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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
라시드 할리디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평점 :
100년을 넘어 계속되는 억압과 저항의 역사
1.
우리나라의 역사도 알기 어려운데 이역만리 팔레스타인 100년의 복잡다기한 역사를 알아가는 과정은 녹록지 않다. 그 배후에 담긴 많은 함의와 맥락을 이해하기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시각으로 TV 뉴스 또는 신문 외신란을 통해 피상적으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사건, 사고를 듣고 보게 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큰 관심도 없고, 당연히 깊은 내용은 잘 알지도 못한다.
이 책은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인 역사학자 라시드 할리디의 균형 잡힌 시각으로 지난 100년의 역사를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내용을 담아 우리에게 선보이고 있다.
이 뛰어난 책을 다 요약할 수는 없지만, 책 내용 몇몇 구절을 요약하여 정리하는 것으로 이 책과 저자 그리고 번역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자 한다.
2.
어린 시절 서부영화의 왜곡된 시각은 영향력이 막강했다.
정의로운 모습의 존 웨인이 사악하고 폭력적인 인디언들을 소탕(사실은 학살)하는 장면에서 쾌감과 만족감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지속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배후에 있는 복잡하고 진실 된 역사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했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신대륙의 백인 · 인디언들의 관계와 팔레스타인 땅의 유대인 ·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그것 간에는 유사한 측면이 있다.
3.
이 책은 단순히 팔레스타인 역사학자의 책이 아니라 저자 개인이 팔레스타인의 저명한 가문의 일원으로 역사의 현장에서 겪은 수많은 일들을 책 곳곳에 풀어 놓고 있어 책의 내용이 더욱 풍성하고 생동감이 있다.
19세기 말 예루살렘 시장을 10년 넘게 지낸 저자의 종고조부 유수프 디야부터 할리디 집안사람들은 시장, 판사, 학자, 외교관 등으로 활동하면서 팔레스타인 현장에서 활약하였다.
4.
이 책의 부제(副題)가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인 것과 같이 저자는 영국의 비호 아래 유대인들이 정착민으로 밀고 들어와 정착민 식민주의를 실시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쫓아내고 박해하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100년간의 전쟁을 여섯 가지 전환점에 초점을 맞추어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내용을 담아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그것을 다음의 6번의 선전포고로 표현하고 있다.
① 첫 번째 선전포고, 1917 ~ 1939 : 밸푸어 선언과 유대인의 이주, 정착
② 두 번째 선전포고, 1947 ~ 1948 : 팔레스타인 분할 유엔 결의 및 이스라엘의 건국과 전쟁
③ 세 번째 선전포고, 1967 : 6일 전쟁과 유엔 안보리 결의안 SC242호
④ 네 번째 선전포고, 1982 :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및 베이루트 포위 공격
⑤ 다섯 번째 선전포고, 1987 ~ 1995 : 팔레스타인 봉기(1차 인티파다) 및 오슬로 협정
⑥ 여섯 번째 선전포고 , 2000 ~ 2014 : 아리엘 샤론의 하람알샤리프 방문 및 2차 인티파다
5.
첫 번째 선전포고는 1917년 영국의 밸푸어 선언이다. 그로부터 1939년까지 결정적인 시기 동안 유대인이 유입되고 위임통치령이 요구하는 대로 <유대인들이 이 땅에 빽빽하게 정착>하는 과정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밸푸어 선언은 딱 한 문장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본거지를 수립하는 것을 찬성하고.... ’가 핵심적인 내용이다.
외교적 언어로 모호하고 기만적으로 기술된 이 문구는 기실 영국이 사실상 팔레스타인 전체에 유대 국가를 세워 주권을 확보하고 이민을 통제한다는 테오도어 헤르츨(<유대국가>의 저자로 시오니즘의 주창자)의 목표를 지지한다고 약속한 것이다.
또한 밸푸어 선언은 압도적 다수의 주민들에게는 정치적 · 민족적 권리가 아니라 <시민적 · 종교적 권리>만을 약속했지만 6%에 불과한 사람들에게는 <유대인>이라고 지칭하면서 민족적 권리를 부여했다.
“밸푸어 선언으로 결국 운명이 결정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는, 팰푸어가 신중하게 다듬은 문구가 사실상 그들의 머리를 겨누는 총구였다. 영제국이 원주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밸푸어 선언은 전면적인 식민지 충돌의 신호탄이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을 희생시켜 배타적인 <민족적 본거지>의 건설을 목표로 한, 한 세기 동안 이어지는 공격의 시작었다.” (49쪽)
1922, 새롭게 구성된 국제연맹도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을 반포하여 영국의 통치를 공식화하고 밸푸어 선언을 수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언의 약속을 크게 확대했다.
위임통치령은 오직 유대인만을 팔레스타인과 역사적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한 <정치적 살해>의 뿌리가 위임통치령 전문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한 민족의 땅에 대한 권리를 뿌리째 뽑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땅과의 역사적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위임통치령 어디에도 민족적 · 정치적 권리를 지닌 한 민족으로서 팔레스타인인을 언급하는 말이 전혀 없다” (60 ~ 61쪽)
“요컨대 위임통치령은 사실상 영국의 위임통치 정부와 나란히 시온주의 행정 체제가 탄생하도록 허용했다.” (63쪽)
유대인 인구는 1차 대전 종전 시점에 전체 6% 정도에서 1926년에 18%로 증가하지만 1932년까지 크게 늘지 않다가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고 유대인을 박해하기 시작하고 영, 미에서도 차별적인 이민법이 제정되자 독일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히틀러의 부상은 팔레스타인과 시온주의 양자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된다. 1935년 한해에만 6만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다.
