일 동안 평안남도 암행어사로 활약했던 당시의 생생한 기록이다.
『서수일기(西繡日記)』의 서(西)는 평안도를 의미하고 수(繡)는 암행어사를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암행어사는 허름한 옷 속에 비단 옷을 숨기고 남몰래 업무를 수행한데서 생긴 말이라고....
이 책은 짤막한 매일매일의 일기로 기록되어있는데, 저자가 꽤 성실하고 솔직하게 당일의 내용을 기재하고 있다. 업무를 마치고 왕에게 보고하는 서계와 별단 작성의 비망록 성격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책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느낀 점 몇 가지를 적어본다.
1. 이 책은 암행어사의 행적을 실제 경험자의 일기를 통해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진귀한 기회다. 우리의 통념과 달리 그 동안 암행어사의 실제 경험 일기는 많지 않고 더구나 번역된 책은 이 책 외에 박만정의 『해서암행일기』(이봉래 역, 고려출판사, 1976)가 있다고 하는데 벌써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책이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이 책 『서수일기(西繡日記)』가 암행어사의 일기로는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암행어사는 말 그대로 행색을 초라하게 바꾸고 암행을 하며 각지를 순행하게 되는데 당시 신분을 감추고 암행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던 듯싶다. 낯선 사람의 출현은 누군가의 이목을 끌게 되고 곧 시정에는 암행어사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곤 한다. 관아의 관속이나 주막의 주인 특히 눈치 빠른 기생들은 어렵지 않게 저자가 보통의 과객이 아니고 암행어사라는 것을 간파한다.
3. 또한 당시 가짜 암행어사 행세를 하며 돈을 뜯어내는 사기행각이 자못 심각했던 모양인데 관아에서는 가짜 암행어사를 체포하고 또한 진짜 암행어사의 행적을 은밀히 추적하는 비밀 포졸들이 활동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4/22 일기에 있는 내용이다.
누군가 박래겸을 미행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다가와 민간에서 붉은 실(紅絲)이라고 부르는 쇠줄(철삭, 鐵索)을 허리춤에서 꺼내 보이며 “길손은 이 물건을 알아보겠는가?”라고 말하자, 박래겸은 안돼겠던지 품에서 마패를 꺼내 보이며 “너는 이 물건을 알아보겠는가?”라고 응수하자 그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뒤로 나자빠지고 만다. 박래겸은 그를 일으켜 세우며 “너나 나나 모두 각자 나라 일을 하는 사람이다. 너무 겁먹지 않아도 되니 힘을 내서 일을 해 가자” 라고 말하며 먼저 자리를 뜬다.
유쾌하고 해학적인 장면이다.
4. 책을 읽고 전체적으로 느끼는 것은 박래겸이 나름 성실하고 나쁘지 않은 관원이기는 하지만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암행어사는 아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는 신분을 철저히 숨겨야 하는 본분을 망각하고 자신과 친분이 있는 성천부사 이기연에게 찾아가 신분을 밝히고 접대를 받고 밤새 이야기를 하면서도 관속들 중 의심하는 자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자기합리화다.(눈치 빠른 아전들이 이를 모를 리 없다)
5. 또한 기생들과 두 번이나 동침을 하고 순천 기생 부용과는 시와 음악을 논하고 귀경길에 영화 같은 재회를 하기도 하는 등 좋게 말하면 낭만이고 심하게 말하면 방만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를 일기에 기록한 것은 솔직한 것인지 아니면 당시 만연한, 그래서 문제의식조차 없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6. 역자 오수창은 단지 일기를 번역만 할 뿐 아니라 평설을 덧붙이고 있는데 정말 긴요하고 독자가 궁금해 할 만한 사항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관련 사료와 다른 학자의 연구자료를 통해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평설이 무미건조할 수도 있는 책을 더욱 생동감 있고 폭넓은 이해를 하게 한다.
역시 번역은 관련 분야의 학자가 공을 들이고 시간을 들여 정성껏 해야 한다는 점을 새삼 느끼게 된다.
7. 상식을 깨는 팁
역자가 우리의 상식을 바로잡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암행어사의 권한에 관한 것이다. 암행어사가 고을 수령의 잘못에 대해 가하는 가장 큰 징벌은 창고를 폐쇄하는 것 즉 봉고(封庫)이다. 이는 수령의 업무를 정지시키는 효력이 있다.
우리는 흔히 춘향전 등에서 “봉고파직”을 들어서 알고 있는데 암행어사는 봉고만 할 수 있고, 파직을 포함한 관리의 임면은 국왕의 권한이었으므로 암행어사가 멋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봉고 처분이 내려지면 수령의 상관이라고 할 수 있는 도의 관찰사가 중앙에 파직을 건의하게 되고 관례상 해당 수령은 파직 후 처벌을 기다리게 된다.
8. 옥의 티 하나!
책이 정말 정성들여 만들어져서 흠을 잡기 힘든데, 오타 하나가 있었다.
144쪽 5행의 “맞아들이는 품이 꽤나14 정성스럽고...”라고 되어있는데 14는 삭제해야 할 듯! ^^
결론적으로 매우 흥미 있고 즐거운 독서시간이었다. 정성들인 번역을 담당한 오수창 교수께 감사한 마음이다. 덧붙인다면 현재 구할 수 없는 위에서 언급한 『해서암행일기』도 새롭게 번역하여 선보여 주시길 부탁드리고 싶다. 암행어사의 더 깊은 이해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