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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마지막으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을 읽은 것이 <뇌>였으니, 어림잡아 7,8년 전 일일거다. 책 잘 안 읽던 내가 그토록 재미있게 읽었으니 그의 작품 세계에서 받은 영향력은 꽤 컸을텐데도 이상하게 그의 책에 손이 잘 안 갔다. 베르나르 책 말고도 읽을 것이 쌓여 있었기 때문인 것도 컸지만, 솔직히 고백하면 그 사이 베르나르가 발표한 <신>, <인간>, <파피용>, <키산드라의 거울> 등의 소설은 그 주제에서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책 <웃음>은 서점에서 발견하자마자 그 소재에 큰 흥미를 느꼈고, 이 책을 그 누구도 아닌 베르나르가 썼기 때문에 읽어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1권의 23페이지를 넘어가는 순간 이 책은 지금 바로 내가 읽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제조업자들은 일반적으로 자기들이 만든 상품을 소비하지 않습니다. 상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죠.
의사들은 남을 치료하기는 해도 자기들 자신을 치료하는 데에는 서툽니다.
빅토르 위고는 다른 소설가들의 작품을 읽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젖소는 우유를 마시지 않는다>고 말렸죠.
패션 디자이너들은 대개 옷을 잘 입는 사랍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기자들은... 신문에 난 것을 믿지 않습니다."
_ 1권, 23쪽
프랑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코미디언, 분홍색 어릿광대, 하트 모양 눈을 가진 키클롭스 등 수많은 애칭으로 불리며 프랑스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다리우스 워즈니악. 그 유명 코미디언이 올림피아에서 열린 자신의 공연을 성공리에 마치고 내려와 심장 발작으로 돌연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모든 국민들에게 웃음을 전하며 전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한 코미디언의 사망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의 사망 정황에 모든 시선이 주목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정황이라는 것이 조금 이상했다. 공연을 마치고 무대 뒤에 마련된 자신의 대기실에 문을 잠그고 들어간 다리우스는 한마탕 큰 소리로 몇초간 웃더니 어느 순간 웃음 소리를 뚝 그치고 갑자기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는 것이었다. 무언가 이상한다는 것을 느낀 <르 게퇴르 모데른> 사회부 기자인 뤼크레스는 다리우스의 죽음 뒤에 음모가 있다며, 다리우스 타살설을 제시한다. 논리의 출발점은 제조업자들은 자기들이 만든 상품을 소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기자들이 기사를 믿지 않듯, 웃음을 파는 코미디언들이 혼자 있을 땐 웃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뤼크레스는 전 국민의 사랑을 받던 코미디언의 사망 뒤에 감춰진 음모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이것이 장장 두 권에 걸쳐 펼쳐지는 <웃음>의 출발점이다. 표면적으로는 그저 살인사건에 대한 추격전, 범인을 찾아가는 추리소설 같다. 실제로 1권의 절반쯤까지 읽었을 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으니깐. "추리소설 + 소설과 번갈아가며 등장하는 '유머 대사전'" 형식의 긴장감을 실어줬다 웃음으로 이완하는, 그런 형식의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권의 절반을 넘어가는 순간 이 소설이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한번 베르나르의 상상력과 박학함에 감탄했고, 이 한권의 소설이 탄생하기까지 그가 얼마나 많은 자료조사를 했고, 얼마나 깊이 '웃음'의 의미에 대해 고민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웃음'이라는 코드로 역사를 재해석하고, '웃음'의 사회학으로 우리 사회의 변화를 보여주며, '웃음'이라는 도구가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이 소설 자체가 '웃음의 성베'인 소설이었다.
유머는 일탈 또는 금기의 위반을 바탕으로 작동합니다.
사람들이 느끼는 사회적 중압감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유용성이 있죠.
그런가 하면 유머는 두려움을 해소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남자들이 여자들을 조롱하는 것은 알고 보면 여자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_ 1권, 315쪽
한 사회가 보여주는 웃음의 양상은 그 사회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말해 주는 지표의 하나일세.