1930년대에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경제가 처음으로 아랍 부분을 추월하고, 1939년에는 유대인 인구가 전체의 30%를 넘어선다. (67 ~ 69 쪽)
1937년 10월 대규모의 무장 반란이 일어나 2년이 넘어서야 대대적인 무력사용으로 진압되었는데, 유혈 전쟁의 결과로 아랍 성인 남성의 약 10%가 사망, 부상 또는 투옥되거나 망명길에 올랐다. 영국인들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활용된 두 가지 수법은 수천 명을 재판도 없이 구금하거나 골치 아픈 지도자들을 유형에 처하는 것이었다. (74쪽)
6.
1947. 11. 29. 유엔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을 분할한다는 유엔결의안 181호의 역사적 표결이 이루어졌다. 결의안은 팔레스타인을 넓은 유대 국가와 좁은 아랍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을 포함하는 국제적인 분할체를 만들 것을 요구했다.
“결의안은 또 다른 선전포고로서, 여전히 아랍인이 다수인 땅 대부분에서 유대 국가에 국제적인 출생증명서를 안겨 주었다.” (111쪽)
유대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필연적으로 아랍인을 추방하는 조치가 이어졌다. 팔레스타인의 종족청소는 1948. 5. 15. 이스라엘 건국 선포 한참 전에 시작되었다.
건국 전 나크바Nakba(재앙) 첫 단계에서 30만 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주민이 추방과 공포에 질린 도주로 이어졌고 건국 이후에는 민간인들이 추가로 학살된 후 40만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자기 집에서 쫓겨나 이웃 나라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아무도 돌아갈 수 없었고 그들의 주택과 마을은 파괴되었다. (116쪽)
1948년 전쟁에서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에 패배했다(제1차 중동전쟁).
7.
(1) 6일 전쟁과 유엔 결의안 SC242호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단 6일 만에 가자 지구, 시나이반도, 요르단강 서안, 그리고 아랍지역인 동예루살렘을 점령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1967년 전쟁의 결과는 미국이 작성해 승인된 안보리 결의안 SC242호의 형태로 나왔다. 세 번째 전쟁포고였다.
“결의안 제242호에는 <전쟁을 통한 영토 획득을 용인할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도 이스라엘이 철수하기만 하면 아랍 국가들과 강화 조약을 맺고 안전한 국경을 확립할 수 있음이 언급되어 있다. 사실상 이 말은 이스라엘의 철군은 어떤 것이든 조건이 붙고 지연될 것임을 의미했다. 실제로 요르단 강 서안과 동예루살렘, 골란고원의 경우에 수십 년간 간헐적으로 직간접적 교섭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지금까지 반세기가 넘도록 전면 철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157쪽)
“결의한 제242호의 모호한 언어는 이스라엘이 방금 전에 점령한 영토를 계속 보유할 수 있는 또 다른 허점을 열어 주었다. 결의안의 영어 원문은 1967년 전쟁에서 <점령한 그 영토(from the territories occupied)>가 아니라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해야 한다(withdrawal from territories occupied)>고 규정한다. 그 후 반세기 동안 미국이 지원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점령지를 식민화할 수 있게 만든 이런 언어상의 허점을 한껏 활용했다.” (157쪽)
“가장 중요한 것은 결의한 제242호가 사실상 1949년의 휴전선(그 후 1967년 국경이나 Green Line이라고 불렀다)을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국경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1948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대부분 지역을 정복한 것을 간접적으로 승인한 셈이다.” (159쪽)
“하지만 1967년에 벌어진 사태에 관한 이야기에는 다른 측면도 존재한다. 1967년은 국제사회의 대다수가 공모함으로써 가능해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체성 부정에 대한 저항과 팔레스타인의 민족의식이 이례적으로 부활한 해였다. <1967년의 핵심적인 역설은 이스라엘이 아랍인들을 쳐부숨으로써 팔레스타인인들을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162 ~ 163쪽)
(2) 카라메 전투의 승리 및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외교적 성과
전쟁 종료 후 약 9개월 후인 1968년 3월 이스라엘군 15,000명의 병력이 요르단 소읍인 카라메(Karameh, <존엄>의 뜻)와 그 주변을 근거지 삼은 팔레스타인 투사들을 제거하기 위해 요르단강을 건넌다. 최대 군사작전을 벌인 것이다.그러나 예상치 못한 요르단군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이스라엘군은 100~200명의 사상자 및 탱크, 장갑차 등 많은 군사장비를 포기하고 후퇴하자 아랍 세계는 흥분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미지가 극적으로 바뀌었으며 그 결과 팔레스타인의 저항은 아랍세계 전역에서 갈채를 받았다.
