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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박물관 1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정확히 1여년 만에 다시 이 책을 손에 집어 들었다. 더욱 강해지는 햇살만큼 삶의 무게가 무거워지는 2010년 초여름날 이 책을 처음 만났다. 제목은 <순수 박물관>, 저자는 <내 이름은 빨강>으로 국내에 널리 알려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오르한 파묵. 제목과 저자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런데 당시 독서로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책이란 때가 있는 법이듯 당시에 이 책은 내가 읽기엔 너무나 벅찬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시 잡은 이 책. 각각 400페이지가 넘는 2권의 분량에도 불구하고 잡은 그날부터 쉬지 않고 읽어내려갔다.
이 책의 뒷 표지에는 이런 말이 쓰여있다. "한 여자와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처절하고 지독한 사랑과 집착". 어찌보면 참 아리송한 말이지만, 이 말만큼 이 책을 정확하고도 아름답게 표현할 말을 찾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퓌순을 향한 케말의 30년간의 이야기가 바로 이 2권에 집약되어 있으니 말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터키 이스탄불. 시대는 1975년으로 자유연애(성적인 것을 포함한)가 아직 정착하지 못한 구시대적인 사고가 팽배한 때이다. 부유한 집안에 잘 나가는 회사, 게다가 결혼을 약속한 아름다운 연인 시벨을 곁에 둔 우리의 주인공 케말은 약혼식을 앞둔 어느날, 시벨을 위한 선물을 사기 위해 들른 상점에서 먼 진척 퓌순을 만나게 된다. 케말은 매력적인 외모에 누구보다 따뜻한 감성을 가진 퓌순에게 한순간 매료되었고 그날 이후 그들은 은밀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야 했던 이들이 선택한 곳은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케말의 옛 아파트. 그곳은 어릴적 케말의 물건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먼 친척인 관계로 어린시절 몇번 만났던 퓌순과 케말의 추억의 물건들도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십여 년이 지난 시간, 다시 케말과 퓌순의 추억의 물건들로 채워져 나간다.
하지만 케말에게는 약혼자가 있었고, 시벨과 그의 약혼식 당일날 퓌순은 홀연히 모습을 감춘다. 그녀가 떠나버린 후에야 그녀에 대한 멈출 수 없는 사랑을 깨달은 케말은 자신의 약혼녀에게 자신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파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1여 년간 퓌순을 찾아 헤매고 339일 만에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있는 퓌순을 만나게 된다.
여기까지가 1권의 중후반부까지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책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유부녀가 된 퓌순을 만나게 된 이후의 8년, 그리고 그 이후의 30년 간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의 결말이라 할 수 있는 케말과 퓌순의 사랑에 대해서는 여기서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물건의 힘은 그 안에 쌓인 기억만큼이나 우리의 상상과 기억력의 추이와도 연관되어 있다.
다른 때라면 전혀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그저 평범하다고 여겼을 바구니 속에 든 에디르네 비누나
비누로 만든 포도, 모과, 살구, 딸기는 한 해의 마지막 날 밤에 마음속 깊이 느꼈던 평안함과 행복감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감정들은 내게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은 이 물건들과 마주하는 관람객들로
그렇게 느끼리라고 진심으로 순수하게 믿는다."
_ <순수박물관 2>, 91쪽
이 책의 제목이 <순수박물관>인 이유는 케말이 했던 퓌순에 대한 사랑의 방식 덕분이다. 이 책의 주요 모티프로 등장하는 '한 쪽 귀걸이'나 '손수건' 등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는데, 케말은 퓌순의 물건들을 수집해 처음 둘이 만났던 그 옛 아파트에 하나 둘 모으기 시작한다. 후에는 그것은 성냥갑, 퓌순의 담배꽁초(총 4213개가 되었다), 소금 통, 커피 잔, 머리핀, 슬리퍼 등으로 더욱 다양화 되고 퓌순은(그리고 그의 어머니도)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둔다. 그리고 30년 뒤에 케말은 그 모든 것들로 박물관을 세울 것을 결심한다. 퓌순에 대한 30년의 역사를 담은 순수 박물관을 말이다.
그리고 실제 그 박물관은 이스탄불에서 개관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 책에 2권에 보면 입장권이 들어 있다. 실제 이걸 가지고 가면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2010년 개관 예정이라고 했던 이 박물관에 대한 정보는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 알게 되시는 분 제게 꼭 알려주시기를...)
2권의 마지막 장에는 실제 작가 오르한 파묵이 등장한다. 자신의 사랑의 역사를 기록해달라는 케말의 부탁을 받는 부분부터 이 책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제3자 적인 시각이 등장한다. 이 책을 처음 받고 의아했던 '소설 책에 웬 인명 색인?'에 대한 비밀도 그곳에 가서야 풀린다. 실제 작가가 등장하니 반갑기도 하고, 그 매끄러운 구성력에 놀랍기도 했다.
<롤리타>가 한 권의 책을 통해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보이는 광적인 사랑을 표현했다면, 이 책 <순수박물관>은 평범한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보이는 순수한 사랑을 표현했다고 하겠다. 퓌순은 행복했을 것아다. 그렇게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