유머의 양과 질이 어느 수준에 도달해 있는가를 보면 그 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심리 상태를 가늠할 수 있지. _ 2권, 234쪽
뤼클레스는 최하위 문화로 간주되는 우스갯소리의 문화가 실제로는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겨냥한 우스갯소리는 특히 중요했다.
평생토록 잊지 않을 만큼 마음속 깊이 각인되기 때문이었다. _ 2권, 248쪽
이제 권력은 대중의 웃음을 관장하는 사람들의 것이 되었어요.
그들의 지배를 보장하는 것은 불행을 잊게 하거나 상대화하는 능력, 그리고 따분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기분을 풀어 주는 능력이죠. 사람들을 웃게 하는 것은 오늘날 가장 위대한 힘이에요. 어떤 힘도 그 힘을 능가하지 못할 겁니다. _ 2권, 351쪽
다리우스의 죽음을 파헤지기 위해 위험을 무릎쓴 여기자 뤼크레스는 웃음의 힘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고아원에서 모욕과 수치를 경험하고 자살을 결심한 순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다리우스의 유머를 들었던 것이다. 엉뚱한 이야기에 몰입하고 웃고 있는 순간만큼은 현실을 잊을 수 있었고, 행복을 경험할 수 있었다. 다시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뤼크레스는 다리우스의 유머를 들으며 힘든 순간들을 버텨냈다. 한 코미디언이 전한 웃음은 어른들의 조언보다, 성인들의 말보다, 책 속의 지혜보다 더 강력했던 것이다.
내게도 작지만 웃음의 힘을 결험하게 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을 보고 웃고 있으면 답답한 일상, 우울하고 힘들었던 시간들이 말끔하게 사라지고, 다시금 에너지를 불러 일으키는 그런 웃음 말이다. 팬으로 시작했지만, 이제 그들은 내게 스타라기 보다는 고마운 사람들이 되었다. 뤼크레스가 모든 사건이 해결되고, 정작 기사에서 다리우스 웃음 뒤에 감춰진 어마어마한 진실을 밝히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 고마움과,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이 책을 중간쯤 읽었을 때 한 국회의원이 개그 프로그램을 고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마침 유머 기사단 총본부(소설에 등장하는 유모 수호 단체) 유머 역사 대전에 실린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그는 기원전 389년 아테네에서 희극 공연을 했는데, 그의 이야기는 주로 시사 풍자였다. 철학자와 귀족을 조롱하거나, 전쟁만 벌이고자하는 정치인들을 풍자하거나, 사회 과정관념을 깨는 대담한 주제들로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객석은 언제나 만원이었고 아테네 시민들은 그에게 열광했다. 하지만 어느날 권력자 클레온이 하수인들을 보내 극장을 봉쇄하고 그를 공공질서를 문란하게 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한다. 그리고 그는 극작가 활동 금지와 배상 책임을 받고 떠돌이 신세로 전락한다.
몇 년이 지나고 어느날, 한 남자가 다가와 아리스토파네스에게 당신을 잘 알고 있다며 자신과 함께 어딘가로 가달라고 청한다. 그리고 반신반의하며 따라간 아리스토파네스는 깜짝 놀란다. 어느 지하 공간에 모인 50 여명의 사람들이 자신이 들어가자 뜨거운 박수를 보내오는 것이었다. 그의 유머를 잊지 못한 시민들은 그를 위해 무대를 마련해주었고, 그가 계속 공연을 할 수 있도록 지낼 곳과 마련해주는 등 아낌없는 지원을 보냈다. 그리고 그 사이 권력자 클레온은 권자에서 밀려났고, 아리스토파네스는 다시 작품을 무대에 올려 큰 성공을 거둔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와 그 고소 사건이 겹치며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웃음은 원래 풍자와 해악에서 출발했다는 것, 금기를 깨고 일탈을 추구하면서 나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어떤 권력으로도 사람들의 웃음을 막을 수 없다고 말이다. 이 땅의 웃음을 전하는 모든이들에게 마음 속 깊은 감사를 전하며, 웃음이라는 주제로 이토록 놀랍고 멋지며 장난끼 가득한 소설을 써준 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