“아이러니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정점에 달했을 때에도 이스라엘군에 어떠한 식으로든 군사적 도전을 제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전성기에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외교 영역에서였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1974년 아랍연맹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인의 유일하고 정당한 대표자로 인정받고 같은 해 야세르 아라파트가 유엔 총회에서 연설자로 초청받은 것은 팔레스타인 역사상 최대의 외교적 성과였다. (176 ~ 178쪽)
(3) 캠프데이비드 협정 – 이집트 · 이스라엘 평화조약
미국 정부는 메나헴 베긴 총리가 이끄는 이스라엘과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의 이집트 양자간 대화인 캠프데이비드 방식을 채택해 결국 1979년에 독자적인 이집트 · 이스라엘 평화조약을 이끌어 냈다.
“이 방식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축출하고, 1967년에 차지한 점령지를 방해받지 않고 식민화하고, 10년 넘게 교착 상태인 팔레스타인 문제를 보류하기 위해 베긴이 특별히 고안한 것이었다. 사다트 입장에서 보면, 이 조약으로 이집트는 시나이반도를 되찾았다. 베긴의 경우에는 이집트와 일방적으로 평화를 이룸으로써 나머지 점령지를 분쟁에서 영원히 배제할 수 있었다. 미국의 경우에는 이 조약으로 이집트가 소련을 벗어나 미국 진영으로 완전히 넘어옴으로써 중동의 초강대국 분쟁에서 가장 위험한 부분이 해결되었다.” (201 ~ 202쪽)
1979년 캠프데이비드 협정의 본질을 위와 같이 명쾌하고 정확하게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8.
1982. 6. 4. 금요일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했다.
“1982년 레바논 침공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에서 분수령이 되었다. 1948. 5. 15.이래 아랍 각국 군대가 아니라 주로 팔레스타인인이 관여해서 최초로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전쟁을 위한 전반적인 계획은 메나헴 베긴 총리와 이스라엘 내각의 승인을 받았지만 침공의 설계자인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은 침공의 진짜 목표와 작전 계획을 대개 비밀로 부쳤다. 샤론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시리아 무장세력을 레바논에서 축출하고 베이루트(레바논의 수도)에 말 잘 듣는 동맹 정부를 만들어 그 나라의 상황을 바꾸기를 원했지만, 주요한 목표는 팔레스타인 자체였다.” (209쪽)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8개 사단(12만 명)이 참여했는데 1972년 이래 최대 규모의 동원이었다. 계속된 베이루트 포위 공격으로 도시가 공습과 포격을 당했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 부대와 레바논 동맹세력만이 간헐적으로 지상전을 벌였다. 레바논 공식 통계에 의하면 개전 후 10주간 동안 팔레스타인인과 레바논인 19,000명이 사망하고 3만 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대부분 민간인이었다. (210쪽)
한편 미국은 이스라엘에 1981~1982년에 연간 14억 달러의 군사원조를 제공했는데 이 돈은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배치한 F16 폭격기, 장갑차, 155밀리, 175밀리 야포, 공대지미사일, 집속탄 등 수많은 미국산 무기 시스템과 군수품 대금으로 사용되었다.
가장 비열하고 수치스러운 전쟁의 또 다른 측면은 주요 아랍 정권들이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레바논이 힘겹게 버티는 동안 그들을 전혀 지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랍 국가들은 굴종적으로 침략 전쟁을 묵인했다. (219쪽)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레바논 사람들의 동정적인 반응에 의지하고 있었으나 자신들의 오만한 행동에 의해 레바논 사람들은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고위 간부 아부 자임의 레바논 젊은 커플 살해,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레바논 내에서 미니 국가처럼 행동하는 것 등).
“이 모든 요소들 때문에 필연적으로 레바논 국민의 여러 중요한 집단들이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등을 돌렸다. 자신들 스스로 저지른 잘못된 행동과 그릇된 전략 때문에 얼마나 큰 반감이 생겼는지를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야말로 이 시기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가장 심각한 결함이었다.” (221 ~ 223쪽)
긴 교섭 끝에 1982. 8. 12.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철수를 위한 최종 조건이 타결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팔레스타인, 레바논 민간인들에 대한 안전보장은 공수표나 다름없음이 곧 드러난다.
미국의 묵인하에, 그리고 이스라엘 군인들이 조명탄을 쏘아 칠흑 같은 밤하늘을 대낮같이 밝혀주는 가운데 <레바논부대> 민병대원들은 사브라와 샤틸라 난민촌에서 학살을 자행한다. 9월 16일부터 9월 18일 아침까지 민병대원들은 1,300명이 넘는 팔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의 남녀노소를 살해했다.
◆ 《바시르와 왈츠를(Waltz with Bashir)》 - 아리 폴먼, 데이비드 폴론스키 지음, 김한청 옮김. 도서출판 다른(2009년) 참조
“이 전쟁 자체가 그렇듯이, 사브라와 샤틸라의 죽음 또한 미국정부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었다. 샤론은 이제 막 하려고 하는 그 일에 대해 헤이그(당시 미 국무장관)에게 아주 자세히 말했으며, 헤에그는 이를 지지함으로써 사실상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또 다른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234~235쪽)
“미국 지도부도 <레바논부태>이 유혈적인 과거 전력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렇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이스라엘의 행동을 용인했기 때문에, 민간인을 상대로 사용할 무기와 탄약을 공급하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베이루트에서 철수하도록 강제하면서도 직접 대화하기를 거부하고, 아무 쓸모도 없는 보호를 보장했기 때문에, 1982년 침공은 이스라엘과 미국이 공동으로 실행한 군사적 시도로 보아야 한다.” (236쪽)
“1982년 전쟁이 정치에 미친 파급력은 엄청났다. 이 전쟁이 중동 지역에 야기한 대대적인 변화는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쟁이 낳은 가장 중요한 지속적인 결과 가운데는 레바논에서 헤즈볼라(Hezbollah)가 부상한 것과 레바논 내전이 격화되고 장기화한 것이 있다.” (238쪽)
“이 사태가 낳은 역설적인 결과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다시 시작된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의 무게중심이 이웃 아랍 나라들로부터 점차 팔레스타인 내부로 옮겨 갔다는 것이다. 5년 뒤인 1987년 12월, 1차 인티파다(Intifada)가 발생한 곳도 팔레스타인으로, 이스라엘과 세계의 여론을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240쪽)
9.
1987년 12월에 벌어진 팔레스타인 봉기, 일명 인티파다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 즉, 점령지 전역에서 자생적으로 폭발했다. 이스라엘 군용차량이 가자 지구의 자발랴(Jabalya) 난민촌에서 트럭과 충돌, 팔레스타인인 4명이 사망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봉기는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중무장한 군인들이 10대 시위자들을 잔인하게 폭행하는 장면이 텔레비전을 통해 퍼져나가면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 언론에서 대대적인 반발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무자비한 점령 권력의 본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베이루트 포위와 폭격이 언론에 보도되고 불과 5년 뒤에 이런 모습이 노출되자 미국의 우호적인 여론에 크게 의존하는 나라의 이미지가 또다시 타격을 입었다.” (246쪽)
“한편 태어나면서부터 군사 점령밖에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성년이 되었는데, 그들은 결코 점령을 묵인하지 않았다. 이 젊은이들은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 가자 지구에서 위함을 무릅쓰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현했다.” (249쪽)
“1차 인티파다가 시작된 순간부터 1996년 말까지 – 인티파다가 계속된 6년을 포함한 9년 동안 – 이스라엘 군대와 무장 정착민들이 팔레스타인인 1,422명이 죽었다. 그 중 20%인 294명이 16세 이하의 미성년자였다. 같은 기간에 이스라엘인 175명이 팔레스타인인들 손에 죽었는데, 그 중 86명이 군인이나 경찰이었다. 8 대 1이라는 사망자 비율은 상징적인데, 미국의 언론 보도를 아무리 열심히 보아도 좀처럼 알기 어려운 수치이다.” (250쪽)
“인티파다는 누적된 좌절감을 바탕으로 아래에서부터 자생적으로 생겨난 저항운동이었고, 처음에는 팔레스타인의 공식적 정치 지도부와 아무 연계가 없었다. 인티파다는 시위와 나란히 파업, 불매운동, 납세거부에서부터 다른 창의적인 형태의 시민 불복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술을 활용했다. 봉기는 비무장, 비폭력적인 방식이 압도했다.” (252쪽)
“1차 인티파다는 억압에 맞선 대중적 저항의 탁월한 사례였고, 1917년에 시작된 기나긴 식민주의 전쟁에서 팔레스타인이 처음으로 진정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을 결집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세계의 인식을 바꾸는 것도 공공연한 목표로 삼았다.” (253쪽)
“인티파다 덕분에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이 소중한 선물, 즉 풍부한 도덕적 · 정치적 자본을 선물로 받았다. 대중의 봉기를 계기로 군사 점령의 한계가 드러났고, 이스라엘의 국제적 지위가 손상되었으며, 팔레스타인인들의 국제적 지위는 개선되었다.” (260쪽)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지위가 또다시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야세르 아라파트와 그의 동료 대다수가 1990 ~ 1991년 걸프전과 관련해 심각한 오산을 했기 때문이다. 이라크에 맞서 쿠웨이트를 확고하게 지지하는 대신 <중립> 방침을 따르면서 양쪽 사이를 중재하려고 했다.” (264쪽)
“아라파트가 신중하지 못한 결정을 내린 결과가 나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쿠웨이트가 해방된 후 팔레스타인인 수십만 명이 쫓겨나는 비극이 시발점이었다. 페르시아만 국가들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대한 모든 재정 지원을 중단했다.” (268쪽)
199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미국의 중재로 오슬로 협정을 맺게 된다.
“그들이 서명한 내용은 점령지의 한쪽 땅에서 아주 제한된 형태로 자치를 하고 땅과 물, 경계선, 그 밖에도 많은 부분에 대해 통제권이 없는 것이었다. 주권의 속성들도 대부분 이스라엘 손에 있다. 나는 워싱턴과 오슬로에서 이스라엘의 껍데기뿐인 제안을 마땅히 거부했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모든 사실을 고려할 때, 아예 합의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오슬로에서 나온 합의보다는 더 나았을 것이다. 이스라엘 식민 정착민들이 점점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군사 정권 아래 사는 불만에 찬 팔레스타인인들을 단속하는데 팔레스타인 자치당국(PA)이 이스라엘을 돕는 <안보 협력> - 오슬로가 낳은 최악의 결과다 –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 (289 ~ 290쪽)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오슬로 협정의 결과가 분명해질 때까지 팔레스타인 바깥에 조직을 유지하는 대신, 마치 이미 해방이 이루어진 것처럼 이전을 감행했다. 아라파트와 그의 동료들은 스스로 우리 안으로 들어간 셈이다. 2차 인티파다의 격렬한 폭력사태가 최고조에 달한 2002년 이스라엘 군대가 팔레스타인 자치당국 사무실을 습격했고 아라파트 사망 직전까지 2년간 사실상 감금했다.” (294 ~ 295쪽)
“자치당국은 이스라엘이 허용하는 것을 제외하고 아무런 주권과 관할권, 권한이 없으며, 이스라엘은 심지어 관세와 기타 세금의 형태로 자치당국 세입의 주요부분을 통제한다.” (295쪽)
“ 인티파다를 계기로 라빈과 이스라엘 보안 기관은 점령 – 분노로 끓어 오르는 팔레스타인의 인구 밀집 중심지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치안 유지 방식 –을 수정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 깨달음의 결과물인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이 유리한 점령의 부분들 – 국가와 정착민들이 누리는 갖가지 특권과 특전 –을 유지하는 한편 성가신 책임을 떠넘기는 동시에 팔레스타인의 진정한 자결권과 국가수립, 주권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오슬로 협정Ⅰ은 또한 가장 광범위한 수정, 즉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점령의 하청업자로 끌어들이는 결정을 수반했다. 핵심은 언제나 이스라엘, 즉 점령과 정착민을 위한 안보였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복종시키는 비용과 책임은 팔레스타인 쪽에 떠넘겨졌다.” (296쪽)
“이스라엘 곁에는 필수적인 후원자인 미국이 있었다. 미국이 묵인하지 않았더라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오슬로 협정이라는 구속복을 억지로 입히지 못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것이 유일한 교섭 경로라고 고집하면서 결국 유일한 한 가지 결과로 이끄는 압박을 가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방조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파트너였다.”
“이런 파트너십 때문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전체의 식민화를 진척시키기 위해 정치, 외교, 군사, 법률 차원에서 미국의 지원 – 정착촌 건설과 예루살렘의 아랍인 거주지 잠식을 지원하기 위해 원조와 차관과 면세, 자선 기부 등으로 제공된 막대한 액수, 세계 최첨단 무기의 풍부한 공급 – 에 의존했다. 오슬로 협정은 사실 100년 묵은 시온주의 운동의 기획을 진척시키기 위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국제적 승인 아래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발표한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947년이나 1967년과 달리, 이번에는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적들과 공모하는 쪽을 택했다.” (297쪽)
10.
“오슬로 협정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이 협정 때문에 팔레스타인 식민화가 빠른 속도로 계속되었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창설을 전혀 허용할 생각이 없다는 깨달음이 분명해졌다.” (299쪽)
“이스라엘의 의도적인 <분리> 정책 속에서 가자 지구는 요르단강 서안과 단절되었고 서안은 다시 예루살렘과 단절되었다. 이스라엘 내부의 일자리는 다시 생겨나지 않았다. 번영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약속과는 달리, 1993년에서 2004년 사이에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감소했다.” (300쪽)
“하지만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새롭게 위협하는 강력한 경쟁자인 하마스 입장에서 보면, 오슬로가 팔레스타인 쪽 지지자들이 기대한 바에 미치지 못한다는 증거는 오히려 이익이 되었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보다 전투적인 이슬람주의 대안 세력으로 자신을 홍보하면서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가 1988년 독립선언에서 무력투쟁을 포기하고 외교로 전환한 것을 비난했다. 하마스는 무슬림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가 발전한 조직이다.” (302쪽)
“ 오슬로 이후 팔레스타인인들의 상황이 악화되고, 국가수립의 가능성이 점점 멀어지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하마스의 경쟁이 격화되어 결국 2000년 9월 2차 인티파다로 분출했다. 아리엘 샤론이 보안 요원 수백 명에 둘러싸여 하람알샤리프를 도발적으로 방문한 것이 성냥불 역할을 했다. 하람 – 유대인들이 성전산(Temple Mount)이라고 부르는 곳 – 은 최소한 1929년의 유혈사태 이래로 양쪽 모두에 민족주의적 · 종교적 열정이 집중되는 장소였다.” (306쪽)
“샤론의 도발이 낳은 결과로 1967년 이래 점령지에서 최악의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1차 인티파다에서 1,600명 정도가 살해되었지만 2차 인티파다 8년 간6,6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스라엘 사망자는 1,100명, 이스라엘 군경과 정착민들에게 살해당한 팔레스타인인들은 4,916명이었다.” (307쪽)
“이스라엘 군경이 처음부터 비무장 시위대에 실탄을 대대적으로 사용한 것(봉기가 시작된 <처음 며칠> 동안 130만발의 총탄을 발포했다) 결정적인 요인으로 충격적인 사망자 수를 야기했다. 지각 있는 관찰자라면, 이스라엘군이 폭력 사태가 고조되는 데 충분히 대비가 되어 있고, 이런 상황 전개를 촉발할 의도가 다분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러자 하마스와 하위 파트너인 이슬람지하드(Islamic Jihad)는 자살폭탄 공격을 대대적으로 확대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자살폭탄 공격은 주로 이스라엘 내부의 무방비 상태의 민간 목표물 – 버스, 카페, 쇼핑센터 –을 대상으로 삼았다.” (308쪽)
“ 1차 때와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2차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에 커다란 좌절을 안겨 주었다. 점령지는 극심하고 파괴적인 영향을 받았다. 2002년 이스라엘군은 중화기를 앞세워 광범위한 파괴를 야기하면서 오슬로 협정으로 철수했던 도시와 소읍을 중심으로 제한 지역을 다시 점령했다. 같은 해 이스라엘군은 라말라에 있는 아라파트 본부를 포위했고, 아라파트는 이곳에 갇힌 채 중병에 걸렸다. 이로써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지도부 전체를 점령지로 옮긴 것이 오류였음이 확인되었다.” (309 ~ 310쪽)
“이로써 팔레스타인인들이 자기네 땅의 어떤 것에서든 주권 비슷한 것이나 진정한 권한을 갖고 있거나 획득할 것이라는 겉치레는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재점령 때문에 팔레스타인해방기의 외교 노선과 하마스 등 세력의 무장 폭력 둘 다 실패했음이 드러났다. 이런 사건들을 통해 오슬로가 수포로 돌아갔고, 총기와 자살폭탄 공격도 실패했으며, 이스라엘 민간인을 아무리 죽여도 어느 모로 보나 최대의 피해자는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 또 다른 결과는 2차 인티파다의 끔찍한 폭력 때문에 1982년 이래 팔레스타인인들이 1차 인티파다와 평화 교섭을 통해 쌓아 온 긍정적인 이미지가 지워졌다는 것이다. 연이어 벌어지는 자살 폭탄 공격의 소름끼치는 광경이 세계 각지로 전송되자 (그리고 이런 보도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해지는 훨씬 더 거대한 폭력이 가려지자), 이스라엘은 이제 압제자로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비합리적이고 광신적으로 괴롭히는 세력의 희생자라는 익숙한 역할로 돌아갔다.”
(310 ~ 311쪽)
“ 폭탄 공격을 기획한 이들이 어떠한 계산을 했든 간에 그 계산에서 빠진 가장 중요한 요인은 공격이 오랫동안 계속될수록 이스라엘 국민이 더욱 단합해서 샤론의 강경한 태세를 지지한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자살폭탄 공격은 적들을 단합시키고 강화하는 데 이바지한 반면, 필레스타인 쪽을 약화하고 분열시켰다.” (312쪽)
야세르 아라파트는 2004년 11월 파리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반세기에 걸친 한 시대의 마침이었다. 마무드 아바스(아부 마진)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파타(팔레스타인 정당)의 수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스라엘이 <표적 살해>라는 이름 아래 자행한 체계적인 제거는 2차 인티파다와 아바스 시기 내내 계속되었고 파타와 팔레스타인해방전선, 하마스, 이슬람지하드의 지도자들도 살해되었다.” (313쪽)
“팔레스타인 자치당국 선거 및 2005년 대통령 선거를 보이콧했던 하마스와 이슬림지하드는 2006년 1월 의회선거에 후보단을 출마시겼다. 하마스가 의원후보를 출마시킨 것은 자치당국의 정통성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자치당국을 낳은 교섭 과정의 정당성, 그리고 교섭이 목표로 내세우는 두 국가 해법까지도 받아들인 셈이었다.
예상을 뒤엎고 하마스는 대승을 거두었다. 전체 132석 중 하마스가 74석을 챙겼고 파타는 45석을 차지했다.” (315 ~ 315쪽)
“ 하마스가 의회를 장악하자 파타와 하마스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2006년 5월 파타, 하마스 등 이스라엘 교도소에 갇혀 있는 여러 정파의 지도자 5명이 <수감자 문서>를 발표했다. 두 국가 해법을 토대로 삼은 새로운 강령에 기반해서 정파 분열을 끝내자고 호소하는 문서였다. 팔레스타인 사회에서는 수감자들이 대단히 존경을 받는데, 점령이 시작된 이래 팔레스타인인 40만 명 이상이 이스라엘에 의해 투옥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미국은 하마스가 자치당국에 들어가는 것을 극구 거부했다” (316쪽)
“ 미국이 훈련시키고 파타가 관리하는 군경이 무함마드 달란 사령관의 지휘 아래 가자 지구에서 하마스를 무력으로 축출하려는 서투른 시도를 하였으나 2007년 하마스는 역쿠데타를 일으켰고 이어진 전투에서 달란의 군대를 순식간에 압도했다. 하마스는 가자에서 독자적인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을 세웠지만, 라말라를 기반으로 한 자치당국의 관할권은 초라하게 줄어들어 요르단강 서안의 2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제 점령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무기력한 자치당국 하나가 아니라 두 개를 갖게 되었다.” (318~319쪽)
“ 하마스가 가자 지구를 장악하자 이스라엘은 전면적인 포위에 나섰다. 물자의 출입, 수출이 완전히 중단되고, 연료공급이 차단되는 등 가자는 사실상 지붕 뚫린 감옥이 되었다. 국제사회가 하마스의 선거승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시작된 사태는 팔레스타인의 파국적인 분열과 가자 봉쇄로 이어졌다. 이런 사태의 연속은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새로운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앞으로 벌어질 공공연한 전쟁을 국제적으로 은폐하는 필수적인 가림막을 제공했다.” (319쪽)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에 세 차례에 걸쳐 야만적인 공중, 지상 공격을 감행했다. 2008년에 시작된 공격은 2012년, 2014년에 계속되어 여러 도시와 난민촌의 넓은 지역이 잿더미가 된 채 거듭되는 정전과 식수 오염에 시달리고 있다.
세 차례의 대규모 공격으로 팔레스타인인 3,804명이 살해되었는데, 그 중 1,000명 가까이가 미성년자였다.” (319쪽)
“ 하지만 이스라엘 민간 목표물을 겨냥하는 하마스와 이슬람지하드의 로켓 공격에만 초점을 맞추는 미국의 대다수 주류 언론 보도를 보면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언론 보도는 이런 일방적인 전쟁, 즉 지구상에서 손꼽히는 강한 군대가 363 ㎢ 규모(대략 서울의 절반 수준)의 포위된 지역을 상대로 전력을 쏟아부은 전쟁의 극단적인 비대칭성을 감추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이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고립된 지역이고, 사람들은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포화를 피할 길이 전혀 없었다.” (320 ~ 321쪽)
“ 2014년 7월과 8월의 51일에 걸쳐 이스라엘 공군은 6,000회가 넘는 공습을 벌였고, 육, 해군은 5만 발 정도의 대포와 전차포를 쏟아부었다. 이스라엘군은 모두 합쳐 총 21,000톤으로 추정되는 고폭탄을 사용했다. 약 907㎏ 폭탄이 폭발하면 대략 폭이 15m, 깊이가 11m인 구덩이가 생기고, 거의 반경 400m까지 치명적인 파편이 날아간다.” (321쪽)
“미국은 중동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을 실질적으로 지원한 적이 없으며, 대다수 나라를 통제하는 독재나 절대왕정을 상대하는 쪽을 선호했다. 이런 비민주적 정권들은 역사적으로 방위, 항공, 석유, 금융, 부동산산업을 지원하는 미국을 비롯한 소중한 후원자들에게 영합했다. 그들은 대체로 자국의 친팔레스타인 점령과 식민화를 지원하는 미국이 어떤 역풍도 맞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332쪽)
“오바마 행정부는 미국 무기가 이스라엘로 유입되어 팔레스타인 민간인 3,000명을 살해하고 훨씬 많은 수를 불구로 만드는 것을 전혀 차단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필요로 할 때마다 무기 인도 속도는 빨라졌다. 또한 오바마는 가자 지구 포위를 놓고 이스라엘과 결정적으로 대결하지 않았다.” (337쪽)
“오바마 행정부가 남긴 유일한 흔적인 유엔 안보리 결의안 제2334호는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에서 벌이는 정착 활동을 <법적 타당성이 전혀 없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고 규정했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제재나 강제 조치는 전혀 취하지 않았다. 결의안은 무력했으며 현지의 상황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338쪽)
노벨평화상을 가불로 받은 오바마의 무능과 배신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그는 한반도 북핵문제에 있어서도 ‘전략적 인내’라는 전혀 전략적이지 못한 무책임한 정책으로 일관한 바 있다.
11.
“ 팔레스타인의 현실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불평등 문제다. 이 문제는 가장 중요하기도 하다. 불평등은 아랍인이 압도적으로 많은 땅에서 유대 국가를 창설하는 데 필수적이었고, 그 국가의 지배를 유지하는 데에도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내에서 몇몇 중요한 권리는 유대계 시민들에게만 보장되며 20%를 차지하는 팔레스타인계 시민들에게는 부여되지 않는다. 물론 점령지에서 이스라엘 군사 체제 아래 살고 있는 500만 팔레스타인인은 권리가 전혀 없는 반면, 50만이 넘는 점령지의 이스라엘 식민자들은 완전한 권리를 누린다. 이런 체계적인 종족 차별은 언제나 시온주의의 핵심적 면모였다. 시온주의 자체가 정의상 아랍인이 다수인 땅에 배타적인 민족적 권리를 갖는 유대인 사회와 정치 체제를 창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348 ~ 349쪽)
“시온주의에 있는 고유한 체계적인 불평등을 뿌리 뽑는 것이야말로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 둘 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분쟁의 어떠한 해법도 평등의 원리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다. 두 사회가 결국 어떤 미래 계획안을 받아들이든 간에, 인권, 개인의 권리, 시민권, 정치권, 민족적 권리의 절대 평등을 소중하게 보장해야 한다. 다른 어떤 방안도 문제의 핵심을 다루지 못하며 또한 지속 가능하지도 못할 것이다.” (351 ~352쪽)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대결이 근본적으로 식민주의적 성격을 띤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지만, 어떻게 생기게 되었든 간에 현재 팔레스타인 땅에는 두 민족이 존재하며, 한쪽이 다른 한쪽의 민족적 존재를 부정하는 한 두 집단의 충돌은 해결될 수 없다. 양쪽의 상호 인정은 민족적 권리를 비롯한 모든 권리를 완전히 평등하게 보장하는 것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354쪽)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힘겨운 싸움을 벌여 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금방 성과를 얻을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
미국은 제아무리 힘이 세더라도 시리아와 예멘, 리비아 등 중동 여러 지역에서 벌어진 위기 사태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했을 뿐이다. 때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미국이 언제까지고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독점에 가까운 지위를 유지하지는 못할 테고, 오랫동안 누려 왔던 대로 중동 전체에 대해서도 계속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평등과 정의에 바탕을 둔 이런 경로만이 100년에 걸친 팔레스타인 전쟁을 끝내고 지속적인 평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평화와 더불어 팔레스타인인들은 마땅히 누려야 하는 해방을 맞이하리라.” (365 ~ 367쪽)
12.
길고도 긴 요약을 드디어 마쳤다.
이렇게 훌륭한 책을 그저 한 번 읽고 흐릿하게 지워지는 것이 너무도 아까워 힘에 겹지만 많은 내용을 이곳에 모아 둔다는 심정으로 요약을 했다.
서로의 민족적 존재를 인정하고 평등과 정의에 근거하여 협상을 통한 100년 전쟁의 종식을 희망하는 저자의 소원이 멀지 않는 때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책 요약을 마친다.
◈ 아쉬운 점 몇가지
1> 상세한 지도가 없는 점 – 팔레스타인, 중동의 지리에 어두운 일반 독자들을 위해 상세한 지도들을 각 장 앞에 덧붙였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2>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100년간(1917 ~ 2017)의 중요 연표가 없는 것이 아쉽다.
3> 이 책에는 미디어 등을 통한 익숙한 인물들 외에 낯선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책 말미에 중요인물들에 대한 <인물 약전>을 작성해 첨부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창비의 대표 등 평생을 출판편집자로 일관하신 정해렴 선생님이 1인 출판사인 <현대실학사>를 차리고 다산의 저서 등을 편역, 출판할 때 책 뒷편에 정성을 들여 <인명, 서명 해설>을 꼭 덧붙인 것을 참조하길. 노구에 1인 출판이었음에도 이러하였는데 후배 출판편집자분들은 분발하시길....
▣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 몇 권을 간략히 적어둔다.
1. 《숙명의 트라이앵글》 - 노암 촘스키 저, 최재훈 옮김. 이후(개정판 2011년)
: “이 책은 미국,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세 꼭지점 관계를 통해 비판적 시각으로 중동 문제 전반을 고찰하고 있다.” - 책 후면
2. 《팔레스타인 현대사》 - 일란 파페, 유강은 옮김. 후마니타스(2009년)
: “이 책은 식민자가 아니라 피식민자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 점령자가 아니라 피점령자에 동조하는 사람, 사장이 아니라 노동자 편에 서 있는 사람이 쓴 것이다.” (서문 중에서)
- 저자는 이스라엘 하이파 출신으로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시온주의와 이스라엘의 공식 역사에 도전하는 대표적인 학자.
3. 《촘스키와 아슈카르, 중동을 이야기 하다》
- 노엄 촘스키, 질베르 아슈카르 대담, 강주헌 옮김. 사계절(2009년)
: 촘스키와 아슈카르 두 사람의 대담을 통해 우리는 미국과 중동의 깊은 속내와 맥락을 엿보고 들을 수 있다. 중동의 진실을 알기 위해 꼭 읽어야 할 책
4. 《중동의 평화에 중동은 없다》
- 노암 촘스키, 송은경 옮김. 북폴리오(2005년)
: 1967년 전쟁(6일 전쟁)과 1970년대, 새천년 전환기의 인티파다(봉기), 이스라엘과 미국, 9/11 그 이후 테러와의 전쟁에 관한 촘스키의 글들이 담겨 있다.
5. 《6일 전쟁, 50년의 점령》 - 아론 브레크먼, 정회성 옮김. 니케북스(2016년)
: 1967년 6일 전쟁(3차 중동전쟁)과 폭압적인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의 실상을 구체적인 사실과 현장 주민들의 진술을 통해 절절하게 고발하고 있다. 건조한 사실들의 나열이 아니라 처참하게 짓밟히고 억압받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저자는 이스라엘 포병장교 출신으로 1982년 레바논 전쟁에 참전했고, 소령으로 전역, 런던 킹스칼리지 대학교수
6. 《팔레스타인 비극사》 - 1948, 이스라엘의 탄생과 종족청소 -
- 일란 파페, 유강은 옮김. 열린책들(1917년)
: 위 《팔레스타인 현대사》 저자의 후속작으로 부제(副題)와 같이 1948년 이스라엘 국가창설 과정과 그 뒤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자행된 범죄를 폭로하는 책이다. 팔레스타인의 마을 수백 곳이 고의적으로 파괴되었고 민간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되었으며, 백만 명 정도의 남녀 그리고 아이들이 강제로 자신들의 고향에서 추방되는 등 ‘종족청소’의 범죄행위를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 뛰어난 만화책으로는 다음 책들 참조
7. 《팔레스타인》 -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글논그림밭(2002년)
: 코믹 저널리즘의 진수,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
1991년 말 ~ 1992년 초까지 팔레스타인에서 그곳 사람들과 지내며 겪은구체적인 체험을 기록
8.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 조 사코 지음, 정수란 옮김. 글논그림밭(2012년)
: ‘피의 잉크로 그려내는 조 사코의 현장 르포, 21세기 비극의 현장,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9. 《만화로 보는 중동, 만들어진 역사》
- 장 피에르 필리유 글, 다비드 베 그림, 권은하 옮김, 김재명 감수. 도서출판 다른(2019년)
: 한정된 지면에 간결하고 압축된 정보와 그림으로 사실을 넘어 진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끊임 없는 개입과 침략에 의해 중동의 역사가 어떻게 왜곡되고 파괴되어왔는지 알 수 있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